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트랙 꿈의 개기일식
토요일에 여자친구에게 셀로판지를 선물받았다. 영문을 몰라 물어보니 내일 부분일식이 있다는 걸 알려주었다. 분명 나도 기사를 읽었는데, 꼭 봐야지 하고 까맣게 잊고 있었다. 파랑, 초록, 빨강의 셀로판지를 겹쳐서 몇 번을 접으면 안전하게 태양을 볼 수 있다. 정말 말 그대로 가격을 매길 수 없는 선물이었다.
어릴 적 언젠가부터 가졌던 꿈은 개기일식을 보러 먼 나라로 여행을 가는 것이었다. 아마도 아프리카의 한 섬에서 일식을 관측해서 상대성이론의 결정적인 증거를 발견한 에딩턴의 이야기를 읽은 후였을 거다. 지구에 비친 달의 그림자를 찾아 바다 건너로 떠나는 모험, 지금도 내게 이만큼 낭만적인 아이디어는 흔치 않다.
어린 시절의 커다란 착각은, 내가 꿈을 위해 노력하고 그것을 이루는 것이 곧 이 세상이 내게 원하는 바라는 생각이었다. 당시의 내게 세상이래 봐야 부모님과 학교 정도였고, 공부해서 학자가 되겠다는 아이는 어딜 가서도 격려와 응원을 받았다.
그러나 내 꿈은 지극히 나만의 것이고, 세상은 거기에 대해 보통 무관심하다. 그리고 꿈이란 것은 근본적으로 사치거나 도박인데, 모든 사람이 자신의 꿈을 이루는 사회는 애초에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면 당연하다. 이 사실을 깨닫게 되면, 떨칠 수 없는 불안이 늘 가슴 한켠에 자리잡게 된다.
한편, 최근에는 '꿈'이 차지하던 넓은 의미의 영역 한곳을 '버킷리스트'라는 단어가 대체하기 시작했다. 죽기 전에 한번은 해 보고 싶은 일들을 적는다는 이 리스트는 '꿈'보다는 좀더 가볍고, 더욱 개인적이며, 대부분은 정말 하겠다고 마음먹으면 실현할 수 있는 것들이다.
아마 개기일식을 보러 여행을 떠나고 싶다는 내 꿈은 요즘은 버킷리스트의 항목 중 하나라고 고쳐 불러야 할 것이지만, 왠지 그러고 싶지 않다. 굳이 변명하자면 당시엔 버킷리스트라는 단어를 몰랐고, 어릴 적의 막연하고 설레는 꿈을, 뭔가 한 단계 아래의 현실의 영역으로 끌어내리는 기분이 들어서다.
하지만 버킷리스트는 이렇게 꿈의 지위를 박탈당할 위기에 놓인 소망들을 재명명함으로써 사실은 그것들을 구해낸다. 이룰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멀고 큰 꿈들에 가려졌던 작은 소망들을 실현하는 건 꽤나 큰 성취감과 만족을 준다. 어쩌면 '소확행'과 비슷해 보일지도 모르지만, 고심해서 적은 버킷리스트는 때로는 꽤나 부지런히 계획하고 움직여야 그 위에 줄을 그어나갈 수 있다. 일식이 언제 어디서 일어나는지도 미리 관심있게 보아야 하고, 그에 맞는 현실적인 계획도 세워야 하는 것이다. 꽤나 머리 아픈 일이기도 하지만, 그 날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조금은 행복해진다.
계란을 한 바구니에 담지 말라는 말처럼, 나는 행복도 투 트랙으로 나누는 게 좋지 않을까 생각한다. 큰 꿈은 나의 방향을 지시한다. 큰 꿈을 갖는 것은 무슨 일을 하고, 어떤 생각을 하고 무엇에 가치를 두고 살 것인지를 정하는 일이다. 어쩌면 어떤 사명 같은 것을 오랫동안 가져와 그것이 그대로 꿈을 결정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어떤 경우든 실제로 그 꿈이 이뤄질지는 알 수 없고, 우리는 십중팔구 그 길 위에서 죽을 것이다. 하지만 그 길 위에서 목적지에 조금이나마 가까워졌다는 생각이 종종 우리에게 힘을 주며, 살아갈 이유를 계속 일깨울 것이다.
한편 우리에게는 작고 실현 가능한 꿈들 - 버킷리스트 - 역시 필요하다. 그것들은 일상에 활력을 부여하며, 우리가 더 빨리 나아가게 만들기도, 힘든 때를 이겨내도록 돕기도 한다. 태양처럼 빛나지만 아득한 꿈이 눈을 멀게 할 때, 때로는 가까운 꿈이 그 빛을 가려 머리를 조금 식혀줄지도 모른다.
하지만 작은 꿈들은 행복이라는 완성된 가치를 우리에게 선사하므로 그 자체로도 이미 충분한 의미가 있다. 그렇게 해서 끝에 내가 어디에 도달했든, 그곳에서 삶을 돌아볼 때 나의 역사가 의미있는 순간들로 채워져 있기를 바란다.
(Image Credit : Royal Astronomical Societ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