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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업본부장 한상봉 Nov 06. 2023

영업사원 봉팀장의 하루 - 제1화 불안의 서막

영업사원 봉팀장의 하루 - 제1화 불안의 서막


머리가 깨지다 못해 부서질것만 같다. 도대체 몇시까지 마신거지? 이미 나와는 안면을 넘어 긴 대화까지 나누게 된 남경모텔 사장님이 걱정스럽게 키를 주던거 까지만 기억이 난다. 근데 보통 모텔사장님은 손님얼굴도 잘 안보지 않나? 이젠 여기에 몇번와서 자고 출근했는지 세기도 어렵고 집만큼 편안하다.


술을 먹은 다음날은 왠만하면 고객미팅을 안잡고 싶은데 지금 시장상황이 스케쥴 조정하면서 고객을 만날 여유를 부릴수가 없다. 요즘은 화장실가다가 우연히 만나는 사장님의 눈웃음도 꼭 돌집어넣은 눈덩이 같아서 불편하고 그냥 착하기만 해서 뭐라고 못하고 혼자 끙끙대시는 본부장님 보기엔 더 죄스럽고 송구하다.


그래. 일단 아침을 먹자. 뭐라도 먹고 술냄새를 지워야 고객을 만나지. 국물로 가는거야. 일단 먹자. 근데 몇시지?


이런 빌어먹을. 모텔 주인얼굴만 겨우 생각나는 전투여서 였나? 알람을 맞춰놓질 못했다. 게다가 오늘은 아침일찍 영업팀장 회의가 있는 날이잖아? 틀림없이 오늘의 첫 스케쥴인 팀장회의를 걱정하면서 술을 마신거 같긴 한데 까맣게 잊었나 보다. 미쳐버리겠네 정말...


분위기는 당연히 안좋다.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할지 모르겠지만 영업1팀, 영업2팀도 상황은 비슷한 것 같다. 비장까지는 아니어도 내 츄레한 옷차림이 문제가 되지 않을 만큼 실적은 바닥인 모양이다. 이제 겨우 1사분기가 지났다고 위안을 삼기엔 작년도 동기 실적과 너무 차이가 난다. 본부장님 얼굴의 그늘과, 도저히 실현불가능할거 같은 영업전략을 침튀기며 열변토하는 영업1팀장의 벌건 얼굴이 교차되면서 요즘 날씨처럼 중간이 없다는 생각을 하는 바로 그때,


- 그늘 본부장님 : 봉팀장, 오늘 바쁜가?

- 술이 덜깬 봉팀장 : 아뇨 괜찬습니다.(만날 고객이 오후에만 3명입니다.)

- 그늘 본부장님 : 그럼 오전에 잠깐 따로 커피한잔 하자. 이 회의 끝나고.

- 심각을 느낀 봉팀장 : 네. 알겠습니다.


영업1팀장은 목소리크기를 좀 줄였으면 좋겠다. 하필 내옆에 앉아서 더 귀가 윙윙거리는 거 같다. 실적이 저조할때 더 길어지는 회의를 마치고 본부장님과 마주 앉았다. 본부장님은 커피, 꽃꽂이 전문가이면서 애호가 이다. 난 늘 그게 본부장님과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었다.


- 봉팀장 : 아침은 드셨어요? 상무님?

- 본부장님 : 그럼 그럼. 우리 집사람 알잖아. 잔소리는 심해도 참 아침은 잘 차려줘. ㅎㅎ

- 봉팀장 : 형수님은 천사시죠. 결혼 잘하신 거에요 진짜..


본부장님의 얼굴이 어두워 진다. 본능적으로 앞으로의 대화에 어울리지 않은 농담을 했다는 걸 느끼는 순간이다. 이놈의 분위기 파악 못하는 습관은 이제 고객을 넘어 직속상관에게까지 새는 바가지가 되버렸다.


- 본부장님 : 봉팀장. 어제 임원회의에서 나온 얘기인데 일단 확정된 건 아니니까 너무 심각하게 듣지는 마. 사장님하고 경영지원본부하고 조직개편 관련 얘기를 하면서 우리 영업본부 얘기가 나오는 거 같아.


늘 웃으시는 본부장님 얼굴이 심각했던 이유를 알것 같다. 이정도 사안이 아니면 절대 웃음을 잃지 않으시는 분인데 그걸 캐치 못하다니.


- 봉팀장 : 우리 영업본부에 안좋은 내용 인가 보네요?

- 본부장님 : 아무래도 축소 얘기가 나오는 거 같아. 3팀체제로 가는 것보다는 한팀을 줄여서 잘되는 곳에 집중하는 게 어떤가 하고 내 생각을 물으시더라고.

- 봉팀장 : 지금 테리토리별로 잘 나눠서 영업하고 있는데 굳이 왜그러실까요?

- 본부장님 : 공공시장 상황안좋으니까 금융쪽이나 일반기업 영업에 더 힘을 쓰면 어떨까 하는 거지 뭐. 암튼 확정은 아니니까 너무 신경쓰지 말고 그냥 알고만 있으라고 얘기하는 거야. 괜찬아 뭐 어떻게든 되겠지.


왜 나만 남으라고 하셨는지 알거 같다. 공공영업을 하고 있는 영업3팀장이 무조건 들어야 하는 내용이니까. 우리팀이 못해서 그런건데 혼은 못내시고 오히려 미안하게 조심스럽게 말씀하시는 걸 보면서, 오늘 죄송하고 슬퍼야 할 정량이 다 채워진 느낌이다.


인사를 마치고 본부장실을 나오는데 거짓말처럼 처음 인사를 하는 여과장. 우리팀 보배같은 팀원이다. 큰 차이는 없지만 하필 내 팀원을 처음 만나다니. 본부장님의 조직개편과 팀 통합은 의례적으로 누군가의 퇴사를 의미하는 걸 알다보니 이런 사소한 우연도 신경이 쓰이는 구나.


- 여과장 : 팀장님 어제 잘 들어가셨어요? 집에 또 안가셨죠? ㅎㅎ


아주 능글맞은 녀석이다. 자기가 모텔에 날 들쳐업고 눕히고 갔으면서 저런 질문을.. 능글맞은데 귀엽다.


"응응. 여과장도 잘 들어갔지? 일단 팀들 다 모여볼까?" "넵"


우리팀은 전부 다섯명이다. 팀장인 나와 최부장, 여과장, 김대리, 그리고 이제 막 입사해서 일을 배우고 있는 지원씨까지. 팀장인 내가 무른 사람이라 어찌보면 생전 큰소리없이 즐겁기만 한 팀인데 실적까지 좋으면 얼마나 좋을까?


"자. 오늘 일정들 공유 좀 해볼까?"

"네, 저는 케리스 건으로 LG CNS 오책임님과 오전에 미팅이 있고 점심같이 할 것 같습니다. 오후엔 특별히 일정없어서 사무실에 있을 예정입니다."

"저는 오전에는 사업관리팀 제안서 작성 업무협의 참석하고 오후늦게 강남넘어가서 코난시스템 사장님 만날 예정입니다. 저녁도 먹자고 하시던데 뭐 아무튼 바로 퇴근해야 할것 같습니다."

"오케. 다들 은근 바쁘네. 여과장은 일정 잡을때 지원씨 대동해서 같이 움직이고, 최부장은 오책임님 상황어떤지 좀 신경써서 살펴봐. 케리스건 상반기에 수주못하면 쪼금 애매해 진다. 난 오늘 좀 미팅이 많아서 점심은 같이 못할거 같고 나도 상황봐서 직퇴할게."


아직 속이 울렁거리는 데 음주운전이 괜찬을지 모르겠다. 정신은 멀쩡한데 음주는 걸리는 지극히 유물론적인 단속이 불만이지만 낮이니까 별일 있겠냐는 생각으로 지하주차장을 향한다. 이제 무언가 결정되기 전까지는 본부장님의 말씀이 며칠동안 머리를 떠나지 않겠지. 미리 걱정하는 것 만큼 미련한건 없다는데 그게 뭐 맘대로 컨트롤이 되는 일인가? 여차하면 모든 걸 내가 책임지고 새끼들은 다치지 않게 하겠다는 실천하지도 못할 히어로의 마인드를 다지면서 차에 오른다. 근데 이런 말도안되는 허세가 가끔 도움이 되는 거 같다.


"김사장님 잘 지내셨어요? 오랜만입니다."

"아이고 봉팀장님. 작년 가을에 운동같이하고 처음 아닌가요? 많이 바쁘신가봐요?"


이 인간은 지지리도 못치면서 참 골프를 좋아한다. 난 이 인간의 골프실력보다도, 필드돌면서 4시간동안 들어야 하는 재미없는 농담이 더 싫다. 그래도 우리 제품을 매년 많이 영업해주는 협력업체라 특히 오늘같은 기분의 날엔 살짝 고맙기도 하다.


"바쁘면 뭐하나요. 뭐 실속이 없는데. 사장님 회사가 더 파이팅을 해주셔야 하는 절체절명의 시기가 왔습니다. 아시죠?"

"보자마자 왜이래요. 어떻게 커피? 녹차?"

"그냥 물주십쇼. 지금 거의 장롱속 습기를 다 빨아드릴 하마나 다름없습니다."


예상대로다. 여기도 상반기에 메이드 될 고객리스트를 자신있게 내밀지 못한다. 보통 엔드유저 영업이라고 하는, 고객과 Direct로 영업하는 방식이 어려울 땐 이런 제휴회사들을 통한 Indirect 영업이 활로를 뚫어줘야 하는데 이 회사나 우리 회사나 다 같은 시기에 대한민국땅에서 영업하는 건데 특별할수는 없겠지.


첫 미팅이 기분좋게 끝나야 징크스처럼 그날의 영업미팅이 순조로운데 스멀스멀 올라오는 더부룩한 속처럼 불편한 심정이 된다. 좋아. 오늘은 징크스를 깨보자.


"처음 뵙겠습니다. OOO 한상봉입니다."

"안녕하세요."



이 친구는 전화 목소리보다 10살은 어려보인다. 명함을 보니 아직 사원이다. 영업사원이 상대하는 고객의 급이 따로 있겠냐마는 작지도 않은 회사같은데 너무 초짜를 내보내는거 아냐? 절대 그럴일은 없겠지만 이럴 줄 알았으면 입사한 지 한달된 지원씨를 보낼걸 하는 생각을 한다.


"MG(Minimum Garrenty) 금액은 적절한거 같은데 매달 내야하는 월비용이 생각보다 크다고 하십니다."


이 친구는 비즈니스 미팅을 다시 배워야 한다. 회사를 대표해서 나온 사람이 '하십니다' 라니. 난 AI하고 미팅중인 거냐?


"그렇게 생각하실 수도 있지만, 월비용엔 유지보수비용이나 업그레이드 비용, 비상시 대응비용등이 다 포함 된 금액입니다. ASP제품의 장점이기도 한거죠. 만약 솔루션으로 구매를 하시면 구매가에 매년 10~15% 정도는 유지보수계약을 하셔야 하는데, 사용기간 생각하시면 이게 더 나으실 듯 싶어요."


날 쳐다보지도 못하고 바닥을 보면서 이리저리 머리를 굴리는 게 들린다. 근데 난 크게 기대하지 않는다. 이 친구의 대답은 정해져 있다.


"윗분들께 방금 말씀하신 내용 말씀드리고 다시 연락드려야 할 거 같아요."


역시나 징크스는 깨기 어려운 가보다. 그다지 큰 금액의 계약도 아닌데 난 이 친구를 다음에 다시 만나야 한다. 이럴 거면 약속잡을 때 전화로 이정도는 얘기해 주면 좋잖아. 하긴 처음 미팅인데 당연히 그건 아니지. 괜한 억하심정에 나도 납득하기 어려운 걸 고객에게 요구하고 있나보다.


띠리리리~~~

"어. 지원씨."

"네. 팀장님. 방금 리브로에서 연락이 왔는데 저번에 보내주셨던 견적서 한번만 다시 보내달라십니다. 메일정리하다가 날리셨대요."

"응응. 지원씨가 좀 대신 보내줘. 우리팀 공유폴더 도서관폴더 보면 리브로 날짜별로 견적서 보낸거 저장되 있으니까 메일주소 확인하고 보내드려." "네. 알겠습니다 팀장님."


지원씨는 얼굴에 나는 똘망이라고 크게 써있다. 신입사원 입사 환영 회식때 IT 최고의 여자 영업사원이 되겠다고 술취해서 말하더니 아가리 파이터 만은 아니라는 걸 한달만에 증명하는 중이다. 심지어 얼굴도 예쁘고 상냥해서 미혼 남자직원들의 관심이 폭발이다. 난 결심한지 오래다. 지원씨의 회사아빠가 되어 그놈들에게서 꼭 보호하고 말리라.ㅋㅋㅋ


잠깐 기분이 좋아졌지만 아직도 남은 미팅이 두개나 있다. 어제 무리하지 않았다면 덜 부담스러웠을 텐데 이제 조금씩 버거워 지려고 한다. 이럴때 참 다행인건 집사람의 잔소리가 없다는거.


포기인지 배려인지는 모르지만 집사람은 내가 외박을 해도 크게 뭐라 하지 않는다. 집이 워낙 먼것도 있고 오랜기간 믿음을 쌓아와서인지도 모르지만 내가 엄한 짓을 할 위인이 못된다는건 확실하게 믿고 있는 것 같다. 고마운 일이다.


일정을 해나가는 중간중간 그러지 않으려고 해도 아침에 본부장님과의 대화가 신경을 거슬린다. 다음 미팅을 위해 운전하면서도, 음악을 크게 틀고 듣고 있어도 문득문득 떠오르는걸 어찌할수가 없다. 그럴때마다 항상 생각의 끝은 '까짓거 내가 책임지고 그만두면 되지 뭐. 근데 집사람한텐 뭐라고 하지?'


강남으로 이동하는 건 기분이 좋다. 차도 막히고 주차도 어렵지만 어차피 오늘은 직퇴를 할거라 조금이라도 집과 가까운 곳의 미팅장소는 편안함을 준다. 약속을 잡을 때 동선과 시간을 고려해서 잡아야 하는 이유기도 하다.


"잘 지내셨어요? 부장님?"

"오지말라니까 오셨네. 지금 뭐 특별한 거 없는데..."

"에이 뭔 일 있어야 오나요? 그래도 부장님 덕분에 고객안만나고 뭐하냐는 본부장님 잔소리는 면하잖아요."


그런데 정말 특별한게 없구나. 이상하다. 내가 듣기로는 준비하는 사업이 있고 거기에는 틀림없이 우리회사 제품이 필요할텐데. 문제는 이거다. 그 제품을 우리회사만 가지고 있지 않다는거. 이미 다른 데랑 접촉중이신가?


성과없이 미팅을 서둘러 끝내고 마지막 미팅을 하러 간다. 늘 미팅이 여러개가 있고 시간이 촉박할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나같은 길치는 정말 T맵에 감사해야한다. 내가 영업을 처음 시작했을때 가장 힘들었던게 지도책을 보고 업체를 찾아가는 거였다.


T맵과 한글을 읽을줄 아는 나에게 스스로 감사하면서 마지막 미팅을 끝내니 어둑어둑 노을이 넘어가고 있었다. 다 잊고 이제 집에 가서 쉴 생각을 하니 기분이 살짝 좋다. 그래 내일 걱정은 내일하자. 이게 진짜 진리고 격언이구나. 집에가서도 계속 그 걱정을 할 거 뻔하지만 그러지 말자고 잠깐 최면을 걸어본다. 그때,


띠리리리 리리리~

"네 상무님. 한상봉입니다."

"어. 봉팀장. 어디야?" "네. 지금 마지막 미팅 끝내고 컨디션이 좀 그래서 퇴근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어. 그래그래. 다른게 아니고 아까 아침에 한 얘기 못들은 걸로 해. 일단 상반기까지는 유지하는 걸로 마무리 됐어. 신경쓰지마."

"아.. 정말요 상무님? 잘됐네요. 알겠습니다. 상무님도 일찍 들어가서 쉬셔요." "오케이"


안봐도 비디오다. 상무님이 사장님과 담판을 지으셨을 거다. 내가 내 새끼들을 위해서 했던 속으로만 하던 다짐과 결심을 상무님은 사장님에게 공식적으로 표명하셨을 거다. 상무님과 사이가 안좋은 경영지원본부장에게 약점을 잡힐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감수하셨을 것이다.


전화를 끊고 안심보다는 죄송한 마음이 더 들었다. 가족이 아닌 이상 회사에서 만난 사람들은 아무리 사이가 좋고 호감이 있고 존경을 해도 실적과 숫자가 있어야 미안하지 않다. 그게 영업사원의 핑계댈 수 없는 핸디캡이고 숙명이다. 하지만 좋은 직속상사와 팀원을 가진 팀장은 행복하다.


내가 직접 걷는 건 아니지만 왠지 차바퀴가 더 가볍고 잘 돌아가는 거 같다. 아직 불안의 서막은 완전히 걷힌건 아니지만 잠시 시간은 벌었구나 하는 생각에 오늘은 편하게 쉴수도 있을 것 같다.


이렇게 몸은 힘들고 정신은 혼란스럽고, 마음은 복잡한 이 시대의 팀장, 아니 영업사원의 하루는 저물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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