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세 아이들의 미국 대학생활
중고등학생 때 미국으로 건너온 아이들에게 대학은 전공과 관련한 교육만 받는 곳이 아니었다.
대학은 처음으로 집을 떠나 동료들과 함께 살면서, 그동안 알지 못했던 미국인과 미국 문화 더 나아가 전반적인 미국 사회에 대해 알게 되는 인큐베이터 같은 곳이었다.
아이들은 '대학'이라는 작은 미국 사회에 들어가 짧은 시간 안에 언어와 문화, 사회규범과 가치 등을 배워나갔다.
고등학교 11학년의 딸은 수능에 맞추어져 있던 삶의 목표를 SAT와 미국 대학 입학 지원에 초점을 맞추었다.
정말 눈물겹도록 애를 쓴 결과 버지니아 대학에 입학했다. 메릴랜더인 아이에게 버지니아 대학은 전액 지원의 그랜트를 제공했다. 물론 need base 그랜트이다. 이민 초년생인 부모의 경제적 형편을 고려한 결정이었지만 다른 대학들이 5000불에서 10,000불 정도의 학비를 부담하라고 한데 비해 그랜트의 규모는 지금 생각해도 감격할 정도였다.
게다가 학교의 정책과 분위기도 무척 마음에 들었다.
설립자인 토머스 제퍼슨이 학생들에게 한 충고에는 우선 심신의 건강을 위해 매일 운동할 것을 권하고 있다.
공부보다 운동을 먼저 하라니.. 정말 학생중심적이지 않은가!!
대학의 캠퍼스는 또 어떤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을 만큼 고풍스럽고 멋지다.
아이를 데리러 갈 때마다 들렀던 학교 카페테리아의 음식은, 음, 뭐랄까 좋은 뷔페식당 같다고나 할까, 먹고 나면 좋은 분위기에서 건강하고 먹고 난 것 같은 흡족함이 있었다.
한 번은 접시들을 놓던 개인용 쟁반이 보이질 않길래 물어보았더니 학생들 비만 방지를 위해서 치웠다고 한다. 쟁반에 불필요하게 몇 접시씩 담아 먹던 무의식적 식습관이 비만과 음식 쓰레기 양산에 기여했으리라.
여하튼 전반적으로 학생들이 존중받는다는 느낌이 강했다.
그러나 이런 좋은 대학의 학생이 된 딸은 대학생활을 충분히 만끽하진 못했다. 만끽 정도가 아니라 여러 면에서 많이 힘들어하고 부적응했다. 한국에서도 전형적인 공붓벌레로 살아온 아이는 그 습관 그대로 공부에만 집중했다. 그러지 않고는 언어문제로 따라가기 어려웠다.
어려서 잘 울지 않았던 아이는 대학생이 되어서 많이 울었다. 전화기를 붙들고...
공부만이 아니었다. 한 번도 집을 떠나본 적이 없는 아이는 미국의 대학생활을 어떻게 해나가야 할지 오리엔테이션이 되어있지 않았다.
대학 입학을 앞둔 어느 날 아침, 겁에 질린 채 앞으로 낯선 기숙사 생활을, 미국에서의 대학 생활을 어떻게 감당할지 걱정하던 딸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
딸이 처음 배정받은 기숙사는 6-8명 정도가 함께 사는 싱글 홈 형태의 기숙사였다.
들어가면 공용의 넓은 거실이 있고 거실을 중심으로 두 명씩 지내는 방이 서너 개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딸의 첫 룸메이트는 백인 여자아이.
입학 전부터 이메일로 서로 인사를 주고받으며 마음의 준비를 했지만 역부족이었던 듯,
낯선 아이와 함께 지낸다는 것에 잔뜩 긴장했던 아이는 불과 한두 달 만에 공부를 핑계로 거의 거실 소파에서 잠을 자야 했다. 이유는 룸메이트의 남자 친구 때문이었다.
어느 날부터 드나들기 시작한 룸메이트의 남자 친구와 룸메이트는 동료 룸메이트가 있든 없든 한밤의 거사를 치르더란다. 그들이 친밀의 시간을 갖는 동안 딸아이는 자는 척, 숨소리도 못 내고 숨죽이고 있었어야 했단다.
그 뒤부터는 아예 거실의 소파로 자의 반 타의 반 잠자리를 옮겨야 했다.
미국 젊은이들의 자유로운 이성관계에 적응하지 못한 딸의 말 못 할 고충이었다.
이뿐이 아니었다. 미국 대학에는 fraternity와 sorority가 있다. 학내 동호회 같은 것으로 오랜 전통을 가지고 각각 전용 기숙사에서 살기도 하는 사교 모임이다. 처음 대학에 가면 자신의 취향에 맞게 가입을 하고 그 모임을 통해 소셜을 만들어 나간다.
딸은 눈앞에 떨어진 과제에 집중해야 했으므로, 아니 어쩌면 소셜보다는 과제에 집중하는 성격상 소로리티에 가입하지 않았다. 그 결과는 대학생활 내내 외 도톨이였다. 몇몇의 친구 외에는 친구도 별로 없었다. 그래서 더 과업에 치중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모든 것에 양면이 있듯이 딸은 소셜에 투자할 시간을 공부에 투자했고 나름 성과가 있었다.
화학을 전공한 과학도로 11학년에 시작한 미국 공부 치고는 유급 없이 제때 졸업했다.
유급은 말할 것도 없고 일 년을 더 공부해 5년 후 졸업 시에는 화학 학사와 교육학 석사 두 학위를 가지고 졸업했다. 학업에서의 성취는 이룬 셈이다.
또 또래 친구는 몇 안되었지만 어쩌면 더 소중한 인생 친구와 선배들을 얻기도 했다.
몇 년간 매일 이른 아침, 도서관에 가면서 커피를 사는 아시안 학생과 인사를 나누던 매점의 흑인 아줌마는 지금도 딸아이의 페북에 제일 먼저 댓글을 달아주는 영원한 지지자이다.
또 남들 하기 싫어하는 주말과 밤 시간의 도서관 근로학생이었던 딸의 든든한 서포터였던 사서 선생님은 딸이 졸업식 후 가장 먼저 찾아가 인사한 인생의 선배님이다.
그러고 보면 모든 것을 다 이룰 수는 없는 것 같다. 고2 마치고 미국에 와서 이룬 학업성취는 그동안 흘린 땀과 눈물의 결실이었다.
아마도 딸은 또다시 같은 상황에 놓이더라도 똑같은 길을 걸을 것 같다.
반면, 관계지향적인 아들의 대학 생활은 좀 달랐다.
전공도 Human Ecology에서 Biology 전공. 화학보다는 좀 덜 인텐스 한듯하다. 영양학도 듣고, 사회과학 과목도 심심찮게 들었다.
무엇보다도 fraternity에 조인을 했다. 2년 정도는 fraternity기숙사에서 살면서 brothers들과 어울렸다.
형제회, 자매회 회원들이 함께 모여 이벤트를 갖기도 하고 그 속에서 이런저런 에피소드들이 만들어졌다.
졸업 후에도 같은 형제회 친구들이 뉴욕에, 필라델피아에, 서울에, 홍콩에 있어서 아들의 여행 중엔 그들과의 만남 일정이 꼭 들어간다. 형제회가 있는 대학생활은 아들에게 폭넓은 인간관계를 경험하게 해 주었다.
그러면서도 아들은 원만한 학업성취를 이뤄냈다.
사실은 이를 악물고 공부에 전념한 누나 보다도 평점이 조금 높다.
나는 이것이 근본적으로는 언어의 문제였다고 생각한다.
중학생 때부터 영어를 사용한 아들과 고등학교 때부터 영어를 사용한 딸의 영어는 다르다.
둘의 표현대로 한다면,
큰애는 "나는 영어, 한국어 스위치가 있어. 한국어를 쓸 때와 영어를 쓸 때 의식적으로 스위치를 바꾸지."라고 하고, 작은애는 "들려오는 영어를 이해하는데 0.1초 정도의 갭이 존재"하는 것 같다고 한다.
들리는 대로 이해하는 원어민과의 차이 일터이다.
0.1초의 차이와 아예 스위치를 작동시켜야 하는 차이가 둘의 대학생활을 다르게 만들었을 것이다.
게다가 중학교부터의 미국식 교육은 자기 주도형 학업을 가능하게 했고 학업성취와 자신감 획득으로 이어진 것으로 생각한다.
나는 초등학생 아들이 했던 말이 종종 생각난다.
" 난 서울대학 안 가도 돼, 난 누나처럼 밤새고 공부하고 그러지 않을 거야."
이렇게 느긋하던 아들은 이민이라는 변화 앞에 계속 느긋할 수가 없었다.
영어 발음이 조금 이상하면 아이들이 '치노'라고 놀렸고 수업시간에 대답을 못하면 미국 아이들보다 더 자존심이 상했다. 그 상황에서 벗어나려면 스스로 해 나가야 했다. 영어를 위해 스펀지밥을 쉼 없이 보고 따라 했고, 과제를 열심히 하고 수업에 열심히 참여해야 했다.
그 결과였다. 중고등학교와 대학생활을 거치면서 아들은 점점 성취지향이 되어갔다.
이민이라는 프로젝은 부모인 우리에게나 아이들 모두에게 엄청난 충격이었던 것 같다.
다만 1세대인 우리의 이민 프로젝은 15년이 지난 지금도 현재 진행형이라면, 청소년기의 아이들에게는 성장기의 파고를 좀 더 높였을 뿐이라는 것이다. 아이들은 그 파고를 타고 자랐다.
부모인 내가 마치 뿌리째 뽑아 옮겨 심은 나무였다면, 아이들은 접붙이기를 해서 더 크고 우람하게 가지를 뻗는 나무로 자라나 갔다는 것.
아이들이 접붙여져 더 크게 자랄 수 있도록 제 몸통을 내어준 것은 다름 아닌 아이들의 배움 터, 대학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