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이스탄불

10시간의 비행과 7시간의 시차, 그리고 생경한 일들

by 유강

이스탄불을 향하여.


우여곡절 끝에 우리는 드디어 이스탄불행 비행기에 올랐다.

앞으로 열 시간의 비행을 감당해야 한다.

미국에서 한국까지 14-5시간이 걸리는 것에 비하면 가깝지만 10시간이 넘는 시간을 좁은 비행기 안에서 버텨야 한다고 생각하니 조금 걱정이 되었다.

튀르키예의 이스탄불은 유럽과 아시아, 아프리카를 잇는 교통의 허브이다. 그래서 그런지 압도적으로 많은 튀르키예인들과 아프리카인들, 백인 등 다양한 인종들이 함께 타고 있었다.

출발부터 느낌이 다르다. 이런 것이 여행의 묘미이다. 낯선 곳을 찾아간다는 것.


낯선 것은 또 있었다.

승객들이 거의 짐을 선반에 올리고 자리에 앉을 즈음, 뒷자리 어디쯤에서 갑자기 고성이 오고 갔다.

악센트가 강한 어느 여성과 미국 남성의 말다툼이 벌어진 것이다.

아마도 자리에 앉다가 서로에게 약간의 불편이 생겼었나 보다.

그 둘의 고성은 점점 높아지다가 급기야 남자 입에서 "bitch, 어쩌고 저쩌고.." 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자 여성도 지지 않고 육두문자를 써가면서 맞대응을 하는 거였다.

세상에나,,, 놀라웠다.

비행기 안에서는 그만두고 지금까지 미국에서 20년 넘게 사는 동안 처음 들어보는 욕지거리 싸움이었다.

2-3분여를 싸우다 주변의 만류로 싸움은 잦아들었지만 성인들의 욕지거리 싸움은 낯설었다.

설마 내가 찾아가는 곳의 사람들에게 저런 모습이 일상인 것은 아니겠지???


싸우는 소리만이 아니었다.

나는 이번 비행에서 남자들도 정말 이렇게 수다스러울수가 있구나를 실감했다.

우리 바로 뒷자리의 백인 중년 남성들은 비행기에 타는 순간부터 떠들기 시작했다.

그들의 뚱뚱한 몸통에서 울려 나오는 그 크고 우렁찬 목소리라니..

최종 도착지가 어디냐부터 시작된 대화는 자기가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이고 무슨 일 때문에 가고 있고 어디에 묵는다는 이야기에 명함까지 주고 받으며 주저리주저리 끝없이 이어졌다.

급기야는 자신의 현재 부인이 어린 나이의 아시안이라는 이야기까지 정말로 듣고 싶지 않은 사적인 이야기들까지 쏟아내고 있었다. 망할 인간들,,, 나도 모르게 속에서 욕이 나왔다.

기내의 오디오 시스템에서 아바의 노래를 찾지 못했더라면, 내 두 귀를 이어폰과 가져간 소음 제거 헤드폰으로 막고 있지 않았더라면 많이 괴로웠을 것 같았다.

여행엔 늘 좋은 면만 있는 것이 아니다. 여행 중 좋은 장소, 좋은 사람, 좋은 일을 찾아 나서는 과정 중엔 힘들고 불편한 일들도 함께 겪어야 한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아바의 노래를 반복해서 듣고, 전자책을 꺼내 위화의 소설 <인생>을 탐독하고, 두 번의 기내 식사를 하는 동안 비행기는 점점 이스탄불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스탄불은 실크로드의 종착지로 보스포루스 해협으로 도시 자체가 아시아 지역과 유럽지역으로 나뉘어있다.

실크로드의 종착지라는 사실, 동양과 서양이 미묘하게 뒤섞인 인종과 문화적 특징, 그리고 무엇보다 동로마 제국 '콘스탄티누스의 도시'라는 뜻의 콘스탄티노플에서 'To the city(에이스, 텐, 폴린)'라는 뜻의 그리스말에서 오랫동안 구전되다가 오스만 제국의 이스탄불로 존재했던 도시이다.

이 얼마나 놀라운 동서양의 역사적, 문화적 융합인가!, 나는 그런 특별한 장소에 다가가고 있었다.


오후 1시 30분에 출발한 비행기는 밤을 이어 날아가 다음날 이른 아침에 도착했다.

우리는 7시간의 (빠른) 시차와 열 시간이 넘는 비행시간, 이미 엉클어진 수면 패턴 등으로 멍한 상태로 이스탄불에 첫발을 내디뎠다. 이스탄불은 밤사이 살짝 비가 내린 듯 습기를 머금은 쌀쌀한 날씨였다.

우리는 이른 체크인이 가능하다는 호텔로 가서 꼬박 새버린 지난밤의 잠을 보충하기로 했다.


20260218_081742.jpg ( 택시 안에서 바라본 바깥 풍경 )


우버 택시 안.

첫 손님이었을 우리를 뒤에 두고 어딘가와 끊임없이 전화통화를 하며 운전하는 무뚝뚝한 기사 아저씨.

매캐한 매연가스 냄새가 나는 도로와 주변 풍광은 흡사 한국의 어느 수도권의 도시 같은 모습이었다.

물끄러미 창밖을 내다보던 중 내 눈에 비친 도심 외곽의 한 모스크와 펄럭이던 국기.

커다란 튀르키예 국기와 함께 모스크는 무슬림의 나라 튀르키예 이스탄불의 첫인상이었다.

내가 찾아갈 아야 소피아 성당이나 블루 모스크가 아니더라도 주변에 심심찮게 보이는 모스크는 우리가 이스탄불에 도착했음을 실감하게 했다.


우버 택시로 4-50분 걸려 도착한 숙소는 블루 모스크에서 멀리 않은 유럽지역의 구시가지에 있었다.

고맙게도 이른 체크인을 허용해 주어서 우리는 숙소에 들어가 오후 3시까지 무려 5-6시간을 내리 자버렸다.

다음 달부터 '노인의료보험 가입자'가 되는 나를 배려한 아들의 결정이었는데 일단 쉬기로 한 것은 정말 잘한 생각이었다. 이럴땐 내가 이미 팔팔한 장년의 세월을 넘어서고 있다는 자각에 조금은 서글퍼진다.

하지만 보는 것보다 먹는 것이, 먹는 것보다 쉬는 것이 진정한 여행의 기본 전제 아니던가.


일단 휴식을 취하고 일어난 우리는 출출해진 뱃속을 달래려 숙소 밖으로 나섰다.

숙소가 위치한 곳은 말 그대로 관광지 한복판이어서 숙소들과 음식점들, 기념품점들이 빼곡했다.

우리는 평범해 보이는 식당 한 곳에 들어가 고기와 가지로 된 튀르키예의 음식을 시키고 튀르키예식 커피와 홍차를 마셔보기로 했다.

음식은 어떤 맛이었는지 지금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조금 맛본 커피는 너무 강해서 먹기가 힘들었다.

반면 튀르키예 여행기에서 빠짐없이 등장하는 홍차는 무척 친숙한 맛이었다.

특유의 허리 잘록한 투명컵에 담긴 맑고 붉은 홍자는 설탕을 넣자 집에서도 간혹 마시던 익숙한 차가 되어 텁텁한 입안을 개운하게 만들어주었다.


쉬고 먹었으니 보러 나서야 할 시간이었다.

하지만 잔뜩 찌푸린 하늘과 간간이 뿌려대는 빗방울, 그리고 차가운 날씨는 우리를 주저하게 했다.

이미 만포고복의 느긋함 때문이기도 했겠지만 모자이크창이 아름답다는 블루 모스크는 햇빛 찬란한 날에 가서 봐야 그 빛이 만들어내는 '빛의 예술'을 만끽할 수 있을 테니까.

다행히 다음날은 날씨가 좋을 것이라는 예보여서 우리는 미련 없이 다시 숙소로 발길을 돌렸다.

내일 아침 해뜨기 전의 이스탄불을 시작으로 두곳의 모스크를 둘러본다면 시간은 넉넉할 것 같았다.

여행의 첫날을 별다른 일정 없이 보낸다는 것이 조금 아쉬웠지만 내일을 위해 체력을 아끼기로 했다.

그렇게 이스탄불의 첫날은 '쉬어가기'일정으로 채워졌다.


내가 보고 싶었던 곳, 아야 소피아와 블루 모스크


이스탄불을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고 나오는 명소가 바로 두 곳 아야 소피아 성당과 블루 모스크이다.

짧은 일정으로 나는 그 두 곳만 시간적 여유를 가지고 둘러보기로 했다.


20260219_070751.jpg ( 해저문 시간에 아름답게 불밝힌 모습 )
20260219_103202.jpg ( 회벽이 벗어진 벽면의 모자이크 성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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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중에서도 아야 소피아 성당(모스크)은 튀르키예의 지리적, 역사적 특징이 고스란히 스며있는 곳이다.

동로마 제국의 황금기인 유스티니아누스 1세 황제에 의해 완성되어 동방 정교회의 본산 역할을 하다가 오스만 제국에 의해 이슬람 모스크로 사용되었다. 메흐메트 2세는 정복 시 아야 소피아 성당의 파괴를 금지했다고 한다. 오스만 제국은 정복 시 군사들이 3일간 정복지를 약탈할 수 있도록 허용했는데 아야 소피아는 예외였던 것이다. 피정복지의 뛰어난 문화를 적극적으로 포용한 그들의 높은 문화적 식견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어쩌면 오스만 제국의 이러한 포용과 융합의 태도가 과거엔 실크로드의 종착지로서, 현재는 세계적 교통의 허브로서 자리매김할 수 있게 만들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들은 성당 벽면의 모자이크들을 석회로 덧칠해 이슬람 모스크로 바꾸었는데 그런 결정이 아야 소피아가 기독교와 이슬람의 문화가 공존하는 독특한 건축물로 남아있을 수 있게 했다. 한때는 박물관이었다가 지금은 모스크로 다시 사용되고 있는데 내부의 석회가 벗겨진 부분들에서 비잔틴 시대의 모자이크들이 선명하게 드러나있었다.


관람은 박물관 관람과 아야 소피아 성당 내부 관람을 함께 하도록 되어있다. 박물관은 그룹으로 안내되어 들어가 대형 스크린을 통해 아야 소피아의 건립과 증축의 역사를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되고 있었다.

충분한 설명을 듣고 관람하는 것은 아주 유익했지만 관람 비용이 만만치 않았다.


블루 모스크는 파란색 돔과 흰색 건물이 두드러지게 선명해서 무척 인상적이었다.

아야 소피아와 마찬가지로 현재 모스크로 쓰이고 있는 관계로 여성인 나는 스카프를 쓰고 들어가야 했다.

실내는 원형 구조물로 벽과 천장을 빙 둘러 스테인드 글라스가 되어 있었는데 무척 아름다웠다.

마침 맑은 날씨로 스테인드 글라스를 통해 들어오는 빛은 형형색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블루 모스크에서 기도하는 튀르키예인들은 창을 통해 들어오는 빛의 아름다움을 극대화해서 자신들이 믿는 신의 현존을 느끼고 싶었던가보다.

빛은 모든 신성의 현존이니까...


20260219_105503.jpg ( 블루 모스크의 바깥 전경 )
20260219_110418.jpg ( 블루 모스크의 아름다운 실내 )


사실 아야 소피아나 블루 모스크 모두 관람하는데 그리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아야 소피아 박물관조차 무슨 전시물을 관람하는 게 아니고 영상물을 시청하는 것이었다. 그러다 보니 예상보다 빨리 관람을 마칠 수 있었다. 다시 말해 여유시간이 생긴 것이다. 우리는 조금 걸어 그랜드 바자르를 향해 걸었다.

그랜드 바자르는 1455년 메흐메트 2세가 경제 활성화를 위해 짓기 시작했다는데 지금은 22개의 진입로와 4000여 개의 점포로 매일 수많은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있단다.


우리는 진입로 근처의 식당으로 들어가 차와 바클라바를 시켜 먹기로 했다. 잠시 휴식을 하기로 한 거다.

터키식 페이스트리 과자인 바클라바의 단맛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달아도 너무 달아서 나는 한 개 이상을 먹기가 어려웠다. 진한 커피와 설탕을 넣지않은 홍차는 바클라바를 먹을땐 필수일것 같았다.

튀르키예에서의 단맛은 호의와 친절, 선의를 표시한다고는 하지만 왜 그렇게 강한 단맛을 좋아하는지는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20260219_122013.jpg ( 사람은 둘인데 차는 세 잔?, 피로 회복용으로 아들이 진저레몬 차도 하나 더 시켰다. )


그랜드 바자르의 모습은 우리나라의 남대문이나 동대문 시장과 비슷했다. 입구에 들어서면 비슷한 물건들을 파는 점포들이 건물 내에 빼곡히 있었다. 우리가 들어간 곳은 귀금속을 파는 구역이었는지 금붙이 상품들이 이어져있었다. 내가 구경하고 싶었던 곳은 각종 향신료나 말린 과일들을 파는 구역이었는데 귀금속 구역을 돌아보고 나니 급 피곤해지기 시작했다.


20260219_124252.jpg ( 그랜드 바자르 입구 )


그도 그럴 것이 그날은 아침 일출에 살아나는 이스탄불을 보겠다고 해뜨기 전부터 움직였던 탓이었다.

우리는 이스탄불에서의 여행을 마무리하고 호텔로 돌아가기로 했다.

아야 소피아와 블루 모스크, 걸으면서 바라본 거리와 사람들, 막 시작된 라마단과 하루 몇 번씩 스피커로 들리던 기도소리로 이틀간의 이스탄불 여행은 꽉 채워졌다. 욕심내지 않은 이스탄불 101을 끝내기로 했다.

언젠가는 이스탄불을 넘어 튀르키예 곳곳을 다시 찾아볼것을 마음먹었다.


20260219_073944.jpg ( 해뜨기 전의 아름다운 모습 )


20260219_075659.jpg ( 보스포루스 대교 위에서 낚시를 하는 사람들, 잡은 물고기를 그 자리에서 팔기도 했다. )


20260219_080128.jpg ( 떠오르는 태양빛으로 빛나던 이스탄불 )


20260219_080350.jpg ( 다리 위에서 바라본 이스탄불의 아침 )


이젠 발걸음을 옮길 때였다.

다음 행선지인 그리스 아테네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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