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우리끼리 살아볼게요.

아이들을 위해 분가하기로 했다.

by 유강

퇴근해서 막 집으로 들어가려던 순간이었다.

기역자로 꺾인 계단을 올라가다 나는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안에서 시어머니가 딸아이를 혼내는 소리를 들은 거다. 현관문이 닫혀있어 무슨 일로 아이를 혼내는지는 알 수 없으나 화가 난 시어머니의 하이톤 목소리만으로도 가슴이 철렁한다.

나는 크게 호흡을 하고는 다시 계단을 올라가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려다말고 또다시 얼어버리고 만다.

"저년, 저년, 저 눈 좀 봐, 에미눈 닮아가지고."

어머니가 딸아이에게 하는 욕설을 듣고 그만 나는 한참을 얼어버린 채 한걸음도 떼지 못한다.




나의 시집살이가 정식으로 시작된 것은 남편이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시아버지의 회사 한구석에서 자기 사업을 시작하면서였다.

지방에서 다시 서울로 올라온 우리는 신도시 일산에 살고 있었는데 시어머니는 서로 간에 도움이 될 거라며 들어와 살 것을 강권하고 있었다. 내키지 않는 마음에 처음에는 시댁 근처로 이사를 갔다가 일 년 만에 기어이 시댁으로 들어가야 했다.

그때만 해도 "네가 퇴근하고 왔을 때 저녁밥이라도 준비되어 있으면 얼마나 좋겠냐?"라는 시어머니의 말을 순진하게도 곧이곧대로 믿었다.

무엇보다도 큰아이가 학교를 마친 뒤 텅 빈 집에 제 손으로 잠긴 문을 열고 들어가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과 아직 어린이집에 다니기에는 어린 둘째를 할머니들에게 맡기고 출근할 수 있다는 사실에 다른 것은 생각지 않고 시댁으로 들어갔었다.




어느 날. 퇴근해서 들어선 현관 앞에서 나는 기가 막힌 모습에 억장이 무너졌다.

거실 한편에 놓여있던 식탁 앞에 둘째 아이가 혼자 앉아서 놀고 있었다.

아이는 퇴근해 돌아온 나를 보고 벌떡 일어나 나에게로 달려오려고 하였으나 제 몸을 묶고 있는 끈 때문에 나에게 가까이 다가올 수가 없었다.

아이는 넥타이 서너 개로 만든 줄에 허리를 묶인 채 강아지처럼 식탁 다리에 묶여있었다.

내가 퇴근해 들어오는 소리를 들은 (남편의) 할머니와 이모할머니는 자신들의 방문을 벌컥 열어젖히면서 "이제 오냐?"라고 천연덕스럽게 웃으며 나를 맞으셨다.

깜짝 놀란 나는 얼른 뛰어들어가 아이의 허리에 묶인 줄을 풀고 아이를 안아 들었다.

그리고 할머니들에게 화가 나서 큰소리로 물었다. "누가 이렇게 아이를 묶어놓으셨어요?"


시아버지 회사에서 한 역할을 하시던 시어머니는 밥만 먹으면 공장으로 달려가고 둘째 아이의 돌봄은 두 할머니들 몫이 되었다. 하지만 이미 90대와 80대 말이셨던 두 분은 세 살짜리 아이의 뒤꽁무니를 쫒아다니기에는 뜀박질은 그만두고 걸음걸이도 힘에 부쳤다. 세 살배기 돌보기에 지친 두 할머니들은 궁여지책으로 아이를 식탁 다리에 묶어놓기로 한 거였다.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할머니들의 상태를 아는 나는 그분들만을 탓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아이가 하루 중 얼마 동안이나 묶여있었는지, 그동안 얼마 동안이나 아이를 묶어놓았었는지 알 수 없었던 나는 그다음 날부터 아이를 데리고 출근하기로 마음먹었다.

아직 나이가 어려서 안된다는 어린이집 원장에게 발이 손이 되도록 빌면서 부탁을 하고(지금 같으면 안 될 일이었겠지만), 마침 운전석 스프링이 내려앉아 새 차로 바꾸며 버리려는 은사님의 낡은 차를 그날로 가서 얻어왔다. 그렇게 아이를 데리고 출근하는 일상이 시작되었다.




시어머니는 욕심이 많으신 분이시다.

시어머니는 네 분 노인들만 사는 집에 우리 네 식구가 들어오면 여러모로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한듯하다.

경제적으로는 말할 것도 없고 자신이 좋아하는 큰아들과 손주들은 자신의 삶을 생동감 넘치게 해 줄 것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그 가족의 중심에 나라는 며느리가 있다는 것은 간과하신듯했다.

아니 어쩌면 며느리는 그 대가족이 필요로 하는 엄청난 가사를 소리 없이 처리해줄 우렁각시가 되어줄 것을 기대하셨었는지도 모르겠다. 본인도 알아채지 못한 채 말이다.

하지만 나도 할 일 많은 풀타임 직장여성 아닌가.

내 가족 챙기기에도 역부족인 내가 일하시는 시부모와 시할머니들에게 시간과 에너지를 나눠드리기에는 언감생심, 불가능했다.


그러자 시어머니와 내 관계가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나는 나대로 "다 되어있는 저녁밥"을 기대했다가 저녁밥조차 퇴근한 내가 챙겨야 하는 상황에 화가 나기 시작했고, 시어머니는 당신 입으로 그런 말을 했을지언정 지금은 상황이 어려워졌으니 "며느리가 해야 할 바"를 해야 하지 않느냐고 나에게 화를 내기 시작했다.

그 결과였다. 딸에게 "에미 눈"운운하며 막말을 하신 것은.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자 당황한 시어머니는 딸의 잘못을 일일이 열거하며 왜 혼내고 있었는지를 설명하려 하셨고 딸은 나를 바라보자 억울함이 터져 나와 와앙하고 울음을 터뜨리며 제방으로 가버렸다.

그 순간 마음이 정해졌다. "그래, 여기서 나가자. 여기서 내 아이와 우리 가족을 구하자."


시댁으로 들어가며 전세금으로 드렸던 돈도 포기하고 일사천리로 분가를 진행했다.

마음을 정하고 어른들께 이야기를 하자 별말씀이 없었다. 그 말은 그분들도 우리 식구들로 북적대는 대식구가 힘에 부쳤다는 소리 일터였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에 대한 기대를 조금씩 접고 각자의 경계 안으로 되들어갔다. 물론 서로 원수가 되어 헤어지는 것은 아니었기에 가까운 곳에 우리만의 공간을 마련하고 언제든지 원할 때 서로 오고 갈 수 있도록 했다.




그 뒤로 아이들은, 특히 큰애인 딸은 점점 안정적이 되어갔다.

동생에게 덜 짓궂게 굴었고, 내가 없는 동안 동생을 챙기고 동생과 잘 지내려고 애를 썼다.


우리 가족은 우리 가족만의 새로운 패턴과 문화를 만들어나갔다.

내가 일을 하는 주중이면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학교와 학원을 오가며 스스로 할 일들을 했고 저녁에 만나 조잘거리는 아이들 이야기를 들으며 저녁 준비를 함께 했다.

일요일 아침이면 크림치즈와 딸기잼을 바른 모닝롤과 양송이 수프, 삶은 계란과 베이컨을 곁들인 서양식 아침식사를 먹으며 재잘거렸고 오후가 되면 뒷동산에 올랐다.


지금 되돌아보건대 내가 잘한 일중의 하나가 바로 갈등이 증폭되던 시점에 시댁으로부터 분가했다는 것이다.

나는 시어머니와 나와의 문제가 아이들에게 전이되고 투사되는 것을 간과할 수가 없었다.

어머니가 나에게 어떤 기대를 했든, 내가 어머니에게 어떤 기대를 하고 실망을했든 그것은 어른들인 우리들의 문제이다. 그 문제가 아이들에게 여과 없이 그대로 영향을 미치는 것은 부모로서 내가 내 역할을 못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내 아이는 자신이 한 잘못된 행동으로만 꾸중을 들었어야 했다.

내 아이가 나를 향한 감정의 방패막이가 되게 해서는 안되었다.

그렇게 나는 내 아이를 힘든 환경에서 구할 수 있었고 아이와 할머니와의 관계도 구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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