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크로폴리스 박물관과 고고학 박물관을 찾아가다.
이번 여행은 사실 역사 여행이었다.
몇 년 전 이탈리아 로마를 보고 나서 언젠가 그리스 아테네를 꼭 가서 보리라 마음먹었었다.
두 곳은 서양 문명의 원형이니까.
반면 아들은 산토리니의 Oia 마을을 가고 싶어 했다.
사진 속 절벽 위의 흰 건물과 푸른 바다는 아마추어 사진작가에게는 매력적인 장소였다.
우리는 아테네에서 이틀, 산토리니에서 이틀, 그리고 다시 아테네에서 이틀을 보내기로 했다.
우리가 처음 묵었던 아테네의 숙소는 아크로폴리스 박물관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지나다녔는지 반들반들해진 돌바닥 길, 차량통행이 금지된 좁은 길 옆으로 이어진 이층높이의 건물들, 먼 옛날 아테네의 어느 유력자가 살았음직한 건물을 호텔로 개조한듯한 숙소, 그 숙소의 베란다에서 보이던 아크로폴리스...
숙소 문밖을 나서면 바로 있던 레스토랑에서 우리는 오믈렛과 커피로 아침을 먹고 아크로폴리스 박물관으로 갔다. 박물관은 걸어서 십 분도 채 안 되는 거리에 있었다. 아침 일찍 서둘렀음에도 박물관에는 벌써 많은 관광객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오후에 방문할 고고학 박물관이 그리스 전역에서 출토된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다면 아크로폴리스 박물관은 아크로폴리스 언덕에서 나온 유물들이 집중적으로 전시되고 있단다.
무엇보다도 눈길을 끈 것은 파르테논 신전의 좌측에 있던 에레크테이온 신전에서 떼어온 다섯 개의 여인상이었다. 신전을 떠받치고 있는 여인상은 모두 6개인데 5개는 이곳 박물관에 놓여있고 하나는 영국의 박물관에 있다고 한다. 실제 신전에 있는 것들은 모두 모사품이라고 한다.
박물관에 전시되어있는 조각상들은 하나하나 놀라울 정도로 정교하고 생동감이 있었다. 한가지 재미있는 것은 조각상, 특히 여신이나 여인상에서 길거리에서 마주치던 젊은 그리스 여성들의 얼굴이 보인다는 점이다.
갸름한 얼굴형, 곱슬머리, 큰 코는 거의 모든 인물 조각상의 특징이었다.
자신과 자신들의 삶을 조각상에 담은 사람들이 바로 '그들'이었고 '그들'의 후손들이 지금까지 그곳에 살고있다는 사실이 작은 감동을 주었다.
역사는, 문명은 그렇게 이어져 나가다 어느 날 동방의 낯선 이방인인 나에게 다가와 손을 잡아주었다.
박물관 내부를 다 둘러보고 나면 건물밖으로 나가 건물의 지하층에 보전되어 있는 고대 아테네의 주거지 유적을 볼 수 있게 되어있다. 기원전 4세기부터 기원후 7세기 사이의 주거 지역이라는데 방과 건물 내부를 알 수 있는 집터와 목욕탕, 화장실 등을 볼 수 있다. 그중에서도 배수시설로 보이는 것들이 유독 눈에 띄었다. 목욕탕 시설을 설치하려면 배수와 하수 처리가 관건이었을 텐데 그 시대에 그런 상하수도 설비를 갖추고 살았다는 게 놀라웠다.
박물관 관람을 마치며 한 가지 아쉬웠던 점은 안내 데스크에 프랑스어, 독일어로 된 팸플릿은 있는데 영어 팸플릿이 준비 되어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영국이 유럽연합에서 탈퇴한 탓일까?, 아니면 영어권 방문객들이 많지 않아서일까?
우리 앞에서 단체로 이동하던 일본 관광객들에게 유창한 일본어로 설명하던 그리스인 가이드가 낯설었던 것만큼 영어 팸플릿이 없다는 게 의아했다.
정오가 훌쩍 지나도록 박물관을 둘러본 우리는 다음 박물관으로 가기 전 숙소로 가서 잠시 쉬기로 했다.
국립 고고학 박물관은 숙소에서 삼십여분을 걸어가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든 계획에는 항상 변수가 있는 법. 아뿔싸, 잠시 쉬기로 한 것이 깜빡 졸다가 훌쩍 두 시간을 넘겨버렸다.
게다가 2시 30분이 넘어 찾아간 고고학 박물관은 하필 그날은 3시 30분에 문을 닫는단다.
매주 그 요일에 그렇게 일찍 문을 닫는 것인지, 아니면 특별한 이유로 그렇게 일찍 문을 닫는지는 몰라도 겨우 한 시간 관람이 가능했다.
아무리 서둘러 보아도 세 시간은 걸린다는 고고학 박물관을 주마간산식으로 한 시간 동안 봐야 한다고?
어이가 없었지만 사전에 체크하지 못한 우리의 실수인걸 어쩌랴.
폐장 시간이 가까워서 그런지 줄어든 관람객 사이를 누비며 나는 서둘러 1층과 2층의 유물들을 관람했다.
박물관에 입장하자마자 관람객을 압도하는 아가멤논의 황금 마스크를 비롯한 미케네의 황금 유물들, 지금 사용해도 이상하지않을 정도로 세련된 장신구들, 동전들, 무려 BC3000년경부터의 도자기 유물에서부터 사진에서 많이 보았던 청동 말과 소년상(아르테미시온의 기수), 대리석으로 조각된 헤라클레스 등 신화의 인물들, 화산폭발로 땅속에 묻혔다가 발견되거나 강과 바닷속에서 건져올린 고대 그리스인들의 삶과 이야기가 담겨있는 도자기와 벽화들...
도저히 한 시간 안에 담아낼 수 없는 그리스의 유물들을 보면서 우리는 산토리니를 다녀온 뒤 고고학 박물관에 다시 오기로 마음먹었다.
누구든 아테네에 간다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국립 고고학 박물관을 찾아가는 일일 것 같다.
나는 그곳에서 그리스의 반도와 연안의 수많은 섬들 속에서 피어났던 인간의 삶과 이야기가 신화가 되고 전설이 되었던, 그렇게 서구 문명의 원형이 되었던 고대 희랍인들의 삶을 만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