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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강 Dec 12. 2020

잃어버린 어머니를 하루만에 찾았다.

소설이 아니라 실제로 나에게 일어난 일.

' 엄마를 잃어버린 지 일주일째다.'


신경숙 소설, < 엄마를 부탁해 >의 첫 문장이다.

소설에서 주인공과 형제들은 잃어버린 엄마를, 진즉에 "잃어버리고"있었던 엄마를 찾아 헤매는 동안 수시로 "까마득히 잊고 있던 일들이"불쑥불쑥 튀어나오는 통에 어떤 생각에도 일분 이상 집중할 수가 없었다고 묘사되고 있다.

나도 어머니가 사라진 만 하루 동안 그랬다.

올해 85세이신 시어머니가 얼마 전 실종되는 일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국의 시누이로부터 연락을 받은 뒤 남편과 나는 만 하루 동안 어떤 일에도 집중할 수 없었고 온통 신경이 한국에 가있었다. 그러면서 어머니와 나와의 관계가 불쑥불쑥 튀어나와 내 마음을 힘들게 했다.

엄마에게 벌어진 일로 아들인 남편은 극단적인 경우까지 생각하며 초조해했고, 나는 나대로 두 주 전의 일을 생각하며 착잡한 마음으로 부디 무사히 돌아오시기를 기도했다. 

우리에게 남은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는 생각을 하면서.




내 시어머니 ㅂ여사는 특출한 분이시다. 젊은 시절의 외모는 배우 못지않게 세련되고 예뻤고 지역의 명문 여고를 나오신 분이시다. 그런 분이 오빠 대학동창인 문학청년 시아버지를 만나 연애결혼을 하셨다.

하지만 시어머니는 경제적으로 실패를 거듭하는 남편과 사이가 좋지 않았고, 급기야 남편에게 아이들을 맡겨둔 채 독일에 파독 간호원으로 가서 일하셨다. 그녀 나이 겨우 삼십 중반이었고 무려 6년간 동안이었다.


그런 가족사탓인지 시어머니의 자식사랑은 좀 남다르다.

시어머니의 자식사랑뿐이 아니라 남편이 어머니를 생각하는 마음도 각별하다.


연애할 때였다. 학군단 출신인 남편이 졸업을 하고 광주로 내려가기 전날이었다.

내일 아침이면 용산역에서 기차를 타고 광주 훈련소로 내려갈 남편과 나는 밤새 손을 잡고 걸었다.

아직 겨울이 가시지 않은 밤거리를 걷는 동안 몸은 점점 얼어갔고 우리 둘은 찬바람을 피해 변두리 기차역사의 구석을 찾아 앉았다. 한참을 앉아 서로의 체온에 기대 어느 정도 추위가 사라지자 남편은 주머니에서 무엇인가를 꺼내 내 손바닥에 쥐어주었다.

4월의 별자리,  황소자리 모양의 작은 펜던트가 있는 금목걸이였다.

그 목걸이는 4월생인 남편의 생일선물로 독일에 계시던 시어머니가 아들에게 보내준 거였다.

남편의 나이 열네다섯 살 때. 남편은 그 목걸이를 멀리 계신 어머니에 대한 사랑으로 간직했고 십 년 뒤쯤 만나 사랑하게 된 나에게 건네준 것이다.

그렇게 광주 훈련소로 내려간 남편은 A4용지 넉장에 걸쳐 어머니에게 장문의 편지를 썼다.

이제 사랑하는 사람을 찾았고 그 사람과 함께 하고 싶다는 내용의 편지였다. 

남편은 그 편지를 복사해서 나에게도 보내주었었다.


나는 남편과 시어머니의 깊은 사랑에 감동했다.  

그런 남편과는 결혼이라는 것을 하고 싶었다. 그리고 그런 시어머니라면 나도 그분을 사랑하고 존경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여성으로서 내 인생의 멘토 같은 그런 분일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가족이되어 지켜본 시어머니는 자식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더이상 성장시키지 못한 것 같았다.

6년간 유예되었던 자식에 대한 사랑은 성장한 자식들에게도 여전히 같은 코드로 전달되었고 자녀들과의 관계에도 부정적 영향을 미쳤다. 


한편 그런 어머니에게 며느리나 사위는 그냥 며느리고 사위였고 내가 낳은 자식만이 '자식'이었다.

언젠가 나를 너무 홀대한다고 느꼈던 나는 시어머니에게 울면서 이렇게 항변했던 적이 있었다.

"어머니, 그러시는 게 아니에요. 저도 밖에서는 존중받는 사람이에요."라고 말이다.

그러자 우리 시어머니는 분명한 어조로 "그래, 어떻게 내가 낳은 자식하고 며느리 하고 같냐?!"라고 하셨다.

맞는 말씀이셨다. 하지만 그날로 나는 나를 '며느리'로, 어머니를 '시어머니'로 분명하게 자리매김했다.

시어머니는 시어머니일 뿐, 격동기를 살아온 여성 인생선배로 내 곁에 계셔주실 것을 기대하지 않기로 했다.

그 뒤로도 어머니는 내 기대에 걸맞게 자신이 낳은 자식들에게는 넘치는 관심과 애정을, 며느리나 사위에게는 그저 무심한 시어머니나 장모로 사셨다. 


그런 시어머니와 시아버지에게 나는 '며느리'로서 충실하게 살았다.(고 스스로 생각한다.)

오래전 IMF로 모든 것을 잃은 때부터 시작된 그분들에 대한 경제적 부양을 나는 지금까지 해오고 있다. 그분들에게 생활비를 보내드리고, 병원에 입원하면 병원비를, 틀니가 필요하시면 그 비용을 도와드렸다.

나는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대치라고 생각했다. 만약 내 부모가 나이 들어 경제력을 잃고 어려우시다면 나 역시도 그렇게 했을 것 아닌가. 그리고 남편에게는 그만큼이 내가 할 수 있는 최대치라고 선언했다.

사실 글로 적기엔 너무 힘든 대화의 시간들이 있었지만 생략 하기로 한다. (지금 다시 끄집어내서 무엇하랴.)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남편은 나에게 자신처럼 시어머니에게 관심과 애정을 가져주기를 원했다.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남편과 그 문제로 갈등을 빚을 때마다 시어머니가 내게 했던 말과 행동들이 나의 발목을 잡았다. 그 문제는 우리 부부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였고 우리 관계의 성장을 가로막았다.

그래도 그렇게 세월이 흐르는 줄 알았다. 한 달 전, 그러니까 시어머니가 실종되기 두 주 전까지는.


최근 들어 시어머니의 초기 치매 증상이 두드러지기 시작했다. 거의 매일 화상통화로 두 분의 안부를 묻던 남편은 어느 날 통화를 끝내고는 내게 와서 이렇게 말했다.

"어머니가 자꾸 며느리는 어디 있느냐고 묻는데 대답하기가 아주 궁했어. 당신 계속 이러면 나중에 아이들도 똑같이 당신에게 그럴 거야." 

뭐라고???, 이 무슨 악담인가. 

아마도 병들어가는 노부모에대한 안타까움과 슬픔이 나에대한 분노로 표현된듯했다.

하지만 부부싸움의 고수인 나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나는 그분들과 다르고, 아이들에게 기대하는 것도 없거니와 나는 내 노후를 준비하고 있다"는 말로 그의 악담을 받아 넘겨버렸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동안 나를 옥죄고 있던 일들이 더 이상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시어머니의 치매 앞에서는.


마침 집에 들른 눈치 빠른 아들이 무슨일이 있는거냐고 물어 나는 하는수없이 자초지종을 설명해야했다.

늘 우리 부부의 다툼에서 객관적 사실을 가지고 피드백을 할뿐 편드는 일이 없는 아들이 한마디했다. 

"더 이상 과거에 매여 살지 마세요. 친부모와 아내 사이에서 괴로움을 겪을 아빠를 생각하세요. 나라도 많이 힘들 거예요. 그리고 엄마는 그럴 능력이 충분한 분이니 오늘 당장 시작하세요. 할머니 치매이시잖아요."

아들과 대화하는 중에 나는 너무 담담한 나를 보면서, 더 이상 화를 내지 않고 있는 나를 보면서, 내가 이미 그분들을 용서하고 있다는 것을, 아니 더 이상 배척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날 바로 화상통화를 시작했다.


시어머니는 당신에게서 멀어진 며느리를 되찾고 싶으신 것 같았다. 내가 어린 신부일 때 든든한 인생의 버팀목으로 그녀 곁에 있고 싶었던 것처럼 시어머니는 노인이 되고 기억이 희미해지기 시작하니 내 시선안에 머물고 싶으신 것 같았다. 화상통화로 시어머니의 일상을 챙기고 컬러링 숙제를 내주고 칭찬해주는 나와의 대화는 시어머니에게 일상의 생기를 더해주고 작은 기쁨과 안녕을 주고 있었다.


그렇게 두 주 동안 다시 시작된 대화를 통해 관계 회복을 해가던 중이었다. 

바로 그때 어머니의 실종사고가 일어난 거다.

어머니는 만 하루를 배회하시다가 계단에서 굴러 왼쪽 얼굴을 다치는 사고를 당하신 채 집으로 돌아오셨다.

당신 스스로 당황하고 어쩔 줄 몰라하는 어머니를 보면서 별일 아닌 것처럼 다독이고 안심시키면서 나는 감사기도를 했다. 

큰 사고 없이 집으로 돌아올 수 있게 된 것을, 그리고 비록 두 주 전일지언정 그녀를 다시 받아들였던 것을.


요즈음은 다시 건강해진 모습으로 매일 화상통화를 하고 있다. 어머니는 자기가 얼마나 멋지게 색칠을 해냈는지 아들보다도 나에게서 칭찬을 받고 싶어 한다. 아마도 직장인으로 묵묵히 일하며 아이들을 키우던 젊은 나를 부러워했었는지도 모르겠다. 어느 순간부터는 그런 나와 가까워지고 싶어 했는지도 모르겠다. 

마치 젊은 날의 내가 그녀를 그렇게 보았던 것처럼.




신경숙의 소설 속 화자는 이인칭이다. 

주인공격인 '너'는 '너'로 불리면서 소설이 끝나는 순간까지도 나를 몹시 불편하게 했다. 

'나'도 아니고 '그, 그녀'도 아니고 '너'라니....

책 말미의 해설 같은 현학적 설명이 아니어도 '너'라는 소설 속 장치는 나로 하여금 노쇠해가는 부모를 예전의 힘 있던 부모의 위치에 그대로 두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일깨운다.


그들도 젊은 시절이 있었고 불완전했으며 실수투성이었다는 것을, 그것에 한때 젊은 내가 상처를 받아 아팠었다는 것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그 조차도 더 이상 붙들고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화려한 색깔로 그린 컬러링북을 컴퓨터 화면에 가까이 들이밀며 어머니는 "나 잘했지?"를 반복하신다.

나는 그런 어머니에게 엄지 척을 해드리며 "아주 잘하셨다."라고 칭찬해드린다. 

그러자 어머니가 깔깔 웃고 좋아하며 그러신다. "나 이래뵈도 똑똑한 여자여~~"

"그래요. 우리 어머니 똑똑하고 멋진  ㅂ여사시지."


                                               ( 에펠탑앞에서의 어머니와 34년뒤의 손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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