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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강 Aug 01. 2020

만남보다 어려운 일, 헤어짐

직원 둘, 할머니 한분과 힘들게 헤어지다.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게다가 만난 사람과 서로의 마음을 주고받으며 친근함을 나눈다면 더없이 즐거운 일이다. 하지만 그랬던 사람들과 헤어지는 것은 힘든 일이다. 더더군다나 별것 아닌 일로 헤어져도 힘들 텐데 와장창 퉁탕 막장 드라마를 겪으며 헤어지고 나면 마음의 상처가 크게 남는다.


노인케어시설을 운영하며 몇 년간 동거 동락했던 직원과, 할머니 한분과 동시에 헤어졌던 쓰라린 경험은, 나에게 큰 생채기와 함께 인생의 교훈을 남겼다.


사람들은 선한 존재도 또는 악한 존재도 아니며 다만 개인적 삶의 욕망과 처한 상황에 따라 갈대처럼 흔들리는 존재라는 교훈 말이다.


두 분의 케어기버가 있었다. 둘이서 호흡을 맞추어 식사와 케어를 잘 감당해주고 있었다.

그 두 사람과 특별히 친했던 한 분의 할머니. 

사실 그 할머니는 우리 같은 장기요양시설에 올만한 컨디션은 아닌 분이었다. 가벼운 수술한 것을 기회로 아예 노인 아파트에서 공동생활시설로 오신 영리한 분이다. 그분은 건강하게 활동하는 분이라 데이케어에도 다니고 우리 시설에서도 자신의 집처럼 활기차게 지냈다.

특히 주방일은 거의 주방보조처럼, 아니 시어머니처럼 관여했다. 

이를테면 두 직원과 할머니 한분이 지나치게 친하게 지내고 있었던 거다.


어느 날 직원 중 한 사람이 퇴사를 하게 되었다. 고등학교에 진학하는 아이를 라이드 하기 위해서였는데 그녀의 근무시간을  조정해주기 어려웠던 나는 퇴사하는 그녀를 다른 시설로 추천해서 본인이 원하는 시간대에 일할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문제는 거기서부터였다. 나는 그녀 대신 새로운 직원을 찾으면 되리라 가볍게 생각했다. 신문에 광고를 내고 몇 사람 면접을 보고. 그런데 적절한 사람을 찾기가 어려웠다. 새로운 직원을 찾는 동안 부족한 일손으로 두어 주를 끌고 나갔다. 이 소리는 내가 풀타임 워커로 일을 해야 한다는 소리였다. 


게다가 그때는 새로운 시설을 하나 더 셋업하고 한두 명 어르신의 음식을 한쪽에서 만들어 전달하고 있던 때였다. 그러자 남은 한 직원의 불만이 커져갔다. 기실 그녀는 다른 곳으로 간 직원의 상황을 자신과 비교를 하고 있었던 것 같다. 이를테면 자신보다 이직한 직원을 부러워했던가보다. 내가 그동안 더 오래 근무해온 자신을 더 많이 배려해 근무시간을 자기를 중심으로 조정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사사건건 불만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언젠가부터 내 말에 건설적 이견 제시가 아니라 감정적 반응을 하기 시작했다. 의사소통이 껄끄러워지면서 관계가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다 어느 날 그녀가 선을 넘어버렸다. 

3년 동안 쌓아온 신뢰와 협조가 한순간에 와장창 깨져버렸다. 

그동안도 비슷한 문제가 두어 번 있었지만 그때마다 대화로, 또 이해로 풀어나갔었던 나였지만 더 이상은 감당하기 어려웠다. 한 달간의 노티스를 주고 다른 일을 찾아보도록 권했다. 


그 한 달간 그녀는 투명인간처럼 자기 일만 하다가 사과 한마디 없이 그만뒀다.

그녀가 마지막 날, 끝내 사과하지 않고 그만두던 날,

창가에 앉아  스러져가는 석양을 바라보면서 느꼈던 인간에 대한 실망과 비애는 지금도 내 마음을 아프게 한다.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창밖을 쳐다보며 힘들어하던 나를 위로하고 격려하던 그 할머니.

그 할머니는 자기와 친했던 직원 둘이 모두 그만두는 상황이 되자 다른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사실 어르신들 누구나 시설을 옮길 권리와 자유가 있다. 한 달 노티스만 한다면.

그런데 할머니는 직원들이 한 달 간격으로 그만둔 며칠 만에 다른 시설로 옮기겠다고 통보했다.

내가 퇴사하는 직원들 때문에 힘들어하고 새로운 사람을 못 구해서 안절부절못하고 있을 때, 한편으로는 등을 두드려주고 나를 위로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옮겨갈 시설을 남모르게 알아보고 계셨던 거다.


할머니는 그동안 우리 시설에서 자기가 너무 설치며 많은 잘못을 했기 때문에 다른 곳으로 가서 기도하면서 참회해야 한다고도 했고, 자기 때문에 직원들이 그만두게 되어 이곳에 있을 수 없노라는 황당한 변명을 해대며 자신을 잡지 말아 달라고 하셨다.(할머니는 이렇게 옮겨간 그곳에서 한 달 만에 다시 다른 곳으로 옮겨갔고, 그곳에서도 내게 다시 그분을 받아주면 안 되는지 연락이 왔었다. 인간에 대한 신뢰에 큰 상처를 받은 나는 거절했었다. 결국 그분은  서너 달 동안 여기저기를 옮겨 다니다 요양시설을 나와 다시 노인 아파트로 갔다.)


이미 레프트훅을 맞아 휘청거리던 나는 정통으로 라이트 훅을 맞고 링 모서리에 기대어 숨을 골라야 했다.

그동안 몇 년간 그들 스스로 '가족'이라고 말하며 친밀하게 지냈던 사람들의 돌변한 태도에 감당할 수 없는 좌절과 인간적 배신감을 느꼈다. 

누구보다도 할머니의 태도는 나에게 절망감을 주었다. 

90살이 넘은 나이에 너무나 건강하고 활발한 할머니는 나에게 외할머니처럼 친절하고 살뜰하기까지 했었다.

그런 할머니에게 나도 모르게 많이 의지했었던가보다. 나는 의지했었던 만큼 많이 아팠다.

그 할머니가 옮기겠다고 하고 머문 일주일 동안 나는 그 할머니를 쳐다볼 수도, 말을 섞을 수도 없었다.

할머니는 얼마 동안은 미안해하다가, 또 얼마 동안은 자신을 이해해주지 않는다고 화를 내다가 훌훌 털고 내 인생에서 걸어 나갔다.


내가 아무리 공정하게 대한다고 생각했어도 본인이 그렇지 않다고 느낀다면 그것은 어쩔 수가 없는 일인 것 같다.

그렇다면 그 만남은 끝내는 것이 답이다. 또한 상처 없이 헤어지는 것이 지혜이겠지만 그조차도 욕심이겠다.

지금이야 이렇듯 담담하게 말할 수 있지만 그때의 나는 한 조각의 마음도 갈급했었다. 내가 그녀를 든든한 동료로 옆에 두고 싶어 했던 것만큼, 그 할머니의 살뜰한 마음에 기대고 싶어 했던 것만큼 마음을 다쳤다.

결국, 누군가에게 마음을 준다는 것, 그 마음에 상처를 받는다는 것, 그것은 구체적인 어려움으로 내게 다가왔다.
나는 날카로워지는 신경과 두통으로 잠 못 드는 날들이 이어졌다.
갱년기 이후 경미하게 이어지던 불면증은 심해지고 고질화 되어 내 몸과 마음을 망가뜨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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