라스베이거스 여행기 1
요란하게 알람이 울린다. 4시 30분. 남편은 짜증스러운 얼굴로 나를 팔꿈치로 툭툭 치며 어서 준비하라는 신호를 보낸다. 향수와 담배냄새가 어우러진 호텔방의 냄새에 다시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 같다. 하지만 11시에 엔텐로프 캐년 투어가 잡혀있는지라 서둘러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눈도 못 뜨는 아이들이 대충 얼굴에 물만 묻히고 나오자 옷을 챙겨 입혔다. 11월에도 라스베이거스는 따뜻하다고 하지만 새벽녘의 공기는 제법 쌀쌀했다. 맥도널드에 들려 맥모닝 세트 4개를 들고 289마일 떨어진 앤텔로프 캐년으로 출발한다. 밤새 휘항찰란하게 빛나던 도시를 벗어나자 메마른 땅과 산으로 둘러싸인 새로운 세계 위로 아침해가 조금씩 솟아오르고 있다. 뒷좌석의 아이들은 다시금 골아떯어졌고 나와 남편은 어색한 침묵을 유지하고 있다.
우리는 추수감사절 기간 동안 미국에서의 첫 여행을 계획했다. 항상 알뜰한 남편은 비행기 값을 절약하고자 가장 싸게 갈 수 있는 방법을 찾았는데, 남들이 들으면 도대체 어떻게 그렇게 싸게 살 수 있냐고 감탄할 정도였다.
비결은 간단하다. 우리가 생고생을 하면 되는 것. 집에서 3시간 떨어진 공항으로 차를 몰고 가서 차를 장기주차해놓고 사람들이 꺼려하는 밤낮은 시간이나 이른 새벽의 비행기를 타면 제법 싼 가격으로 다녀올 수 있다.
물론 추수감사절이 낀 기간 동안은 좋지 않은 시간대도 비싸기 때문에 가격이 비싸지는 지점 바로 앞에 날짜를 예약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곳에서 대학원생인 남편은 추수감사절 일주일 전부터 휴가라지만
아이들은 학교를 3~4일 빠져야 하는 일정이었다. 10살 8살 아이들에게는 쉽지 않은 여정이었고 라스베이거스에 처음으로 와봤다는 기쁨보다는 피곤에 지친 아이들이 공항에서부터 풍겨 나오는 담배냄새에 더욱 짜증을 냈고 나는 배려심 없는 남편에게 종종 솟아오르는 감정을 억누르느라 지쳐갔다. 설상가상이라고 남편이 패키지로 싸게 얻었다고 좋아한 호텔은 짙은 담배냄새와 그것을 덮으려는 향수 냄새로 뒤범벅이 되어 속을 메슥거리게 했고 카지노 여행객을 위한 호텔이라 아이들이나 가족을 위한 편의성을 거의 제공되어 있지 않았다.
우리 가족이 처음 느낀 라스베가스는 담배 연기 자욱한 머리아픈 미식거림과 시끄러움이었다. 그렇게 친절하지 않은 그곳에서의 첫날밤이 지나갔다.
출발한 지 4시간쯤 지나자 차츰 목적지가 가까워지면서 주변은 이제까지 보지 못했던
새로운 풍경들로 가득 찼다. 찬란한 아침햇살과 처음으로 보는 신기의 암석의 행렬은 딱딱하게 굳어있는 마음을 조금씩 말캉말캉 보드랍게 주물러 간다.
투어를 30분 남겨놓고 드디어 Lower Antelope Canyon에 도착했다. 라스베이거스에서 5시에 출발했는데 도착한 시간은 10시 30분. 장장 5시간 30분 동안의 여정이라니.. 비행기 타고 4 시간 가는 필리핀도 싫다 하던 내가 투어 하나 하겠다고 5시간 넘게 이 멀고 먼 거리를 운전해 오다니 미국이란 나라의 사이즈에 앞으로의 여정이 새삼 걱정되기 시작한다.
나바호 인디어 보호구역에 위치해 있는 앤텔로프 캐년은 upper와 lower로 나뉘어 인디언 가이드의 안내에 의해서만 투어가 가능하다. 투어 비용은 4인 가족 기준으로 200불 가까이 되니 싼 가격은 아니다. 앤텔로프 캐년은 땅속으로 협곡이 형성되어 있는 특이한 구조여서 해가 들어올 때가 가장 아름답고 빛의 방향이나 각도에 따라 다른 모습을 자아내는 장관을 이루어서 많은 이들이 인생 사진을 찍어가는 곳으로 유명하다.
그 명성만큼이나 관강객수도 엄청나서 떼거지로 모여든 한국, 중국, 일본 관광객들을 보고 있자니 잠시 한국에 다시 와있는 듯한 착각까지 들었고 이 세 나라에서의 인기를 증명하듯 안내판의 언어도 한국어, 중국어, 일본어가 나란히 게시되어 있었다.
나무와 물이 만든 아름다운 협곡 앤 텔 로프 캐년 . 이미 너무나 많은 사진으로 보았던 곳이라 생각보다 벅찬 감동이 밀려오진 않았지만물결치듯 부드러운 암석의 결들과 유려한 빛의 행렬이 한 번씩 장관을 이룰 때면 수많은 인 관광객 틈바구니 안에서도 이곳에 홀로 앉아 유려한 빛의 쇼를 감상하는 나를 상상해 보기도 했다. 이곳을 처음 발견했다는 인디언은 아마도 이곳을 비밀장소로 만들고 힘들거나 외로울 때면 이곳으로 달려와 바위의 결마다 숨어있는 빛들과 얘기를 나누며 지치고 힘든 마음을 달랬으리라.. 이런 생각들을 하며 발거 움을 옮기던 찰나 가이드인지 뒤쪽의 인도 관광객인지 모르겠지만 이곳을 발견한 인디언 형제가 떼돈을 벌었다느니 서로 소유권을 놓고 싸우느라 upper와 lower로 나뉜 것이라는 것 따위의 소리들이 들려왔다. 대자연의 웅장함 속에서도 절대 빠질 수 없는 우리네 돈 이야기..
생각보다 굴곡이 있어 오르고 내리 고를 반복하고 앞선 인도팀이 수백 장의 사진을 찍을 때마다 기다렸더니 어느새 1시간이 넘게 흘러있었다. 투어를 마치고 나와 이곳에서 30분 이내에 있는 호스슈 밴드로 이동한다. 라스베이거스에서 앤 텔 로프에 이르기까지 또 앤 텔 로프에서 호스슈까지에는 식당이랄 곳이 거의 없기 때문에 우리는 새벽녘에 산 맥모닝과 내가 전날 집에서 바리바리 싸온 도시락과 간식들로 차 안에서 요기를 했다.
horse shoe band는 이름 그대로 말발굽 모양의 굽은 강으로 애리조나 페이지 근방을 흐르는 콜로라도 강의 한 부분이다. 낮이 되니 제법 따가운 햇살 아래 여과 없이 드러난 바닥은 점점 열기를 더해갔고 더위와 북적이는 관광객에 치여버린 아이들은 말발굽 모양의 돌 따위에는 이미 흥미를 잃은지 오래였다.
지쳐서 얼른 돌아가고 싶은 우리 아이들과 달리 전 세계에서 온 커플들은 조금이라도 더 나은 곳에 자리를 잡고 조금이라도 더 나은 사진을 찍고자 아찔해 보이는 곳도 서슴지 않고 올라가 사진을 찍는다. 결국 여행에 남는 건 사진밖에 없다니까 저렇게라도 무언가 흔적을 남기고자 애쓰는 사람들을 보며 나도 내키지 않아 하는 딸내미를 핸드폰 사진기 앞으로 밀어 넣어본다. "웃어봐~"하고 여러 번 외쳤지만 결국 웃는 사진은 남지 않았고 아들은 그 마저도 안 하고 멀찌감치 도망쳐 버렸다.
이곳의 겨울은 내가 기존에 알던 그것보다 더 춥고 더 칠흑같이 어두웠기에 5시가 넘으면 급격히 어두워지는 길을 뚫고 라스베이거스로 돌아가는 게 너무나도 걱정스러웠다. 하지만 라스베이거스에 숙소를 예약해 놓았기에 절약정신이 투 절한 남편이 절대 그걸 포기하고 이 근처에서 하룻밤 자는 일은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웬일인지 남편은 돌아가는 길목에 있는 유타의 작은 도시에 여관을 하룻밤 예약했다.
좋지 않은 곳이면 어떠리.. 뜨끈한 물로 샤워하고 나니 몸이 날아갈 듯 상쾌해졌다. 핸드폰으로 무언가 열심히 정보를 찾아내던 남편이 해맑은 표정으로 말한다. "여기에서 브라이스 캐년과 자이언캐년 국립공원이 정말 가까워. 온 김에 다 보고 가자."
라스베이거스에 온다길래 내 머릿속에 가득 찼던 화려한 호텔, 쇼, 맛있는 음식.. 그리고 재미난 쇼핑들 모두 안녕. 라스베이거스에 간다고했더니 향략의 도시에서 맘껏 즐기고 오라고 했던 한 미국인 친구의 이야기가 생각나며 웃음이 났다. 향락은 무슨...완전 건전 여행 그 자체구만. 말은 이렇게 해도 이 작은 마을을 감싸고 있는 대산맥의 웅장함에 가슴이 설레며 어서 아침을 맞아 저 드넓은 캐년속으로 달려 가고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