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단편소설>睡隱 姜沆先生과 李氏夫人이야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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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睡隱 姜沆先生과 李氏夫人 이야기
<睡隱 姜沆선생의 어린 시절을 토대로 構成하였고 논―픽션 (nonfiction)을 픽션(소설)으로 일부를 가공해 선생의 발자취 중에 가장 인간적이고 愛國愛族했던 마음을 善男善女로 쉽게 나타내 누구나가 이해할 수 있도록 현실 이야기식으로 풀어 재구성했음을 미리 알려 드린다!!>
지금으로부터 450여 년 전 전남 영광 한 마을에 神童(신동)으로 불리우는 천재소년이 살고 있었다.
睡隱 姜沆은
齟齬堂 瀣(맏형)로부터 3세에 글과 문장을 배우고 익혔으며
이미 5세에 ‘脚到萬里 心敎脚’(다리로 만 리를 가지만 그렇게 하도록 시키는 것은 마음이다) 이라는 七文字詩 名詩를 지어 주위를 놀라게 하였다.
수은 강항은 실로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누구도 함부로 범접犯接할 수 없는 경지에 이미 도달해 있었고, 학문의 깊이가 놀라울 정도로 높아 이 조그마한 고을뿐아니라 神童으로 입소문을 타고 당시 長安(장안)까지 소문이 번지고 있었다.
睡隱 姜沆선생이 7세 때의 일이다.
제법 학식이 높은 한 책장수가 영광 불갑면 안맹마을(현재 불갑면 안맹리) 근처를 지나가던 중이었다. 이때 책장수에게 반갑게 소년 강항이 다가와 書冊 목록을 살펴보고서는 孟子 한 질을 달라고 거침없이 요구하였다.
책장수는 이 마을에 들어서자마자 어린아이가 느닷없이 다가 와 맹자 한 질을 달라고 하자 책장수는 한 동안 어이없다는 듯 바라보다가 장난삼아 넌지시 건네주며 골려줄 생각에 골똘했다. 이런 책장수의 行動擧止(행동거지)에 아랑곳하지 않고 어린 소년 강항은 맹자 한 질을 첫 장부터 의젓하게 읽어 내려가고 있었다.
책장수는 어린아이가 너무도 의젖하게 자리를 잡고 앉아 마치 삼매경에 빠져드는 듯 孟子(맹자)를 들여다보고 있으니 기가 막힐 뿐 아니라 하도 어이가 없어 꾀를 내 골려줄 생각으로 마침내 내기를 걸기로 작심을 하고 말을 걸었다.
“네가 ‘맹자’를 읽고 있는 모습이 제법이구나. 네가 孟子(맹자)를 처음부터 끝까지 한 글자도 틀리지 않고 암송을 한다면 이 책(맹자 한 질)을 모두 너에게 주겠다” 고 눈을 내려 깔며 비웃음을 감추지 않은 체 능글거리며 거침없이 말하였다.
(당시에 맹자 책 한 질의 값은 부르는게 가격이었으니 적당히 산출한다해도 당시 쌀 서너가마니 가격을 넘나들었을게다.)
그러나 소년 강항은 책장수의 孟子(맹자) 1질을 걸고 내기하자는 말에는 아랑곳하지도 않고 조금도 흔들림 없이 계속 孟子(맹자)讀書三昧(독서삼매) 경에 빠져 孟子(맹자) 책에서 손을 떼지 못 하고 끝부분까지 읽어 내려가고 있을 뿐이었다.
어느덧 시간이 흘러 주변은 서서히 땅거미가 깔려가고 있었지만 책장수는 연신 하품만 하며 미덥지는 않지만 그래도 한 번 약속을 했기에 孟子(맹자) 讀書三昧(독서삼매)에 빠져 책만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그런 어린아이의 모습을 머쓱하게 옆에서 지켜만 보고 있을 뿐이었다.
바로 그때였다.
언제 孟子(맹자)를 봤냐는 듯 천진난만하고 밝은 표정으로 소년 강항은 “이젠 됐어요!! 아저씨, 책을 읽게 해주셔서 참으로 고맙습니다!!”라고 말하고는 툭툭 옷을 털고 아무런 일이 없었다는듯 자리에서 일어나 가려고 하자 책장수는 속으로 ‘네가 그러면 그렇지’ 하면서 限量(한량)없이 시간을 낭비한 것도 아이에게 모두 찾으려는듯 준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나하고 내기를 했잖느냐!! 왜 이제 와서 자신이 없는 것이냐?”며 詰責(힐책) 하였다.
이내 어린 강항은 생뚱맞은 표정을 지으며 책장수에게 “무슨 말씀이세요? 저는 방금 책을 읽게 해주셔서 '고맙다'고 말씀까지 드렸는데...”
거듭 책장수는 “옳거니!!” 하며 내심 快哉(쾌재)를 부르고 있었다.
“아니 내가 너에게 孟子(맹자)한 질을 다 읽을 수 있도록 허락해 준 건 맹자 한 질에 대해 한 자도 틀리지 않고 暗誦(암송)을 하면 이 아저씨가 너에게 이 맹자책 한 질을 다 주겠노라고 말하며 처음부터 내기를 했잖느냐? 그런데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겁이나고 자신이 없는 것이냐?”며 책장수는 능글거리며 말했다.
소년 강항은 그때서야 생각이 났다는 듯 씩 웃으며 아무 일 없었다는 표정으로 방금까지 들여다 본 孟子(맹자)를 처음부터 끝까지 한 번도 막힘 없이 술술 암송해 내려가고 있었다.
책장수는 첫 장을 넘기기가 무섭게 그 다음 장을 펼쳐보면서 소년 강항이 암송하는 대로 따라 연신 책장을 넘기기에 바빴다. 그러다가 언제 끝난 지도 모르게 孟子(맹자) 끝부분을 읽어 내려가는 그런 강항을 보며 책장수는 깜짝 놀라 기겁을 하며 한동안 멍하니 강항을 쳐다만 보고 있었다.
소년 강항은 아무 일없었다는 듯 다시 툭툭 자리를 털고 일어나더니 책장수에게 거듭 정중히 인사를 하며 “아저씨!! 정말 고맙습니다. 언젠가 아저씨가 우리 마을에 오시게 될 것을 손꼽아 기다렸지요. 우리 마을에 오시면 제가 그토록 보고 싶었던 孟子(맹자)한 질을 모두 보고 싶었어요. 다행히 오늘 우리 마을에 오셔서 孟子(맹자) 한 질 전체를 다 보여줘서 정말 고맙습니다. 그리고 이미 孟子(맹자)책 내용은 내 머리 속에 다 들어 있으니 그 맹자 책은 이젠 저에게는 필요가 없지요. 저는 괜찮으니 더 이상 시간낭비하지 마시고 다른 마을로 속히 옮겨가셔서 마저 많이 파십시오.”라며 소년 강항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쏜살같이 집으로 돌아가 버렸다.
한동안 그 자리에 멍하니 서있던 책장수는 어린 아이를 골려줄 생각으로 비록 내기를 홀로 했지만 어른으로서 곰곰히 생각해 볼수록 아무렇지않게 그냥 지나쳐 갈 수 없었다.
결국은 값 비싼 孟子(맹자)책 한 질 통째로 내기를 한 그 불갑면 유봉마을 亭子(정자)에 孟子(맹자) 한 질을 매달아 놓고 갈 수 밖에 없었다.
책장수는 다른 마을로 분주히 발걸음을 재촉하면서도 혼잣말로 “장안의 소문에 의하면 호남지역에 神童이 있다더니 이곳에서 내가 천재소년을 드디어 만나게 된 거야!!” 하면서 호탕하게 웃으며 이 마을을 지나갔다.
훗날 그곳에 동네사람들이 孟子(맹자) 한 질을 걸어 논 亭子를 일컬어 孟子亭이라 이름 지으니 지금도 여러 사람들에게 膾炙되는 孟子亭이 姜沆先生의 고향마을인 영광군 불갑면 소재지에 전설처럼 남아있는 契機(계기)가 마련되었다.
(이런 사연으로 전설처럼 전해 내려와 맹자정 기적비가 영광군 불갑면사무소 근처에 세워져 있다)
이러하듯 어린 강항은 벌써 학문의 깊이가 他意(타의) 推定(추정)을 불허하듯 이미 높은 경지에 올라와 있었다. 睡隱 姜沆이 7~8세 무렵 염산 논잠포구에서 배편(당시에는 바닷길이 실크로드였으며 지금의 고속도로 수준)으로 아주 가까운 고창 구암마을(고창군 아산면 구암포구)에 학문의 精神的 스승인 죽곡 이장영 선생(62세에 광주목사를 지냈으며 강항의 47세 연장자로 나중에 丈人어른이 된다)을 자주 찾았고 10세 무렵까지 구암마을의 이웃 마을인 칠암 마을(고창군 공음면 칠암포구)을 이웃하는 동네로 자주 놀러가 배움의 깊이를 더해 갔다.
강항姜沆은 이때 함평 이씨 죽곡 이장영선생의 막내딸(애생이 엄마)과 자연스럽게 한 마을에서 소꿉동무로 자주 어울러 놀았다.
<특히 5형제 중 막내인 시시당 강영은 바로 손위 형인 수은 강항과 일가족이 모두 포로로 붙잡혀 일본으로 끌려갈 때 身邊(신변)을 정리해 天然(천연)要塞(요새)인 이곳 구암마을로 일가친척들의 권유로 선대를 잇기 위해 정착했으며 이후 말년까지 왜적으로부터 전혀 노출이 되지 않는 천혜적인 요소를 갖춘 구암포구에서 一平生(일평생)을 마감했다. 시시당 강영은 어린 시절부터 친형인 수은 강항에게 엄하게 글을 배우고 나중에는 朝廷(조정)에는 나가지 않았으나 향후 進士(진사)까지 올라 도도히 흐르는 학문적 인맥도 이 지역에서 형성하게 된다.>
소년 강항姜沆은 이처럼 포구가 있는 구암마을에서 옛날이나 지금이나 농촌의 또래아이들이 그렇게 뛰어 놀았던 것처럼 자연스레 동갑내기 아이들끼리 모여 서당에서 공부도 하고 자연을 벗삼아 공부를 마치고 나면 자연히 한가로운 시간을 가까운 시냇가에서 보냈고 시냇물이 흐르는 넓다란 마을의 앞들판과 뒷동산을 찾아 항상 함께 어울려 놀았다.
이처럼 개울가, 바닷가, 마을 동산과 들판은 강항에게는 자연스러운 놀이공간으로 충분했고 주변에 그럴싸한 놀잇감이 없어도 구암마을 앞 개울가에는 맑은 물이 쉼 없이 흐르고 있었기에 강항의 이곳에서의 생활은 정서적으로도 막힘이 없었다.
마을 개울가에 한없이 깔린 다슬기를 줍기도 하고 싫증이 나면 이름모를 송사리, 피라미 등 고기를 잡는 재미에 빠져 들었고 때론 멱과 머리를 감으며 물장구 치고 뒷동산에서 진달래도 따며 시간가는 줄 모르게 어린시절을 행복하게 보낸 그런 마을이었다.
구암마을의 산과 들에는 풍요로움으로 항상 가득했다. 머루와 다래를 따먹기도 하고 들꽃을 쳐다보면서도 저도 모르게 나오는 웃음에 한없이 마냥 신나게 幼年期(유년기)를 보내고 놀았던 곳이기도 했다
더 신기한 것은 소년강항이 유년시절을 보낸 구암마을은 아주 오랜 옛날부터 특이한 바위가 많기로도 유명했다. 말안장을 닮은 안장바위며 선녀바위 솟대바위, 마당바위, 너른바위, 소반바위, 사자바위, 병풍바위, 탕건바위, 할미바위, 선바위 등등...
유명바위가 10개가 넘는 아주 특이하고 요새같은 마을로 알려져 있어 당시 왜놈들은 이곳을 아예 발길조차 옮기지도 못했다
고 전한다.
그중에서도 특히 인물형상을 가진 큰 바위는 소년 강항에게 큰 꿈을 원대하게 가지도록 많은 영향을 미쳤다해도 지나침이 없을 것이다. 사람은 성장해 갈수록 인성을 갖춰야하고 그 人性(인성)을 陶冶(도야)하는 선비정신을 가져야 하며 높은 벼슬아치보다는 선비정신으로 살아야한다’는 정신으로 참다운 스승들을 찾아가며 조선의 선비로서 유교사상의 큰 틀을 정립하고자하는 기초를 당시대의 선비들은 품고 있었다.
그런 시대정신속에서 소년 강항의 마음을 지켜 준 구암마을의 큰 바위는 요즘말로 하면 미국의 '큰바위 얼굴”과 비교할만한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감히 언급해 말할 수 있을 게다.
이쯤해서 미국의 큰 바위얼굴을 말하자면 고작 200여년의 역사를 떠 올리며 미국 대통령 네 명의 얼굴 조각상과 세계명작 단편소설이 떠오르겠지만 수 천만 년전 부터 고창의 구암포구로 유명한 구암마을에는 여기에 비교도 안 될 만한 크기의 큰 바위가 항상 우뚝 서 있었다.
당시 널따란 바위 옆에 꼿꼿이 서있는 바위를 바라보며 강항은 꿈을 키워가며 많은 선인과 위인들을 떠올리며 여러 생각에 골똘하기도 했다.
‘내가 왜 존재하는가?’
‘나는 누구인가?’
'어떠한 삶을 살아 가야 하는 것인가?'
太古(태고)전부터 고창 선운산 부근에는 기암괴석이 많았다.
그 이유를 잠깐 살펴보자면 아주 오랜 기록서에 8,000만 년전 이곳 선운산 부근에서 큰 화산활동이 있었던 것으로 증명되고 있다. 그 결과 이 근처에 奇奇妙妙(기기묘묘)한 奇巖怪石(기암괴석)이 솟아올랐던 것이다. 이러한 과정 중 하나로 큰 바위 얼굴형상의 바위도 탄생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각자가 보는 방향에 따라 술병을 거꾸로 세운 모습이다 하여 병 바위라고 부르기도 했지만 가까이 다가서보면 무서울 정도로 각자가 품고 있는 偉人(위인)을 닮은 모습이라서 강항은 이곳의 큰 바위얼굴을 보며 수많은 위인들의 얼굴을 떠 올리며 장차 참다운 선비로서 더 크고 원대한 꿈을 품었다.
一說(일설)에 의하면 구암마을의 큰 바위들의 생김생김이 너무도 기묘한지라 傳說(전설)도 現實(현실)에 딱 들어맞게도 이어져 전해 내려온다.
쉬어가면서 전설을 품고가본다!!
아주 오랜 옛날 옛적에 저 큰 바위 얼굴 뒤쪽 차일봉에서 큰 잔치가 열렸는데 저 건너편 仙人峰(선인봉)에 사는 神仙(신선)이 VVIP로 초대받았다는 거다. 仙人峰(선인봉)에 사는 神仙(신선)이 잔치에 초대받고 와 飮酒歌舞(음주가무)에 거나하게 취해 산위에서 잠깐 선잠이 들었다.
술에 취한 神仙(신선)이 잠결에 잠꼬대를 하다가 옆에 있는 술상을 걷어차게 되었는데 그 술상과 술병이 날아가서 제각각 떨어지면서 술병은 거꾸로 서고 말았고, 술상은 그 옆에 반듯하게 떨어져 술병은 병 바위(큰바위의 다른 명칭)가 되고 술상은 소반 바위가 되었다고 전해 내려온다.
더 나아가 병 바위는 병호(壺) 바위암(岩)을 써서 호암(壺岩)바위라고 전해 내려오고. 소반바위는 소반반(盤) 바위암(岩)을 써서 반암(盤岩)바위가 되었다고 好事家(호사가)들은 말한다. 그래서 그런지 아주 오래전부터 이 근처의 마을 이름이 호암마을과 반암마을로 불리우고 있다.
그런데 더 놀라지 마시라!!
고작 18m 정도 밖에 안 되는 미국의 큰 바위 얼굴보다 이 큰 바위얼굴은 높이가 35m로 거의 두 배차이가 나는 바위로 예전이나 지금이나 이 큰 바위는 바라보고 꿈을 갖는 소년들에게 큰 꿈과 희망을 이루어 줄 수 있는 그야말로 세계적인 큰 바위얼굴인 것이다.
두 번째로, 미국의 큰 바위얼굴은 人爲的(인위적)으로 조각한 것이라는 반면에 고창의 큰 바위얼굴은 지구의 활동으로 화산현상에 의해 천연적으로 빚은 唯一無二(유일무이)한 세계에서 하나 뿐인 큰 바위얼굴인 것이다.
이러하듯, 어린 시절을 이 지역에서 지낸 소년 강항은 큰 바위얼굴에 의해 꿈을 가꾸며 큰 바위를 바라보며 자신도 모르게 숭배하고 굳은 맹세를 다짐하기도 하였다.
단지 소년 강항의 이러한 어린 시절의 추억만 아니라 고창군 구암마을의 큰 바위 얼굴에는 전설이 숨어서 이를 증명이나 하듯 口傳(구전)으로 도도히 전해 내려오고 있었다.
구전도 그럴듯하다!!
이 마을 근처에는 언젠가 저 큰 바위얼굴을 닮은 훌륭한 인물이 나온다는 전설이 바로 그 것이다. 저 큰 바위가 그 훌륭한 인물(도령)이 나타나면 그 인물(도령)과 함께 큰 바위가 가장 먼저 서해로 이어진 뱃길을 없애고 평화로운 마을로 바뀌게 하고 그 인물(도령)로 하여금 太平天下(태평천하)를 디자인한다는 전설이다.
저 큰 바위 얼굴, 그 앞에 흐르는 인천강, 그리고 풍천장어, 연이어 펼쳐진 논과 밭, 주변의 형형색색의 계곡을 둘러싼 산과 숲은 이곳이 인심 좋고 물 좋고 산 좋은 살기 좋은 마을로 백성들은 이 자연 속에서 자연의 혜택을 받으며 살고 있었다. 강항은 이러한 구암포구의 구암마을에서 큰 바위를 보며 꿈을 키우고 또 키웠던 것이다.
姜沆이 8세 때인 1574년 어느 날 이미 주변 마을에 神童으로 파다하게 알려진 이후 구암마을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칠암마을(고창군 공음면 칠암마을)에 들렀을 때 일이다.
마을 儒林(유림)들이 강항이 神童(신동)이라 소문이 자자했던 터라 따로 불러 동네 어른들과 유학자들이 그를 상대로 시험해보기로 했다. 이 마을 儒林(유림)들은 송나라 朱子가 어렵게 중국역사서를 執筆했다고 소문난 中國古書 ‘通鑑綱目’을 건네주며 한번 읽어 보라고 권했다.
姜沆은 中國古書 ‘通鑑綱目’을 들자마자 막힘이 없이 줄줄 읽어가면서도 ‘通鑑綱目’을 다 읽어 내려갈 때까지 손에서 결코 책을 놓지 않았다. 그는 밤을 하얗게 새워 ‘綱目(강목)’을 읽고 또 읽어서 그 다음날에 동네어른과 儒林(유림)들 앞에서 줄줄 외우니 칠암 마을 온 동네가 발칵 뒤집어질 정도로 讚辭가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드디어 유학자중 한 원로가 나서서 오늘 우리 칠암 마을에서 천재소년 神童(신동)을 맞이하게 되었으니 이 마을의 경사입니다!! 그리하여 이 일곱 봉우리의 칠암 마을을 앞으로는 ‘강목촌’이라 命名(명명)했으면 하오!! 라고 말하자 모두가 異口同聲(이구동성)으로 찬성을 하며 이 칠암 마을을 ‘綱目(강목)촌’이라 불리게 되었다. (현재도 전북 아산면 칠암리가 현재까지 전설로 ‘강목촌’으로 남아있다)
또, 그는 9세에 인간의 도리를 말하면서 幼成若天性賦(유성약천성부)를 지어 주위를 놀라게 하였다.
이는 어릴 적 마음이 成人이 되어서도 변함없이 갖춰야 하며 이어져야 한다는 世間의 발표에 그 당시 선비들은 神童의 말에 謙虛함을 갖추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姜沆과 이씨 소녀와의 어린 시절의 만남은 채 2년도 되지 않은 짧은 만남이었다. 그러나 너무도 애틋했던 소꿉놀이 친구인 어린 소년(강항)과 소녀(이씨 부인)의 만남은 훗날 결코 우연만은 아니었으니 이 얼마나 놀라운 因緣(인연)이던가?!
그 다음해인 1575년에 강항은 엄격한 家風(가풍)과 선비로서의 갈 길이 정해져 있었던 터라 고향인 영광 불갑 유봉마을로 다시 돌아왔다. 그는 영광 옥당골 너머 무장현 구암 마을에서 고향으로 돌아와 학문에만 전념해 드디어 16세에 鄕試(향시)에 합격하는 영광을 얻게 된다.
하지만 그가 고향에 내려와 16세에 향시에 합격한 기쁨만 있었던 건 아니다. 고향에 내려온 지 얼마 안 되어 14세 어린 나이에 김씨 어머니가 돌아가시게 된다. 姜沆은 처음으로 가장 가까운 어머니로부터 죽음을 목격하게 되었고 인생의 허무함을 처음 당하는 단계에 孝心(효심)은 남달랐다. 3년간 侍墓살이를 자처하고 나섰다.
이토록 그는 죽음을 넘어 효의 사상에 입각하여 孝心(효심)과 애틋한 어머니를 향한 사랑을 가슴에 품고 일평생을 살았던 것이다.
이후 姜沆은 1588년 진사가 되었고, 1593년 27세에 문과에 급제, 이듬해 봄에 校書館(교서관) 正子(정자)가 되었다. 29세에 박사에 올랐고, 30세(1596) 봄에 성균관 전적, 가을에 공조좌랑, 겨울에 형조좌랑이 되었다.
睡隱 姜沆은 22세에 진사가 되어 마침내 晋州 金氏와 결혼을 하였고, 안정된 가정에서 이미 과거에 합격한 맏형인 齟齬堂 瀣와 둘째 형인 濬에 이어 과거시험을 준비하게 되었던 것이다.
27세(1593년)에 壬辰倭亂의 전시상황 속에서 이 당시 선조는 조정을 전주에는 광해군과 두 갈래로 나누어 管理를 하도록 命하였다. 이러한 체재 속에서 경기 이남은 광해군 체재에 속해 있었기에 그는 과거시험(별시문과 병과)을 치루기 위해 전주로 올라가 하룻밤을 客主집에 묵게 된다.
그런데 이게 무슨 기구한 운명의 만남이던가?
강항은 뜻하지 않게 소꿉동무인 이씨 소녀를 운명처럼 이곳 客主집에서 다시 마주치게 된 것이다. 이씨 소녀(죽곡선생의 소실의 막내딸)는 瓜年(과년)해 구암마을인 고향을 떠나와 이곳에 이미 수년 전에 올라 와 먼 친척인 客主를 도와주며 장사를 배우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미 결혼한 그는 단호하게 이씨 소녀를 짐짓 모르는 척하고 오로지 과거시험에만 전념 하여 別試文科와 兵科에 합격하고 냉정하게 이씨 소녀의 눈을 피해 곧장 고향인 영광으로 내려오고 만다.
강항이 언제 어떻게 내려간 영문도 모른 체 며칠 동안을 뜬 눈으로 빔을 지낸 당시 이씨 소녀의 생각은 남달랐다.
어릴 적 함께 거침없이 온 동네를 내 집삼아 뛰어 놀았던 하나밖에 없는 寤寐不忘 꿈속에서 그리던 情人이었으며 이미 그 시절 天才少年 강항으로 기억하고 있었던 이씨 소녀는 어릴 적 추억이 주마등처럼 스치며 지나가 밤낮으로 그를 잊을 수 없었다.
이씨 소녀는 그동안 一片丹心의 마음으로 강항에 대한 그리움에 휩싸인 채 살아가다가 이처럼 낯선 타관 땅에서 다시 再會를 하고보니 ‘이게 내 運命이구나’라고 다짐을 하며 생각에 골똘했다.
이씨 소녀는 어린 시절 기억을 回想하면서 오로지 강항만을 생각하며 이틀 낮밤을 쉬지 않고 그의 고향을 물어물어 영광군 불갑면 유봉마을을 찾아내려갔던 것이다.
이미 진주김씨 부인과 결혼한 姜沆의 단호하고도 엄격한 外面속에 이씨 소녀는 수일동안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그에게만 품은 애틋한 사랑을 몸과 마음으로 향해 갔다.
“이러다가 한 處子를 우리 마을에서 굶주림에 橫死시킬 수 있지 않겠는가?”
마침내 주변 마을 집안어른들이 門中會議를 열어 ‘士大夫 가문에서는 妻妾을 두는 것은 큰 허물이 되지 않는다’는 결론을 도출해 내 이들의 사랑을 許諾받아서 두 번째로 이씨 부인을 맞이하게 된다.
김씨 부인으로부터 자식을 보지 못한 강항은 이씨 부인을 맞이하고서야 처음으로 딸 애생(愛生)이가 태어나 또 다른 인생의 즐거움과 기쁨을 맛보게 된다.
이씨 부인과의 사이에는 딸 애생이에 그치지 않고 姜沆은 30세(당시에는 30세 이후에 아이를 낳는 경우가 드물었음)에 이르러서야 꿈속에 바다 속 海龍(해룡)이 가슴으로 품고 들어온 胎夢(태몽)에 의해 다시 이씨 부인 슬하에서 귀한 아들이 생겼고 태몽과 같이 아이 이름을 龍이라 불리게 된다.
그 아들 龍과 애생이에 대해 얼마나 사랑이 깊었는지 정유재란丁酉再亂이 발발하고 포로로 끌려가던 당시 31세에 영광 논잠포 앞바다에서 아들 龍과 귀염둥이 딸 애생이를 잃고 痛恨속에서 쓴 詩에서 처절하고도 비통한 睡隱 姜沆의 節制된 아픔과 슬픔이 날카로운 송곳으로 가슴을 찌르듯 아픔이 배어나고 있다.
아이야!! 아비를 잊지 말라
兒兮莫望父
“무고한 너를 죽게 만든 것이 오직 나의 죄라!!
致汝無辜惟我罪
평생(백년)토록 부끄럽고 원통해서 통한의 눈물만 마구 흐른다.”
百年慙痛淚闌于
강항과 이씨 부인과도 역시 모진 인연이 丁酉再亂 당시에도 계속 이어진다.
본부인 김씨부인과 부친, 장인과 피난을 나선 강항은 이씨부인을 챙길 여유 없어 피란길에서 姜沆과 논잠포 앞바다에서 生離別을 했기에 서로가 지금까지 生死를 까맣게 모르고 있었으며 부녀자인 이씨 부인은 더 더욱 왜놈들의 전쟁 난리 통에 강항의 食率로부터 떨어져 저쪽 건너편 배에 타고 있었던 것이다.
강항은 왜군들에 의해 늦둥이 용이의 죽음을 목격하며 피눈물을 삼키고 함께 글려 온 가족들은 갖은 수모를 당하면서 포로로 바다 한 가운데서 이름 모를 왜선(倭船)에서 일주일여가 지나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순천앞바다에서 애생이 엄마(이씨 부인)의 외침을 저 건너편 배편에서 차음 듣게 된 것이다.
이날 이씨 부인의 흐느낌과 외침은 처절하지 못해 듣는 이로 하여금 애간장을 타게 하는 처절한 절규의 외침이었다.
아니 냉기로 가득한 남해바다를 온통 한으로 적시며 그 통곡소리가 끊어질 듯 이어지고 이어질 듯 끊어지며 애처롭고 처절하고도 가냘프게 바람에 뭍어 들려오고 있었다.
“영광사람 어디에 없소?!”
이 絶叫속에 품은 속마음은 얼마나 님을 그리는 그녀의 마음이 얼마나 컸는가를 갸름해 볼 수 있고 영광사람을 찾아 그와 아들과 딸인 용이와 애생이의 생사소식을 듣고 싶어 그랬으랴 싶다!!
순천앞바다에 끌려 오기전 睡隱 姜沆은 1597년 정유년초에 공조, 형조좌랑으로 승진을 거듭해 그해 봄에 휴가를 얻어 고향 유봉마을에 와 있었다.
그러던 그해 1597년 8월에 정유재란이 터지자 分戶曹(분호조) 참판이 되어 전라도 군량미 수송책임을 지게 되었던 것이다. 갈수록 戰勢(전세)가 불리해져오고 7월에 한산 섬의 관문이 무너지고 8월에 호남의 중심인 남원이 힘없이 함락당하자 수성을 했던 관리들은 도망가기에 급급해지자 강항은 어쩔 수없이 고향인 영광으로 다시 되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고향에 돌아온 그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분연히 일어나 고향 영광향교에서 수성을 결의하고 의병을 모집하여 싸우다 전세가 불리해지자 식솔들과 의논을 마친 후 이순신의 휘하에 들어가기 위해 배편으로 南行을 감행했으나 뱃사공인 사내종놈의 變心으로 도중에 왜적의 포로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이처럼 강항이 포로로 붙잡혀 순천 앞바다 倭船에서 외로이 食率들과 신세 恨歎을 하고 있을 때 건너편배에서 한 여인의 처절한 목소리가 거듭 거듭 들려오고 있었다.
“여보시오!! 영광사람 어디 없소!!!”
건너편 배에서 들려오는 짧은 외마디 소리에 건너편 배에서 그와 함께 있던 둘째 형수가 깜짝 놀라며 姜沆에게 다급하게 다가와 귓속말로 전한 것이다..
“서방님! 저기 저사람!! 애생이 엄마가 분명하오!!!” 연신 건너편 배에서 스러질 듯 들려오면서도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는 애생이 엄마(이씨 부인)의 애간장을 끓이는 소리는 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단발마적인 외침으로 넓고도 넓은 공허한 바다에서 메아리만 귓전에 맴돌고 있었다.
포로이면서도 무지막지한 왜선에서 그렇게 야무지게 대항했던 애생이 엄마(이씨 부인)는 애석하게도 그 다음날까지 食飮(식음)을 전폐하고 왜놈들에게 당당하게 아우성으로 맞서다가 결국은 왜놈들에게 뭇매를 견디지 못하고 죽임을 당하고 만다.
姜沆은 이를 七言詩(칠언시)로 부부의 서러운 이별과 처절한 슬픔을 피눈물로 섞어 노래한다.
相思恨(상사한)
滄海茫茫月欲沈
푸른 바다 아득히 멀리서 달이 지려는데,
淚和涼露濕罹襟
이내 눈물이 차디찬 이슬로 변하여 내 옷깃 젖시네.
盈盈一水相思恨
그렁그렁한 눈물이 한줄기 흐르는건 님을 그리워하는 恨(한)이니,
牛女應知此夜心
우리 둘(牛女)이 오늘밤 이 아픈 마음을 그대만은 알리라.
이러한 아픔을 뒤로 하고 일본으로 생 포로로 끌려간 睡隱 姜沆은 愛國愛族하는 사상과 선비정신은 그 어떠한 逆境속에서도 이후에도 한 치의 흔들림이 없었다.
조선의 선비믄화는 그야말로 대단했다. 필담筆談을 주고받던 일본의 식자층인 승려 추지와라세이카는 그 자리에서 강항을 스승으로 모시는 큰 절을 올리고 제자로 받아 주기를 간청을 한다, 이는 역사에서는 가정법이 없지만 불을 보듯 뻔한 것은 강항의 적중봉서에 의햐면 이 당시 왜놈들의 99%가 無知랭이 민족이 일본인이다라는 기록이 너무도 선명하게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먼저 삼페인을 터뜨리자면 강항이 31세에 모진 포로생활을 하면서 일본교토 후미성에서 여덟 살이나 더 많은 왜승(倭僧) 후지와라 세이카를 弟子로 받아들이며 日本儒敎의 비조(鼻祖)가 되었던 것이다. 천자문도 제대로 학습이 안 되어 있는 99%의 까막눈들을 위해 후지와라세이카는 가강 막부에게‘데라코야(寺子屋)’설치를 주장하였고 이어 화사상으로 명치유신이 가능해 현재의 선진 일본의 기틀이 되었던 것이다.
이 때 강항은 조선의 선비정신과 朱子學사상으로 조선뿐 아니라 그 주변국 어느 나라에서도 유학자로서 손색이 없는 최고의 경지에 올라와 있었다. 당시 전쟁을 싫어하는 1% 식자층 부류의 승려계급인 후지와라 세이카는 倭僧으로 유학사상에 잔뜩 목말라 있었으며 최고봉에 오른 강항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지금의 경제부국을 말하는 현대 일본은 존재할 수가 없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고 거듭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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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항은 포로의 몸으로도 적국에서 每事에 당당했다.
특히 포로 당시에 풍신수길(도요토미 히데요시)이 별안간 橫死를 하자 그의 무덤 앞에서 당당히 조선국 침탈(侵奪)에 대한 비난의 글을 주저하지 않고 막힘없이 써 내려간 장문의 글은 수은 강항의 대범한 성품을 알려주는 일화(逸話)로 지금까지 전해 내려오고 있다.
왜놈들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죽자 그를 북문 밖에 묻고 그 위에 황금으로 장식한 전각을 짓고 남화라는 승려는 비문에 이렇게 썼다.
대명 일본에는
온 세상 떨친 호걸이 났도다.
태평한 길을 열었으니
그의 덕 바다같이 넓고 산같이 높아라.
이 글을 본 睡隱 姜沆은 격분(激憤)하여 붓으로 죽죽 문질러 버리고 그 옆에 이렇게 썼다.
한 평생 경영한 게 한줌 흙 된다는 말인가
열 층의 황금 전당 부질없이 높았구나!!
탕알 만한 네 땅 지금 타인 손에 들어 갔느니라
(탕알 만한 하찮은 놈)무슨 일로 靑丘(조선)땅에 당돌하게 대들었나!!!
적의 땅 일본에서 그것도 포로의 몸으로 일본의 최고의 실력자인 도요토미 히데요시(풍신수길(豐臣秀吉))를 욕되게 하다니, 보통의 膽力 가지고는 凡人으로는 꿈도 꿀 수 없는 노릇이었다.
포로 姜沆은 비록 갇힌 몸이지만 당당하게 氣槪를 펼쳐 당시 識者층인 일본인들의 간담(肝膽)까지 서늘하게 했다.
그의 저서「看羊錄(간양록)」에서 그의 不撓不屈(불요불굴)의 선비정신을 자세히 살펴볼 수 있다.
익히 삼국시대의 백제인으로 추정되는 왕인이「천자문」과「논어」로 일본유학의 씨를 뿌리고 아스카(飛鳥)문화를 꽃피우게 했다면 睡隱 姜沆은 일본 강호 막부 문화에 주자학을 뿌리내려준 인물로 일본 유교의 비조로 추앙되고 있으며 오=즈시에서는 ‘홍유 강항선생 헌창비’를 세워 매년 추모하고 있으며 초등학교 교과서에서 그를 중요한 인물로 다루고 있다.
그는 일본에 억류되어 있는 동안 일본 성리학의 원조가 되었으며 일본에서 족적을 남기고 일본에서 유명한 일본인 당시 유학자들을 수없이 많이 배출시키기도 하였다.
이렇듯 모든 일본유교의 책자는 조선에서 정치의 근본이 된 주자학을 비롯해 四書五經과 모든 유학서적들은 姜沆선생에 의해 선생이 跋文하여 선생의 머릿속의 학문만을 베껴 쓰고 그가 갖고 있는 지식이 일본의 書冊들로 만들어 졌기에 오로지 그의 머릿속에서 나온 하나의 텍스트임을 일본인들은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지금도 충분히 영악스러운 근대와 현대의 일본학자들은 이후 앞 다퉈 중국현지의 원서(原書)와 검증해 본 결과 강항이 발문한 서책들이 토씨하나 틀리지 않은 문서임을 입증하고 나서야 그의 위대함을 재삼 인정해 앞 다퉈 오-즈시에서 성역화하고 있으며 이러한 정유재란의 폐해(弊害)로 빚어진 왜놈들의 포로생활중의 강항의 가르침이 곧 지금의 일본의 근대사의 指標가 되었고 일본의 진정한 근대사 유교가 되었으며 昨今(작금)의 일본의 實事求是가 되었던 것이다.
이후 일본은 놀랍게도 이를 발전시켜 明治維新과 化사상으로 변화를 꾀해 갔으며 이와 같은 학문의 원동력으로 일본경제가 바로서고 사회질서가 잡혀 지금의 일본이 반듯하게 세워질 수 있었던 것이다.
어디 이뿐이랴!!
강항은 당시 일본 고승들에게 經典을 써주기도 하고 성리학(性理學)정주학<중국 송나라 때의 정호(程顥)·정이(程頤) 및 주희(朱熹) 계통의 유학. 성리학(性理學). 송학(宋學)>을 가르쳐주기도 하는 등 조선유교의 진수를 일본에 전파함으로서 식자층의 일본인들이 지금도 ‘해동강부자(海東姜夫子)’라고 부르며 그를 恭敬하고 있다.
姜沆은 이토록 포로생활 속에서도 일본 유일의 지식층(순수좌 후지와라 세이카와 성주 아카마쯔히로미치(赤松廣通)에게 유학을 가르쳐 주면서 지리와 군사시설 등 적국의 실정(적중봉소)을 죽음을 무릅쓰고 권율장군의 노비인 김석복 편에 보낸 것이 그 하나요, 다음은 교오토에 와서 중국의 사신(使臣) 왕건공(王建功) 편에 보낸 것이 그 둘이며, 신정남 편에 보내진 것이 셋으로 고국에 은밀하게 왜장들의 인물됨과 그 수를 헤아리게 하는‘임진정유입구제왜장수(壬辰丁酉入寇諸倭將數)’를 기록하여 임금에게 다다르게 하였던 것이다.
이 적중봉소를 받은 선조는 당시 크게 감탄하고 나라의 수비를 맡고 있는 각 진의 장군들에게 돌려보도록 조치하였다.
당시 포로생활중의 姜沆은 首弟子인 후지와라 세이카의 忠言으로 오로지 조선 땅 고국으로 돌아가야겠다는 一念으로 왜놈들에게 글을 써주기도 하고 그들이 원하는 시를 지어주면서 고국에 돌아갈 金錢을 모으기 위해 틈틈이 銀貨를 모아 갔다.
그는 항상 와신상담(臥薪嘗膽)하면서 기회를 엿보던 어느 날 강항과 그의 식솔들이 교토의 후시미성(伏見城)으로 이송되자 후지와라 세이카와 그를 따르던 제자들이 앞 다퉈 준비해준 배를 타고 선조 33년(1600) 3년간 포로생활에서 34세에 풀려나 가족들과 수십 명의 정유재란 당시 포로들을 데리고 귀국하였다.
그러나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건 당시 조선인 포로 중에는 이미 각 지역에 명문귀족 집안의 여성에게는 열녀각 정문(旌門)을 조정으로부터 받게 되고 남성에게는 忠臣으로 장절비를 받은 자가 왜국에서 풀러난 포로에 포함되어 있어서 조선의 각 문중에서는 대혼란이 발생되고 말았다.
이처럼 강항은 이들을 敵地에서 구해내 데리고 왔음에도 불구하고 조정과 문중의 묘한 관계로‘그곳에서 생사만 확인해 주면 됐지! 왜 조선국으로 데리고 들어왔느냐’며 힐책을 받기도 했다.
앞에서 말했듯이 姜沆과 李氏 夫人의 만남은 인생에서 偶然과 必然을 우리들로 하여금 교훈처럼 받아들여지고 그 당시 李氏夫人의 절개와 지조를 현제까지도 높이 칭송하며 앞으로도 실로 귀감(龜鑑)이 되고 지아비를 섬기는 여인의 행동으로 우러러 보게 될 것이다.
정유재란의 폐해로 왜놈들에게 자식을 모두 잃은 姜沆은 고향에서 후진양성을 위해 정진하고 있을 무렵 이미 47세로(1614~1616)셋째부인을 맞이하게 된다.
당시 문중과 집안어른들이 모두 나서 성사된 후실(後室)로 들어온 20대의 이조이 부인은 오로지 姜沆만 바라보고 살았으며 금슬이 좋아 사내아이(시해)를 슬하(膝下)에 얻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昨今의 역사적 문헌과 족보에는 셋째부인인 이조이 부인에 대한 설명과 동기 또는 배경을 거의 찾아볼 수가 없다. 엄연히 이조이 부인의 所生으로 도도히 현재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데도 애생이 엄마라는 함평 이씨 부인은 역사 속에 존재하는데도 이조이 부인에 대해서는 역사와 족보 속에서 갑자기 사라져버리고 만다.
다만 영광군지(2013년 2월 15일 발행) 5권 영광군 기록문화 유산 83쪽 아래서 6째 줄에서 4째 줄글에서 셋째부인인 이조이 부인이 기록되어져 있다.
‘이조이 : 형조좌랑 강항의 첩이다. 남편이 죽자 음식을 딱 끊어버렸다. 상복을 입던 날 두 살배기 젖먹이를 내버려둔 채, 상복에 달린 배띠로 목을 매달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인조 때 이 일이 나라에 알려져, 그녀가 살던 마을에 정문을 세워 표창했다.’
여기서 우리는 유교의 창시자인 聖人이라 일컫는 孔子를 돌아보고 반면교사로 살펴봐야 한다. 공자의 출생은 공자의 아버지가 60세가 넘어서 난 첩의 소생이다.
공자의 처음 직업도 변변치 않은 장사나 장례를 치러주며 밥벌이를 하고 살았고 동네 무당으로도 알려져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년의 학문의 깊이와 제자들로 인해 공자는 성인의 班列에 올랐다. 지금 중국의 곡부땅에는 공자의 3대 공부, 공묘, 공림으로 조성되어 있으며 공자의 77대손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세계 공씨 성을 가진 자만이 묻힐 수 있는 聖地가 되어 있는 것이다.
이에 반해 救國의 심정으로 愛國愛族하고 조금도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산 姜沆을 우리는 이제는 부끄럽게 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이 부분을 명심하고 또 명심해야 할 것이다.
또 필자는 睡隱 姜沆선생께서 가장 힘들고 험난한 戰亂 속에서도 꿋꿋한 선비정신의 충절과 효심을 보여준 선비로서 그 험난한 시대를 모범적이고 그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삶을 志向하셨기에 감히 용기를 내‘두 분의 이씨 부인이야기’가 小說化작업으로 이토록 절실히 필요했던 것임을 一家親戚을 비롯해 독자들께서 양해해 주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