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잡함에 놀라고, 웅장함에 놀라고, 흘러온 시간에 놀라고.
정찬의 애피타이저 같은 스위스 여행을 마치고 취리히에서 이탈리아행 기차를 탔다.
정확하게는 취리히에서 밀라노까지, 그리고 밀라노에서 로마까지의 기차여행이었다.
흔히 말하기를 로마는 정치, 피렌체는 문화라면 밀라노는 경제 중심이라는데 기차를 갈아타야 했던 밀라노 기차역은 서울역에 신도림역을 합쳐놓은 것처럼 사람들이 많았다. 환승열차 플랫폼은 일렬로 되어있어 찾기가 쉬웠던 반면 기차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이용할 수 있는 의자 등 편의시설은 턱없이 부족했다.
게다가 이탈리아 사람들은 아직도 왜 그렇게 흡연자가 많던지...
취리히를 출발해 드디어 로마에 입성했을 때는 늦은 저녁이었다.
우리는 엄청나게 줄 서있는 택시 승강장의 사람들을 피해 한 블록을 걸어가서 우버를 불렀다.
우버 택시는 우리를 도심에서 삼십여분 떨어진 외곽의 허름한 호텔로 데려다주었다.
로마에서 우리는 배낭여행객답게 지하철과 버스를 이용해 로마 주변을 둘러볼 예정이었다.
우선 로마엔 너무 볼 것이 많아서 가장 대표적인 네 곳의 유적들만 둘러보기로 했다.
콜로세움과 포로 로마노, 판테온과 바티칸. 말그대로 로마여행의 진수들.
사진과 영상을 통해 너무 잘 알고 있는 곳임에도 불구하고 직접 보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감흥이었다.
콜로세움을 본 소감은 한마디로 놀라움 그 자체였다.
"어떻게 그 시절에 저런 건축물을 지을 수가 있었을까??"
콜로세움은 서기 72년에 베스파시아누스 황제가 짓기 시작해서 불과 5년(또는 8년) 동안에 지어졌다 한다.
믿기 어려운 이야기였지만 실제로 지어진 것을 보니 어느 정도 납득이 되기도 했다.
이를테면 마치 현대의 조립식 건축물처럼 규격화된 조각들을 단기간 내 만들어서 블록 쌓기식으로 지었다고 하니 로마인들의 천재성에 그저 놀라울 뿐이었다.
콜로세움은 4층으로 되어있는데 신분에 따라 이용하는 층이 달랐다한다. 게다가 각 층으로의 입구가 구별되어있어 질서 있게 수많은 관중들이 짧은 시간 안에 들어가고 나올 수 있었다 한다. 그 외에도 초기에는 완벽한 배수시설을 갖추고 경기장 안에 물을 채워 모의 해전을 벌이기도 했다가 나중에는 엘리베이터 장치까지 갖춘 지하시설로 사용했다고 한다. 그 유명한 영화 '검투사'(gladiater)에서 검투사들이 대기하고 있던 어둠침침한 방들이나 주인공이 지하에서 솟아 올라오던 장면은 그러니까 영화여서 꾸며낸 장면이 아니라 실제로 로마인들이 만들고 설치한 장비들이었던거다.
콜로세움은 화재로 흉흉해진 로마인들의 민심을 달래기 위해 귀족이나 원로원출신이 아닌 베스파시아누스 황제가 네로 황제의 황금궁전을 부수어 그 돌들로 지었단다.
네로의 폭정에 화난 민심이 콜로세움을 지음으로써 잦아들었을까??
세계 곳곳의 정복지에서 데려온 맹수들을 칼로 찌르고 죽임으로써 로마인들은 대 로마제국의 시민으로 자부심을 느꼈을까? 알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콜로세움이라는 건축물속에 담겨있는 인류의 과학적, 미학적 유산은 현대를 사는 내게는 그저 감탄과 놀라움 자체였다.
포로 로마노는 콜로세움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고대 도시의 흔적이었다.
2500여 년 전에 하수도가 만들어지고 공공건물과 상점, 신전들이 들어서면서 만들어졌던 로마 중심지의 모습이다. 그곳에는 콜로세움을 지은 베스파시아누스 황제 신전과 티투스 개선문과 같은 신전과 개선문등이 세워져 있고 시민들의 정치와 경제, 공공생활이 이루어졌던 흔적들이 남아있다.
로마 시내의 유적지는 대부분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에 있는데 콜로세움에서 포로 로마노까지도 정말 코 닿을 거리에 있었다.
그 옛날, 황제와 귀족들이 포로 로마노에서 열띤 토론하고 뒤이어 벌어질 검투사들의 대결을 보러 콜로세움으로 걸어갔을 모습이 어렵지 않게 그려졌다.
포로 로마노는 로마 중심지에 새로운 포로(포름)들이 생기면서 그 기능과 역할이 줄어들었다 한다.
판테온은 그리스어로 '모든 신들에게 바쳐진 신전'이라는 뜻이란다.
오전에 이미 콜로세움과 포로 로마노를 구경한 우리들은 약간 지치기도 했고 판테온을 구경하기 위해 서있는 사람들의 줄에 갑자기 피곤이 밀려왔다. 하지만 '모든 신의 신전'에서 '기독교 유일신의 신전'으로 바뀌며 그 원형을 거의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판테온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한참을 기다려 들어간 판테온은 좀 특이했다. 건축물의 앞부분은 여느 로마시대의 신전과도 같은 형태로 여러 개의 아름다운 기둥과 삼각형의 지붕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안으로 들어간 건물의 본체는 완전 구형이었다.
아름다운 대리석으로 꾸며져 있는 실내는 황홀했다. 게다가 그 실내가 돔의 한가운데에 있는 8.2m의 '눈' 오쿨루스를 통해 들어오는 빛에 의해서만 채광이 되고 있다니 무슨 말을 더 보태랴.
판테온은 로마시대의 유적 중에서 유일하게 거의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니 모든 신들의 돌봄에서 유일신의 돌봄까지 인간들이 믿어온 모든 신들의 보살핌이 무한대로 있었음이 틀림없다.
판테온까지 보고 나니 에너지가 고갈되고 말았다. 우리는 좁은 골목길로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첫 번째 음식점의 노상 테이블에서 점심을 먹었다. 이태리 음식에 익숙하지 않은 나는 아들에게 주문을 맡겼는데 모르기는 아들도 마찬가지였던가보다. 주문한 무슨무슨 마카로니와 무슨무슨 볼은 아무리 생각해도 내입에는 너무 안 익은 맛이었다. "아, 이 사람들은 왜 이렇게 음식을 설 익게 만든다냐.." 하는 수없이 우리는 제대로 익은 피자만 맥주와 함께 나누어 먹었다. 그리고 덜 채워진 배는 젤라토와 군밤으로 달랬다.
바티칸은 박물관과 성베드로 성당을 보기로 했었다. 하지만 박물관 하나만 보고 나니 체력도 바닥이 나고 시간도 어중간해졌다. 아니 어쩌면 박물관 보다도 성베드로 성당을 보는 게 나았을지도 모르겠다. 박물관도 베드로 성당도 인산인해라면 공간이라도 넓은 곳이 훨씬 관람하기가 좋지 않았을까?
박물관은 1500년대 교황 율리우스 2세가 포도밭에서 발견된 라오콘 상을 전시한 것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하는데 애초에 그곳은 역대 교황들의 궁전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좁은 공간에 어마한 양의 유물들이 전시되어있어 다소 압도되는 느낌이었다. 특히 마지막 부분에 보게 된 미켈란젤로의 천지 창조는 많은 사람들 사이에 촘촘히 선채 고개를 올려 봐야 했기에 '감상한다'기 보다는 '그냥 봤다'는 기분으로 서둘러 보고 나와야 했다.
솔직하게 이야기하자면 이집트 유물부터 방대하게 모아져 있는 유물들 속에서 나는 인류문화유산의 아름다움과 경이로움보다는 중세교회의 탐욕스러움이 느껴졌다. 그래서 가슴이 더 답답해졌는지도 모르겠다. 그저 얼른 둘러보고 밖으로 나가고만 싶었다.
그렇게 밖으로 나온 나는 성베드로 성당 앞에 끝도없이 서있는 사람들을 보고는 깨끗이 관람을 포기했다.
성베드로 성당 안의 피에타상이나 그 많은 아름다운 조각상들은 다음 기회로 넘기기로 했다.
내가 바티칸을 와보고 싶었던 것은 어쩌면 베드로 성당 앞 광장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름다움과 경이로움을 간직한 종교의 상징물들을 앞에 두고 광장에 모여 한마음으로 우리 모두의 안녕과 평화를 비는 소박한 인간들이 모여 교황님과 함께 기도하는 곳, 그곳에 와보고 싶었던가보다.
나는 광장 안에 놓인 빈 의자들과 분수, 스쳐 지나가는 수많은 사람들을 곁에 두고 한참을 머물렀다.
기도하는 사람들의 온기가 남아있을 그곳에서 나는 "우리 모두에게 평화를.."주시도록 기도했다.
로마, 그곳은 정말 놀라운 곳이었다.
고대의 숨결이 그대로 남아있고 그 위에 켜켜로 인류의 역사가 아로새겨져 있는 곳.
한 도시 안에 이렇게 인류의 문명사가 그대로 드러나있는 곳이 로마 말고 어디가 또 있겠는가.
그렇다 보니 현재의 로마는 너무나도 복잡했다. 교통상황은 엉망이었고 사람들은 서로 지쳐했다.
어쩌면 엄청난 문화유산을 안고 사는 현대의 로마시민들이 짊어져야 하는 숙명인지도 모르겠다.
언젠가는 다시 한번 찾아가보고싶다.
좀더 오래 콜로세움을 바라보고, 좀더 오래 포로 로마노에 머물러보고싶다.
또 언젠가는 교황님이 육성으로 전하는 평화의 메시지를 광장에서 직접 들어보고싶다. 꼭 언젠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