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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천 Aug 06. 2021

15. 상념에 잠길 수 있었던 하루

[9288km] 시베리아 횡단 열차, 2018년 8월 9일

요즘 서울만큼은 아니지만, 이번에 탄 81번 열차는 에어컨이 없는 차량이라 해가 뜨면 실내가 살짝 힘들 정도로 더워진다.


대부분의 승객들은 해가 중천에 떠도 자리에서 일어날 줄 모른 채 뒤척거리고, 아침 일찍 감자 분말 컵과 체리 젤리로 대충 끼니를 때운 나도 생산적인 일은 손에 잡히지 않아, 막간에 떠오른 시나리오 아이디어만 습관적으로 간단히 메모한 거 말고는 하루 종일 더위와 졸려움에 시달리며 별 새로울 것도 없는 창밖을 구경했다.

오후에 50분 정도 정차한 역에서 어젯밤 인사한 일본인 대학생 Y와 매점에 가며 이야기를 나눴다. Y는 어머니가 한국 분인, 가끔 대구의 할머니 댁에도 놀러 오는 친구다. Y와 같은 학교에 다니고 열차에도 같이 탄, Y가 누나라고 부르는(이름을 잊어버렸다) 다른 일본인 대학생이 내가 다른 한국 사람 같지 않게 다정하다고 말했다고 Y가 전해줬다. 오전에 열차 복도를 지나가며 마주쳤을 때 초콜릿 나눠준 거 때문일까? 그녀가 만났던 다른 한국 사람들은 대체 어땠길래? 내가 정말 다정한 사람인가? 난 어떤 사람일까?


난, 어떤 사람일까.


아마도 별 뜻 없이 던졌을 그녀의 한마디를 계기로, 덜컹거리는 열차 안에서 꽤 오랜 시간 동안 이런저런 상념에 잠겼던 하루. 상념에 잠길 수 있었던 하루. 마지막으로 내가 어떤 사람인지 진지하게 생각해봤을 때가 언제였더라. 끝도 없이 달릴 것만 같은 횡단 열차 안에서 별 일도 없이 하루 종일 창밖을 구경하지 않았더라면, 다시 생각해볼 일도 없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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