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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강 Apr 09. 2021

고흐의 죽음이 타살이라고?

책 < 진실을 읽는 시간>에서 들려주는 불편한 이야기

"때로 죽음은 전설이 된다.

죽음은 장의사와 법의학자만큼이나 신화 작가나 시인의 영역이다. 때로 우리 인간은 죽음에 낭만적인 감정, 다시 말해 죽음의 암울함마저 초월하는 의미를 부여한다. 삶이 죽음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일까, 아니면 죽음이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일까? 우리가 이야기를 전하기 시작한 이래로 두 가지 모두 정답이었다. 이야기의 주인공이 아킬레우스, 클레오파트라, 예수 그리스도, 테르모필레 전투의 스파르타인들, 차르 니콜라이 2세, 존 F. 케네디.... 또는 트레이본 마틴이든 누구든.

내게 죽음은 더욱 일상적이다. 요즘에는 얼마나 많은 사람이 멋지게, 유의미하게 목적을 품고 죽을까? 우리는 대부분 링거 줄이 꼬여 있고 지저분한 시트가 덮인 병원 침대에서 홀로 죽는다. 우리는 우리의 죽음이 심오하기를 바라지만 대개는 그렇지 못하다. 1,000가지의 이기적인 사유로 산 사람들은 죽음이 진실보다는 그들의 두려움에 부합하는 의미를 부여한다.

그리하여 죽음은 신화가 된다.

고통받은 천재 빈센트 반 고흐가 그러했다." 

- <진실을 읽는 시간>, 빈센트 디 마이오. 론 프란셀 지음, 윤정숙 옮김. pp 333-334.




이 책의 저자인 빈센트 디 마이오는 법의학자이다. 원인을 알 수 없는 죽음이나 살인과 같은 죽음에서 죽음의 진실을 찾기 위해 퍼즐을 맞추는 의사이다. 주검을 부검하고 현장 조사하고 '왜 그리고 어떻게'죽었는지를 규명해서 그 죽음의 진실을 밝혀내는 사람이다.


이 책에는 평이하지 않은 많은 죽음들이 등장한다.

편의점에 다녀오다 백인 자경단원과 마주쳐 총에 맞아 죽은 흑인 소년부터 수많은 아기들을 질식시켜 죽음에 이르게 한 아기 엄마, 아무도 몰래 약물을 주사해서 아기들을 죽인 간호사, 파산을 감당 못해 타살로 위장한 자살, 내가 살고 있는 지역에서 벌어진 흑인 과격분자들의 차폭발사고까지 법의학자로서의 삶에서 마주한 낯선 죽음들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그중에서도 가장 드라마틱한 것은 빈센트 반 고흐의 죽음이다.

우리는 고흐가 정신질환을 앓았던 천재 화가로 자신의 귀를 잘랐던 것처럼 삶도 스스로의 손으로 마감한 것으로 알고 있다. 

권총 자살.

우리가 알고 있는 고흐의 죽음이다.


1890년 7월의 어느 날.

머물던 여인숙에서 나와 벌판에서 미친 듯이 그림을 그리던 빈센트는 저물녘에 빈손으로 여인숙으로 돌아온다. 아픈 듯이 신음소리를 내는 빈센트에게 여인숙 주인이 다가간다.

그는 피가 조금씩 새어 나오는 옆구리의 작은 총상 구멍을 보여주며 말한다.

"내가 그랬어요."


두 명의 의사들이 왕진을 왔다가 갈비뼈 아래 왼쪽 옆구리에 있는 총상을 보고는 붕대만 감아주고 그냥 가버린다. 그들은 총알을 빼 달라는 빈센트의 요청을 외과의사가 아니라서 받아들일 수가 없다.

다음날 경찰관 두 명이 찾아와 빈센트에게 자살할 생각이었냐고 묻는다.

빈센트는 "네, 그런 것 같소."라고 대답한다.


빈센트는 그날 저녁 동생 테오를 만난 몇 시간 만에 감염 증상이 찾아오고 새벽 1시 반에 죽는다.

"이렇게 죽기를 바랐어... 슬픔은 영원하지 않을 거야."라고 빈센트는 동생에게 속삭였다.


빈센트의 죽음을 지켜본 사람들의 증언으로는 그것은 '자살'이었다.

"내가 그랬다"라고 했고, "내가 자살하려고 그런 것 같다"라고 했고, "이렇게 죽기를 바랐다"라고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흐에 대한 글을 쓰던 스티븐 나이페와 그레고리 화이트 스미스는 그의 어설픈 자살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다가 법의학자인 저자에게 연락을 한다. 고흐의 죽음이 정황상 자살이 아니라고 주장하던 네이페와 스미스에게 과학적인 증거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저자는 123년 전의 죽음에 대해 몇 가지 근거를 가지고 그것은 자살이 아니었다고 말하고 있다.

우선 오른손잡이인 고흐의 총상은 갈비뼈 아래 왼쪽 옆구리에 있었다. 자살하기엔 이상한 위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다고 치자. 

그가 오른손으로 쏘았든 왼손으로 쏘았든 손바닥에 화상을 입게 되어 있다.

하지만 테오도, 두 의사도, 두 경찰관도, 그 누구도 그런 화상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또 자살이라면 어느 경우든 총구는 그의 피부에 직접 닿거나 5센티미터 이내에 있어야 한다. 저자는 빈센트의 총상에서 화약의 흔적이나 화상이 없다는 것은 총이 적어도 50센티미터 이상 떨어진 곳에서 발사되었다는 뜻이라고 한다.


그러면 정황상, 과학적 증거상으로도 자살이라고 보기 어려운 고흐의 죽음을 왜 우리는 여전히 자살로 받아들이고 싶어 하는가?

천재 화가 고흐의 죽음의 방식이 이미 위대한 전설의 일부가 되었기 때문이다.


저자는 말한다.

"빈센트 반 고흐는 자살하지 않았다. 누가 왜 그를 쏘았는지는 모른다. 빈센트가 죽고 싶어 했는지 어땠는지도 모른다. 그가 죽음을 두려워했는지, 아니면 기꺼이 수용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의 죽음은 단순한 사고사 일지 모른다. 때로는 논리조차 답을 주지 못한다. 난 인간의 심장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모른다."라고. 




현재 미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법의학자는 500여 명뿐이라고 한다.

왜 안 그렇겠나. 그 힘든 의사로서의 훈련을 마친 뒤 '죽음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매번 '죽음'을 마주해야 하는 힘든 일을 누가 쉽게 선택할 수 있을까?


하지만 저자는 '밝혀내야 할 죽음의 진실'을 밝혀내는 일로 죽은 자와 마주한다.

그의 소명은 그 죽음이 드러내고 있는 진실을 밝혀내는 것이다.

영혼이 떠나고 남은 겉껍질일 뿐인 시신이 말해주는 진실 말이다.

저자는 감쪽같은 수법으로 은폐된 죽음의 진실을 드러내 더 이상 무고한 죽음이 계속되지 않게 한다.

사랑하는 사람의 자살을 인정하기 힘든 가족들에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타살이 아니었음을 알려준다.

총을 쏘고 총을 맞는 순간 그들은 어떤 모습이었는지를 규명해서 사건의 진실이 무엇이었는지 드러내준다.


그러나 작가가 정말 하고 싶은 말은 과학적 규명으로 드러나는 진실과 함께 수면으로 떠올라오는 우리의 드러내고싶지않은 민낯이지 않았을까?

아기들의 입을 틀어막고 약물을 주입해서라도 해프닝을 만들고 세상의 이목을 끌고 싶은 인간 욕망의 악마성,

흑인, 백인, 불법 이민자들과 같은 인종적 편견과 그 편견이 죽음조차도 왜곡시키는 진실들.

죽음을 앞에 두고서도 우리가 믿고 싶은 대로, 우리가 보고 싶은 대로만 보려는 우리의 '불편한 진실'들


작가의 의도대로 일반적이지 않은 죽음들을 통해서 드러나는 우리들 삶의 적나라함이 무겁게 내려앉는다.

더불어 우리 주변에서 흔히 일어나는 죽음처럼 병고와 노환으로 죽음을 맞는 것이 얼마나 죽음다운 죽음 인지도 새삼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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