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 고흐도 아이패드를 좋아했을 겁니다.
그는 거기에 편지도 쓸 수 있었을 겁니다.”
나는 거의 모든 그림을 아이패드로 그린다. 연필, 색연필, 수채화나 마카, 과슈, 아크릴 등등 다른 재료도 늘 준비되어있지만, 항상 꺼내 쓰는 것은 아이패드다. 아이패드가 없었다면 과연 내가 계속 그림을 그릴 수 있었을까 싶다. 처음 아이패드를 사고 그림을 그렸던 그 순간이 여전히 생생하다. 완전히 다른 과정과 방법으로 그림을 그리게 하는 새로운 세계에 들어온 듯했다. 그림을 그리기 위해 준비하는 과정과 재료를 선택하는 것부터, 그리고 싶은 마음이 드는 시간까지 완전히 다 달라졌기 때문이다.
“반 고흐도 아이패드를 좋아했을 겁니다. 그는 거기에 편지도 쓸 수 있었을 겁니다.”
데이비드 호크니도 극찬한 아이패드 드로잉, 그는 아이패드의 참신함이 즉흥성이라고 말한다.
물감과 붓, 물통을 꺼내지 않아도 아이패드 펜슬 하나면 온갖 종류의 붓과 컬러를 만들 수 있고, 실수해도 다시 그릴 수 있다. 좀 더 과감하게 이것저것 시도해볼 수 있게 만든다는 것이다. 레이어 기능 하나만 봐도, 실제로는 그렇게 그릴 수 없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가능하다고 해도 이렇게 쉽고 간단하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가장 혁신적인 것은 바로 드로잉을 발송하는 방식이다. 에어드롭으로 휴대폰으로 바로 전달하거나, 원작을 메일로 바로 전송할 수 있다는 것은 완전히 다른 방식인 것이다.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좋아하는 노래를 듣는 것, 피아노를 치는 것, 읽고 싶던 재밌는 책을 읽는 것, 식물을 키우는 것처럼 기분이 좋아지는 시간을 만들어준다. 좋아하는 한 가지에 집중하다 보면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고 붕붕 들떠있던 머릿속이 차분해진다. 이렇게 나의 기분을 바꿔주는 무언가를 하나씩 수집하다 보면 오늘 하루도 무사히 잘 보낸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기분을 좋아지게 하는 것은 정말로 쉽지 않은 일이다.
그림을 계속 그리다 보면 잘 안 그려지는 순간도 온다. 정확히 말하자면 무언가 ‘그리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다’는 말이다. 글 쓰는 것과 똑같다. 뭔가 쓰고 싶은 동기가 찌릿하게 오지 않으면 몇 시간을 앉아있어도 아무것도 쓸 수가 없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아마 대부분의 작가들도 그럴 것이고,
그림을 그릴 때 가장 오래 걸리고 어려운 것이 바로 ‘그려야 할 순간을 찾는 일’ 일 것이다.
그리고 싶은 마음이 드는 어떤 순간이 있다.
길거리를 지나가다 문득 포크레인이 눈에 들어오기도 하고
이케아에서 눈길이 갔던 순간,
여행에서 찍은 찰나의 순간도.
그래서 나는 주변에 눈에 보이는 것들을 주로 그린다. 집에 있는 식물들을 그리거나, 여행 가서 찍어둔 사진을 보고 그리거나, 길거리를 지나가다 본 것들을 그린다. 아무래도 그게 가장 쉽고, 더 자세히 관찰하기가 좋기 때문이다.
관찰하는 눈을 갖고 있으면, 그림을 그릴 수가 있다.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이렇게 저렇게 설명해도 데이비드 호크니가 책 <다시, 그림이다>에서 한 말을 따라갈 수가 없어서 문장을 통째로 빌려왔다.
"우리가 처음 여기에 왔을 때,
내 눈에는 산울타리가 그저
뒤죽박죽으로 뒤섞인 것으로만 보였습니다.
그 후에 나는 콘서티나처럼 펼쳐지는
작은 일본산 스케치북에
그 울타리를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다양한 종류의 풀들을 그렸습니다.
그 스케치북을
한 시간 반 만에 다 채웠습니다.
그 후에 울타리를 보다
분명하게 볼 수 있었습니다.
그림으로 그리고 나서야
그 풀들을 보기 시작했던 겁니다.
만약 그 풀을 사진으로만 찍는다면,
당신은 드로잉 할 때만큼
풀을 유심히 보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당신에게 그다지 영향을 미치지도 않을 겁니다."
- 마틴 게이퍼드 <다시, 그림이다>, 디자인하우스, 2012
글도 잘 쓰려고 하면 잘 안 써지던데. 그림도 잘 그리려고 하면 잘 안 그려진다. 내가 딱 그렇게 아무것도 못하고 있을 때, ‘그게 무슨 말이야 방구야’하는 표정으로 나에게 짜릿한 영감을 주는 밝은 기운의 사람이 있다. 하나뿐인 나의 8살 조카다.
조카에게 그림 좀 그려달라고 하면 거침없이 쓱쓱 다 그려준다.
그 주저 없는 당당한 손끝에 감동한다.
실제로 조카와 그림을 그리다가 제법 맘에 드는 그림을 그리게 된 게 한두 번이 아니다. 주저 없이 일단 막 그리다 보면 예상하지 못한 좋은 느낌이 툭 튀어나오는 것 같을 때가 있다. 다시 똑같이 그리라고 하면 못 그리는.
데이비드 호크니도 드로잉을 가르치는 것은 보는 법을 가르치는 것이라고 했다.
아이패드로 그리든, 색연필로 그리든.
일러스트레이터 김파카 인스타그램 @kimpaca
글을 쓰고 생각을 담은 글쓰기 모임,
'쓰담' 멤버로 함께 글을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