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일 여행] 헤이그, 2015년 8월 17일
오전에 느지막이 일어나 서툴게 요리한 스파게티를 먹고, 정오쯤에 시립 도서관에서 A와 그녀의 딸 R을 만나 헤이그 시내를 돌아다니며 시간을 보냈다. 괜찮은 하루였다.
몇 년간 그렇게 많은 메시지를 주고받았는데도 막상 직접 얼굴을 마주하니 어색했다. 서로 자주 보던 SNS 프로필 사진이랑 똑같이 생겼었는데 처음엔 뭐가 그리 서먹했을까? 다행히 새삼스런 놀라움과 어색함은 금세 사라졌다. R의 유모차를 번갈아 밀고 가며, 부슬비가 내렸다 그치기를 반복하는 헤이그를 산책했다.
걸어 다니다 또 부슬비가 내리면 잠시 멈춰 A는 유모차의 덮개를 덮어주고, 나는 우산을 받쳐줬다. 근처 마트에 잠시 들려 장 보는 걸 거들었다. A가 자주 가는 쇼핑몰 푸드코트에서 뭐가 맛있을지 돌아다니며 구경했다. 점심을 먹으며 수다를 떨었다.
나눴던 이야기는 별거 없었다. 네덜란드에서는 의류 메이커 ‘H&M’을 에이치엔엠이 아니라 ‘하엠’이라고 읽는다던가. 네덜란드 엄마들은 애들이 공공장소에서 매너 없이 굴어도 그냥 놔두는 경우가 많은데, 자기는 R을 예의 바르게 키우고 싶다던가. 바닷가에서 손에 든 버거를 날강도 같은 갈매기에게 공중 납치당할 뻔했다던가. 거의 그런 이야기였다. 네덜란드 사람들은 꿀꿀한 날씨에 이골이 나 부슬비 정도는 그냥 맞고 다닌다는 이야기는 뭐가 그리 웃겼던 걸까?
A가 흑인계 이주민이 받는 인종차별에 대해 말해주었다. 때마침 직접 그녀가 당하는 걸 보기도 하고. 어떤 백인 노인이 A를 향해 곱지 않은 시선을 던지고 갔다. 처음엔 왜 저러나 싶었다가, 뒤늦게 의미를 알아채고 그녀를 바라봤다. A는 담담하게 ‘그래, 맞아.’라고 했다. 인종차별뿐 아니라, 저녁쯤에 길거리에 나타나는 불량배들의 위협에 대해서도 말해줬다. 그녀에게 헤이그는 정다운 고향만은 아닌 듯했다.
저녁은 A의 단골 중화 요릿집에 가서 먹었다. 나는 볶음밥을 시키고 A는 면 요리를 시켜 R이랑 나눠먹었다. 뭐가 그리 좋은지는 몰라도 신이 난 R이 까불다가 가게 사장님 손자의 세발자전거를 망가뜨렸다. A가 한참을 사과했다. 꾸지람을 들은 R은 잠시 시무룩해 보이더니, 나랑 A가 잡담을 나누는 사이 금세 또 흥이 차올라 정체를 알 수 없는 춤을 췄다. 모두 웃음보가 터져버렸다.
A와 함께 스코틀랜드 트래킹 때 입을 윈드브레이커를 사러 아웃도어 용품점에 갔다. 몇 개중 고민하다가 A가 추천해준 하늘색 노스페이스 재킷을 샀다. 기왕이면 현지인이 입는 것 같은 스타일로 사고 싶은데 어떠냐고 물으니까 네덜란드 사람들도 이런 컬러 많이 입으니 괜한 걱정 하지 말라며 웃었다.
헤어질 무렵 내일 하루 시간 더 낼 수 있을 것 같으니 또 볼 수 있으면 보자고 말했다. A는 R을 친척에게 맡길 수 있다면 보자고 했다. 겨우 한나절 정도밖에 못 본 게 못내 아쉬워서 말을 꺼내긴 했지만 괜히 이상하게 여기지 않을까 내심 걱정했는데, 괜한 생각이었나 보다. 만약 내일 만날 수 있다면 그냥 평범하게 영화도 한 편 보고 산책도 하기로 했다. 셋이서 보낸 시간도 좋았지만, A와 둘이서 시간을 보내는 것도 즐거울 것 같다. 그녀도 가끔은 딸에게서 벗어나 자기만의 시간을 즐기고 싶다고도 하고.
밤 11시가 넘었다. 아직 연락을 기다리고 있다. 내일 일정을 정해야 하니까 아침에 체크아웃을 위해 짐을 싸기 전까지는 연락이 오면 좋겠다. 요 며칠 밤이 되면 너무 졸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