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원천 Aug 03. 2021

12. 당신의 미소를 의심해서 미안했어요

[9288km] 바이칼 호수, 2018년 8월 6일

가끔 어제 본 장면이 잔상처럼 눈앞을 지나가 마음이 불편할 때가 있었다. 그것 빼고는, 평화롭게 지나간 올혼 섬에서의 마지막 날.


아침부터 비가 내려 하루 종일 실내에만 있어야 하나 걱정했지만, 어제 투어 중 만난, 박사 과정 공부 중이셨던 한국인 아저씨와 함께 숙소 식당에서 아침을 먹고 작별 인사를 나눌 때쯤 다행히도 비가 잦아들었다. 독일에서 온 룸메이트가 투어를 떠난 후, 느긋하게 방에서 나와 며칠 동안 늘 그랬듯 부르한 바위 주변 강가를 산책했다. 주말이 지나가서인지 사람들이 왠지 평소보다 적은 듯해 더욱 평화로웠던 날이었다.

절벽에서 한동안 멍하니 경치를 구경하던 참이었다. 누군가가 뒤에서 내 어깨를 두드렸다. 등 뒤를 돌아보니 어떤 러시안 청년이 나를 한번 가리키고는, 자기 손에 있는 무언가를 가리켰다. 절벽을 구경하던 내 뒷모습을 찍은 폴라로이드 사진이었다. 그는 해맑게 웃으며 사진을 나에게 내밀었다. 선물로 주겠다는 의미라는 거야 쉽게 알 수 있었지만, 나는 선뜻 받지 못하고 경계하며 망설였다.


유럽과 아프리카를 떠돌던 100일 동안 좋은 사람도 만났었고 나쁜 사람도 만났었다. 아무 이유 없이 웃으며 다가와 호의를 베푸는 사람 중에는 나쁜 사람이 더 많았다. 들뜬 표정으로 어리바리하게 낯선 여행지를 둘러보던 어리숙한 여행객을, 그들은 단숨에 알아봤다. 곤란한 일을 몇 번 겪으면서, 낯선 곳에서 의도를 알 수 없는 호의를 덥석 받았다가는 대가를 치르게 될 수도 있다는 걸 배웠다.


뭘 원하는 건지, 이건 또 무슨 종류의 함정인지. 그가 사진을 내밀고 있는 짧은 시간 동안 온갖 생각이 다 들었다. 예의상 지은 어색한 웃음만으로는 감출 수 없었을 경계심은 상대에게도 전해졌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순박하게 웃고 있었고, 계속 사진을 선물로 주고 싶어 했다. 내가 경계하는 그런 미소와는 아무래도 다르다고 느껴서였을까? 뭐라 말할 근거는 없었지만, 믿어도 될 것 같았다. 직감을 믿고, 나는 폴라로이드 사진을 건네받았다.


그는 만족한 듯 웃으며 인사하고 떠났다. 아무것도 원하지 않았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미안했다. 한순간이나마 뭘 원하는 건가 의심이 들어 그의 순수함을 경계했던 게 부끄러웠다. 내가 입었던 상처 때문에 하마터면 다른 사람도 상처 입힐 뻔했다.


좋은 마음으로 호의를 베풀었던 그에게 마음속으로 사과했다. 의심 많은 여행자의 경계 어린 눈빛에도 당신의 순수한 미소를 잃지 않아 줘서 고마웠다. 남은 여행길에 즐거운 일만 가득하길.

기념품 가게에서 고르고 골라 마음에 드는 몇 가지 물건을 사고, 마지막 석양을 카메라에 담은 후 쌀쌀해진 날씨에 몸을 움츠리며 숙소에 돌아왔다.


근사한 선물과 함께, 내일 아침 이르쿠츠크로 돌아간다.

매거진의 이전글 11. 죽음을 목격한 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