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영업사원의 희열(이보다 더한 마약도 없다.)

영업사원 희노애락

by 영업본부장 한상봉

영업사원의 희열(이보다 더한 마약도 없다)


영업사원의 눈물 편에서 영업사원은 혼자 운전할 때, 변기를 붙잡고 화장실에 있을 때 운다고 했었다. 그럼 기쁠 때는 언제 일까? 기쁠 때도 울때처럼 혼자 방에 박혀 소리를 지르면 이건 좀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거겠지. 그럼 영업사원은 언제 희열을 느낄까?


영업사원은 당연히 사이트를 수주했을 때 희열을 느낀다. 그런데 그냥 당연히 이기는 싸움에서 이겼을 때가 아니라 이미 패색이 짙고 늦어서 회사도, 사장님도, 어쩌면 나 스스로도 도저히 수주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사이트에서 수주했을 때 희열을 느낀다. 그리고 그 희열을 혼자서 느끼지 않고 그 승리를 이끌어낸 동료 전우와 함께 만끽한다.


내가 한때 각 대학교의 도서관과 초등학교에 들어가는 솔루션을 영업할 때였다. 아마도 그때가 내 전성기 시절 중 하나였을 거 같은데, 제안서 작성 및 프레젠테이션에 천부적 재질을 가진 사업전략팀 수석연구원과 짝을 이뤄 사이트를 휩쓸고 다녔다.


그런데 사실 그 영업은 시기적으로나 영업적으로 우리 회사가 경쟁사보다 많이 뒤처져 있던 거의 90도 가까이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처음 신발끈을 묶었던 상황이었다. 이미 경쟁사는 고객 담당자와의 영업을 상당히 진행한 상태였고 우리 제품이 기술적으로 압도하는 상황도 아니었다. 회사에서는 다른 곳에 집중을 하는 것이 더 합리적인 에너지 배분이라고 권유하기도 했다.


하지만 포기하기는 너무 잠재가치가 큰 영업이었다. 중요 사이트만 점령하면 나머지는 두 번 보지도 않고 선택될 수 있는 보물창고와도 같았기 때문에 그냥 포기하기는 너무나 아까운 영업이었다.


우리는 투트랙으로 스타트라인에 섰다. 영업사원인 나는 주 담당기관인 H정보원의 핵심인사를 파악해서 우리 회사의 존재와 전쟁에 참여할 의사가 있음을 알렸고 그 사이 사업전략팀에서는 제품기능과 성능이 아닌 다른 쪽에서 어필할 수 있는 필승전략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다행히 핵심인사의 위쪽에 우리 회사의 지인이 있는 걸 확인해 어렵사리 고객사 담당자와 미팅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런데 여기서 영업사원의 최고 난관에 부딪힌다. 영업사원들은 다 경험했겠지만 고객이 그냥 의무적으로 만나는 걸 느낄 때가 바로 그것이다. 이미 내부적으로나 고객사의 마음은 다른 곳으로 정해진 상태고 제안설명회나 발표회, 제안서 제출은 그냥 흘러가는 흐름 속에 요식행위라고 생각하고 있는 경우다. 이미 그 프로젝트가 아닌 다른 업무에 신경을 쓰고 있고 그 프로젝트는 일정만 챙기면 되는 업무가 돼 버린 상태.


아무리 영업사원이 출중하고 유능해도 물리적으로 시간이 늦어버린 경우가 있는데 바로 그런 상황이었던 것이다.


난 사람에 대한 영업보다는 다른 방향으로 전략을 세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사업전략팀과 RFP(제안요청서)를 면밀히 분석했다. 도대체 이 제안의 핵심은 무엇일까? 무엇을 공략해야 심사위원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을까?


전의 글에서 한번 인용했었지만 우선협상대상자를 선정하는 제안발표회의 외부심사위원들은 사실 큰 차이가 없으면 자신들을 초빙한 기관의 보이지 않는 낙점에 따라 움직이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확실한 한방,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격차가 필요했다.


그 사이트는 도입하는 솔루션을 그 기관에서 쓰는 것이 아니었다. 전국의 초등학교에 적용할 솔루션을 대행하여 기술적으로 검토하고 선정하는 역할을 맡고 있을 뿐이었다. 즉 다시 말해서 우리가 더 안정적으로 다수의 초등학교에 솔루션을 설치하고 운영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면, 사실 그 솔루션 운영을 맡은 그 기관에서도 나쁠 것 없는 윈윈이 가능하다는 어필이 가능하다고 판단했다.


우리는 제안발표회에서 솔루션의 안정성을 증명하기 위해 10개의 시범사이트를 수행하겠다고 제안했다. 제안요청서에는 2개를 요구했으나 우린 5배를 수행하겠다고 한 것이다. 제안의 진정성에 대한 우여곡절 끝에(제안 PT의 모든 것 참고) 영업사원의 빛나는 기지가 더해져 우린 그 사이트를 수주할 수 있었다.


아직도 그때의 기분을 잊을 수가 없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경쟁사의 영업부장님은 제안발표회가 끝나고 그동안 영업했던 고객사 담당자에게 왜 빨리 자신들 회사에 우선협상대상자통보를 안 해주냐는 전화까지 했다고 한다. 그는 방심했고 우린 치밀했다. 그리고 치밀한 준비로 운동장을 우리 쪽으로 기울이고 결승선을 먼저 끊었음을 확인하는 그 순간 영업사원은 걷잡을 수 없는 희열을 느낀다.



희열의 여운은 또 있다. 위에서 말한 대로 우리가 계속 사이트를 휩쓸고 다닐 때 은밀한 제안이 있었다. 아직도 진의를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경쟁사의 영업사원으로부터, 나와 그 사업전략팀 수석을 함께 스카웃 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내가 일언지하에 농담으로 치부하고 자연스럽게 더 말을 꺼내지 못하게 해서 흐지부지 됐었지만 그 부장님의 그때의 표정은 진심이었다. 그리고 지금 생각해 보면 경쟁사 윗선의 동의 없이는 꺼내지 못할 제안이었으리라고 생각한다.


영업사원의 희열이 눈물보다 더 기억되는 것은 함께 느끼는 동료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눈물은, 흘리는 것도 서러운데 혼자여서 더 외롭다. 하지만 희열은 그 자체로도 짜릿한데, 함께 느낄 수 있는 같이 고생한 사람들이 있어 더 마약 같다. 한 번 그 기분을 느껴본 사람들은 마치 좀비처럼 그 기분을 다시 느끼고 싶어 술렁이고 배회한다. 그리고 나 혼자 맞는 주사가 아니라서 죄책감도 덜하다. 이건 마약이다.


하지만 현실은 당연히 잔인하다. 수주에 성공하여 마약을 맞은 것처럼 희열을 느끼며 펄쩍펄쩍 뛸 때보다 수주를 실패하여 눈물을 흘리거나 깊은 디프레션에 빠질 때가 훨씬 더 많다. 반대의 경우라면 모든 영업사원들이 다 부자가 돼야겠지만 당연히 그렇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최대한 희열의 감정을 오래 간직하고 싶어 한다. 자꾸 그때를 떠올리며 조금만 지나면 다시 마약을 맞은 것처럼 하늘을 나는 기분을 맛볼 때가 올 거라고 최면을 건다. 중독되는 것이다. 그 중독의 기억이 이기는 습관을 만들고 어떤 경우에서도 수주할 수 있다는 자기 신념이 된다. 거기에 냉철한 상사와 조력부서의 분석이 더해지면 그 계속되는 희열이, 가상이 아닌 리얼세계로 펼쳐진다. 역시 모든 기쁨과 희열의 한가운데와 주변에는 동료가, 사람이 있다.



사족 : 그때 나와 같이 사이트를 지배하던 사업전략팀의 그 친구는 회사를 그만두고 다른 곳에서 일하고 있다. 그 친구가 한창 잘나갈때 나한테 뭔가 다른 일을 해보자고 꼬드긴 적이 있다. 다른 일을 해보거나 공부를 같이 해보자고 했었는데 워낙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을때라 그냥 지나가는 말로 여겼었다. 후회까지는 아니지만 한번 정도 진지하게 들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미련은 있다. 역시 모든게 순조롭고 평화로울때 다른 경우의 수를 헤아리는 하는 지혜를 가져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keyword
이전 03화영업사원의 눈물 (슬퍼서만 우는 게 아니라고 느낄 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