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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천 Aug 04. 2021

13. 밥 친구와 작별하고

[9288km] 바이칼 호수 → 이르쿠츠크, 2018년 8월 7일

아침을 먹고 있는데 고양이가 찾아왔다. 매일 저녁 내 밥을 뺏어먹고선 배를 채울 만큼 채웠다 싶으면 쌩하니 모르는 척하던 녀석이다. 조식 메뉴엔 자기가 먹을 게 별로 없는 걸 알고 있을 테니 또 식당 문지방에서 뚱한 표정으로 식빵이라도 굽겠지 했는데, 어슬렁어슬렁 내 쪽으로 다가와선 다리에 몸을 비비적거리며 친한 척을 했다. 그리고 내가 아침 먹는 걸 한동안 심드렁하게 지켜보더니 이내 또 어딘가로 사라졌다.


이제 헤어질 때가 된 것 같으니 그동안 고마웠다고 인사라도 하러 온 걸까. 아니면 밥 잘 챙겨주는(옆구리에 딱 붙어서 칭얼거리길래 안 줄 수가 없었지만) 녀석이라 마음에 들어서 앞으로도 잘 부탁한다고 말하러 온 걸까. 후자 쪽이라면 너무 서운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오늘 다시, 이르쿠츠크로 돌아간다.

돌아갈 때는 마을버스보다 조금 작은 감이 있는 승합차에 나와 내 룸메이트를 포함한 예닐곱 명 정도가 같이 타고 갔다. 승합차 기사 아저씨께서 2차선 도로 위를 폭주하며 폰으로 문자까지 보내던 바람에(못해도 최고속도 150km/h는 넘었을 게 확실하다) 오는 내내 잔뜩 긴장해야 했지만, 다행히 이르쿠츠크에 도착할 때까지 별 일은 없었다. 룸메이트는 그새 나보다 영어가 훨씬 잘 통하는 어느 러시안 커플과 더 친해진 것 같아 보였다. 솔직히, 조금 섭섭하긴 했다.


이르쿠츠크 버스 터미널 앞에서 그들과 작별 인사를 나누고, 바이칼 호수로 가기 전에 묵었던 호스텔에 다시 체크인하고 짐을 풀고 나서 빨래를 맡겼다. 이르쿠츠크 시내에 나가서 내일 아침 먹을거리를 사고, 돌아오는 길에 러시안이 운영하는 중화 요릿집에서 볶음밥, 꿔바로우, 오이로 만든 처음 보는 반찬, 아메리카노라는 다소 희한한 조합의 저녁을 먹고 돌아와 공동 주방 식탁에서 디저트로 체리 젤리를 먹었다. 여행 중엔 아무리 배부른 저녁을 먹어도 숙소에 돌아오면 꼭 뭔가 아쉬워 군것질거리를 찾게 된다.


내일 밤, 다시 시베리아 횡단 열차에 올라타 모스크바로 향한다. 열차에 타기 전까지는 이르쿠츠크 시내를 산책할 생각이다. 맡겨둔 빨래가 내일 오전까지 다 말라야 할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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