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버틸 수 있게 해 주었던 소중한 시간들
어제는 일 년 중 가장 큰 명절인 Thanksgiving이었다.
올해도 보스턴 마켓이라는 음식점에서 세트로 되어있는 땡스기빙 음식을 주문하고 세트에 포함되지 않은 햄이며 콘, 콘브레드, 스트링 빈 같은 것들은 코스코에서 미리 사두었다.
예열을 마친 오븐에 터키를 집어넣고 팬에 버터를 녹여 하나씩 볶고 있자니 고소한 버터 냄새가 집안 가득 땡스기빙 분위기를 느끼게 만든다.
드디어 한상 가득.
갈색으로 먹음직스럽게 구워진 터키, 살짝 데운 햄, 콘버터 볶음, 매쉬드 포테이토와 그레이비, 스터핑, 스트링 빈, 크랜베리 소스, 디너롤과 콘브레드 그리고 펌킨 파이.
제대로 한상 차려졌다.
사실 고백하자면 아무리 잘 구워져도 터키는 별 맛이 없다.
하지만 미국살이를 오래 하신 어르신들은 일 년에 한 번 먹는 땡스기빙 음식을 맛있게 잘 드신다.
짐작컨대 '맛'으로 먹는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 동안 가족들과 함께했던 '소중한 기억'으로 먹는다고 생각한다.
어르신들뿐이 아니다.
나도 Holiday 음식을 볼 때마다 이민 초기에 네 식구 단출하게 맞이하던 Holiday 디너가 생각난다.
그중에서도 이 년째 되었을 때 먹었던 특별한 저녁식사는 아직도 내 가슴속 소중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시골에 살고 있던 우리는 두 시간 반 거리의 도시 근처에 주말에만 오픈하는 작은 가게를 막 시작한 참이었다.
무엇을 해서 먹고살아야 할지 막막한 가운데 그래도 하던 일이 낫겠지 싶어 남편이 한국에서 하던 일을 활용해 오픈한 가게였다. 주말만 오픈하는 가게는 조심스럽게 한 발자국씩 나아가려는 우리의 상황과 걸맞은 것이었고 까짓것 두 시간 반 거리는 주말 동안 남편과 장거리 드라이브 데이트한다고 생각하면 될터였다.
문제는 아직 아이들이 운전면허가 없어서 우리 부부가 주말 동안 집을 비우면 아이들의 발이 묶인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먹고사는 일이 우선 급하니 우리 모두는 불편을 감내하기로 했었다.
그렇게 주말마다 장거리 출퇴근을 하던 어느 날, 아마도 땡스기빙이거나 아니면 크리스마스이브쯤 되었을 것 같다. 우리 집의 땡스기빙 음식과 크리스마스 음식은 대동소이하다.
훈제 터키 다리에 크랜베리 소스, 매쉬드포테이토, 콘등은 공통이고 땡스기빙이면 콘브래드, 크리스마스면 케이크가 추가되는 정도였다. 이것들은 한국 명절 음식처럼 공이 많이 들어가는 음식들은 아니다. 대부분 미리 구입을 해놓았다가 다시 한번 굽거나 간단히 볶으면 되는 것 들이다.
그런데도 무슨 일로 그리 바빴었는지 그날 나는 재료들을 미리 사놓지 못하고 일하러 갔었다.
가볍게 생각했던 것 같다. 일 끝나고 가면서 아무 그로서리에서나 쉽게 살 수 있겠지.
대형 월맡은 24시간 하는 곳도 있고 가는 길에 대형마켓인 샘즈나 코스코, 그것도 안되면 집 근처의 식료품점인 푸드 라이온에 가면 살 수 있을 거였다.
11월부터 시작되는 미국의 Holiday 시즌은 정말 일 년 중 가장 많은 소비가 이루어지는 기간이다.
어느 가게나 북적거렸고 막 오픈해서 고객 탐색에 나선 우리 가게에도 하루 종일 고객들이 드나들었다.
그렇게 일을 마치고 지친 우리는 아이들이 있는 '우리 집'으로 향했다.
이젠 느긋하게 아이들과 명절 만찬을 즐 길일만 남았다. 포도주를 곁들이면서.
물론 중간에 식료품 쇼핑을 해야 하니 귀가시간은 좀 더 늦어지겠지.
아차차, 그런데 조금 이상하다.
어둠이 내린 도시는 평소 주말 같지 않게 더 어둡고 더 조용했다. 지나가는 차들도 훨씬 적게 보인다.
불안한 마음을 안고 중간쯤에 있는 작은 도시에 들어섰다. 그곳의 월맡에 들려볼 생각이었다.
어랏!, 문을 닫았다. 당황스러웠다. 명절이라고 일찍 문을 닫은 것이다.
그렇게 서너 군데 들른 식료품점들은 모두 닫혀있었다. 그들도 모두 명절을 즐기러 집으러 간 것이다.
아... 어떻게 하지??, 집에 아무것도 준비된 게 없는데... 망했군...
다들 명절이라고 들뜬 저녁시간을 보낼 텐데 우리 집만 어제 먹던 김치찌개를 또 꺼내게 생겼다.
난감했다. 하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일.
나는 전화로 아이들에게 사실대로 이야기하고 냉동고에서 몇 가지를 꺼내놔 달라고 부탁을 했다.
그렇게 여덟 시가 다되어 도착한 집.
아이들이 평소보다 밝은 표정으로 우리를 맞이한다.
그것도 이상하다. 엄마가 아무것도 준비 못한 채 돌아왔는데도 짜증 난 기색이 아니다.
아이들의 그런 모습을 보니 더 미안하고 속상하다.
앗, 그런데 저건 뭐지?
아이들에 이끌려 식탁으로 간 우리들의 눈은 놀라서 휘둥그레졌다.
식탁에는 조촐하지만 정성이 가득한 음식들이 차려져 있었다.
아이들표 Holiday 만찬!
아이들이 우리를 위해 생각하지도못했던 음식을 만들었다는 것도 감동이었지만, 그중에서도 김밥을 만들기 위해 두 아이가 어떻게 했는지 쏟아내는 이야기는 우리들 식탁을 더 따뜻하게 해 주었다.
재료 부족으로 겨우 한 접시 만들어져 있던 김밥은 큰아이가 처음 만들어본 김밥이었고 아들은 그 김밥을 위해 시금치를 찾아 식료품점을 다녀와야 했다. 자동차 없이...
김밥을 만들기로 한 아이들은 재료를 챙기다가 시금치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시금치를 사려면 식료품점에 가야 하고 차가 있어야 사러 갈 수 있는데??
잠시 생각하던 아들은 창고 어딘가에 처박혀있던 자전거를 생각해냈을 것이다.
그리고 초등학교 때 쓰던 헬멧과 안전조끼 등으로 장비를 갖춘 채 자전거로 식료품점엘 다녀왔겠지.
왕복 30분 거리의 자동차 도로를.
그날의 음식은 샐러드용 시금치로 만든 어설픈 김밥이 아니라 십 대의 내 아이들이 일 나간 부모를 생각하며 마음으로 만든 김밥이고 쿠키였다.
내가 미처 준비하지 못한 훈제 터키와 파이로는 맛 볼 수 없었던 감동과 기쁨을 준 음식이었다.
지금도 나는 Holiday시즌이 되어 터키와 파이로 차려진 디너를 생각하다 보면 그날의 김밥이 떠오른다.
대부분의 어르신들이 땡스기빙 디너를 가족과 함께 하기 위해 외출을 했던 예년과 달리 올해에는 어르신들의 외출도, 가족들의 방문도 모두 금지다.
어르신들만 그런 것이 아니다.
우리 집 아이들도 늘 땡스기빙 때는 집에 오곤 했었는데 올해는 모두 각자 집에서 명절을 보내고 있다.
그 바람에 터키고 펌킨 파이고 추수감사절 음식들이 너무 많이 남았다.
우리 집 추수감사절은 아마도 내일까지 이어져야 할 것 같다.
하지만 나는 남아있는 터키 대신 맛있게 무친 시금치를 넣은 김밥을 만들어 먹어볼까 싶다.
그리고 내년 땡스기빙 또는 크리스마스 디너 때는 아이들을 위해 시금치를 넣은 맛있는 김밥을 추가해야겠다.
( 메인 메뉴인 터키도, 호박파이도 아직 놓질않았는데 이미 한 접시 가득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