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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강 Nov 17. 2024

너를 처음 만난 날

손녀가 태어났다.

우리 집에서 두 시간 반 거리의 딸 집, 거기서 또 한 시간을 더 가야 하는 병원에서의 출산이라고 했다.

게다가 귀동냥으로 듣자 하니 출산 시의 산모와 아기를 보려면 무슨 백신도 맞아야 하고 복잡하단다. 

그런저런 이유로 우리들은  딸이 출산한 뒤 퇴원할 시간에 맞추어 딸 집으로 갔다. 

열달을 기다리고 또 이틀을 더 기다려 마주한 작은 아기, 우리는 마침내  인생의 첫 손녀를 만났다.




1. 처음 본 네 모습


딸 집에 도착해서 보니 사위의 부모가 먼저 와 있었다.

부엌의 아일랜드 위에는 풍성한 장미꽃 다발이 화병에 꽂혀있고 하트 모양의 핑크색 풍선이 축하의 분위기를 띄우고 있었다. 손녀는 안사돈의 품에 폭 싸여 안겨있었다.

그렇게 마주한 너.

포대기에 감싸여 있는 손녀는 정말 작은 아기이다. 너무 작고 앙증맞은 눈코입, 살짝 펼쳐본 포대기 속 두 발, 비단결보다 보드라운 머리칼, 그리고 포대기 위로 느껴지는 너의 작은 호흡.

안사돈의 품에서 내 품으로 건네진 너를 안고 나는 눈을 떼지 못한다.

정말 네가 우리에게 왔구나.

고맙게도 태중에서 엄마를 너무 힘들게 하지 않고 무럭무럭 자라주었던 너.

태어날 때도 수월하게 나와 출산을 도왔던 아빠 품에 안겼던 너.

아빠의 얼굴을 많이 닮은 것 같은데도 또 어딘지 모르게 엄마를 닮은 것도 같은 너.

무엇보다 손가락, 발가락 어디 한 군데 부족하지 않고 건강하게 태어나 준 너를 나는 경이로움으로 바라본다.


2. 외할머니가 함께 한 너의 첫 두 주간


손녀가 태어 난 뒤 첫 두 주간은 친정엄마인 내가 도와주기로 했다.

미리미리 사서 얼려두었던 고기와 먹거리들, 미역들, 미역국을 끓일 큰 솥, 국을 담아 먹일 뚝배기, 음식재료와 밥솥까지 들고 딸 집으로 왔다.

출신 나라가 다른 딸 부부는 음식 취향도 조금 달랐다. 한국음식에 익숙한 딸과 달리 사위는 미국식에 홍콩 또는 일본음식을 좋아했다. 그러다 보니 그동안 둘은 각자 취향대로 아침을 챙겨 먹고, 출근하면 점심은 직장에서, 저녁은 주문해서 먹거나 밀플랜으로 배달된 것들을 조리해 먹었단다.

그런 상황이니 제대로 된 부엌 조리기구가 갖추어져있질 않았다.  

아이쿠 맙소사! 처음 가서 열어본 냉장고 속엔 며칠 묵은 밀플랜들이 가득했었다.

한숨이 푹푹 나왔지만 외할머니로서의 나의 할 일은 모유수유하는 딸이 잘 먹도록 하는 것, 그래서 영양가 많은 모유가 잘 나오게 하는 것 아니겠는가.

나는 겨우 몸을 추스른 딸을 앞세워 가까운 쇼핑센터로 가서 작은 냄비 두 개와 그릇들, 뒤집개등 조리기구, 딸이 모유수유 하기에 쉽도록 앞이 트이고 따뜻한 스웨터 등을 사 왔다.


그렇게 시작된 딸 집 부엌 살림살이의 변화.

더 이상의 밀플랜은 없애버리고, 소고기 미역국과 조개 미역국을 번갈아 끓여냈다. 미역국 같은 순 한국음식을, 아니 미역을 먹지 않는 사위를 위해서는 계란찜이나 순두부, 불고기 같은 사위가 먹을 수 있는 한국음식을 따로 장만했다. 다행히 딸은 질리지도 않고 미역국을 잘 먹어주었고 모유는 부족하지 않게 나와주었다. 사위 역시 한 가지 음식만 해주면 서툰 한국말로 "감사합니다, 어머니!"라며 먹어주었다.


얼른 음식을 식탁에 차려준뒤, 아기를 내 품에 받아 안고 딸이 미역국을 먹는 모습을 바라보는 그 시간들.

언젠가 먼 훗날 첫 손녀를 생각하면 떠오를 모습일 것 같다.



3. 너의 첫 목욕


배꼽이 떨어지자 우리는 손녀의 목욕을 시도해 보기로 했다.

하지만 저렇게 작은 아기를, 저렇게 여린 아기를 어떻게 씻기지???


사실 사위는 아마존으로 아기 목욕 도구를 사놓았었다. 경사진 침대처럼 되어있고 구멍이 송송 뚫려있는 플라스틱 목욕침대같은.... 그 위에다 아기를 뉘고 샤워기로 씻기도록 되어있는 것인데 욕조의 샤워기가 적합하지 않은 것은 차치하고서도 그렇게 작은 아기를 그곳에 누이는 것 자체가 어려울 것 같았다.

이럴 땐 내 머릿속에, 내 몸속에 저장된 오래된 경험을 불러내는 수밖에....


우리는 무려 한 시간 거리에 있는 한인마트에서 사 온 큼지막한 플라스틱 대야와 작은 플라스틱 바가지를 준비했다. 작은 것은 처음 눈과 얼굴을 씻기기 위해서, 큰 것은 몸을 씻기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이어진 외할머니, 나의 노련한 손놀림. 

처음엔 나도 이렇게 능숙하게 신생아를 다룰 줄 몰랐다. 그런데 벌거벗은 갓난아기를 한 손에 잡자 마치 엊그제도 했었던 것처럼 나는 거리낌 없이 씻겨나갔다. 한 손으로 아기의 앞가슴을 보듬어 안고 팔다리와 등부터 씻겨나가니 아기도 편안한지 낑낑대지도 않았다.

이렇게 뿌듯할 수가!!! 이렇게 내가 멋지게 해내다니!!!

잘 씻긴 아기를 딸 품의 큰 수건에 감싸 안겨주고 뒷마무리를 하는데 할머니로서 여간 흐뭇한 게 아니었다.


4. 할머니들의 도움으로 쑥쑥 크는 너


손녀는 양쪽 집안의 첫 손주이다. 딸이 우리 집 첫째이어서도 그렇지만 사위는 삼 형제의 막내인데도 위로 둘은 아직 미혼이라 사돈네에도 첫 손주이다. 그런 연유로 나와 안사돈은 팔을 걷어붙이고 딸과 아기 돌봄을 도와주기로 했다.

그렇게 시작된 할머니들의 손녀 돌보기.

처음 두 주간은 외할머니인 내가 산모와 신생아와 함께 했지만 두 주 후부터는 주중과 주말을 나누어서 손녀 돌봄에 나서고 있다. 아직 직업생활을 하고 있는 안사돈이나 나의 상황을 고려해 주중은 내가, 주말은 안사돈이 딸 집을 오가고 있다.

쉬운 일은 아니다. 게다가 직원 퇴직과 신규채용의 문제를 해결해야하는 나는 딸 집에서는 내 집 걱정, 내 집에서는 딸 집 걱정으로 마음이 번잡하다. 

하지만 금요일 오후 집으로 나서기 전 보듬은 손녀의 모습과, 주말 동안 못 본 손녀를 다시 안아 들며 느끼는 감정은 그 무엇으로도 바꾸고 싶지 않은 따뜻한 '그 무엇'이다.


손녀는 지금 두 할머니들의 사랑을 먹으며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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