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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황색 가로등 아래, 두 가지 위로

시험 날짜를 놓친 밤, 말과 침묵

by 유화
조명과 기억

조명은 밝기와 색온도에 따라 분위기를 바꾼다. 부슬비가 내리는 밤, 주황색 가로등을 보면 나는 지금도 10년 전 그날이 선명해진다.



첫 직장을 그만둔 지난 몇 개월간 건강도 회복하고 평온한 나날을 보냈다. 자발적인 퇴사였기에 실업급여는 없었지만 더 이상 시간에 쫓기며 도면을 그리는 삶에서 벗어난 덕분이었다. 부모님 집에서 함께 지냈기에 한 달에 겨우 며칠 인력소에 나가서 50만 원 언저리의 돈을 버는 것만으로 충분히 생활이 가능했다. 일이 없는 날이면 나는 집에서 '전기기사', '전기공사기사' 자격시험공부를 했다. 사실 공부에 전념했다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고 그냥 공부를 했다고 적은 이유는 말 그대로 공부에 전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게는 합격을 위한 간절함이 없었다.



모든 공부의 능률은 본인이 얼마나 필요를 느끼고 얼마나 스스로 하려는가에 따라 달렸다고 생각한다. 설계판이 지긋지긋했던 나는 이것과 관련된 모든 것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었다. 자격증 공부는 내 필요에 의한 것이 아닌 어머니를 생각한 마음에서 시작한 것이었다. 어머니께서는 아들이 전기과를 졸업했는데 학교를 다 마치지 못하고 취업한다고 손에 자격증 하나 쥐지 못한 것을 늘 걱정하셨다.



그렇게 어머니를 위하여 선심 쓰듯 시작한 공부가 제대로 되는 것은 어렵다. 책상에 앉는 것은 주리를 트는 것 같고 기출문제를 펴면 갑자기 목이 말라 물을 마시러 가는 등의 일이 반복되었다. 그래도 서당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했던가. 계속해서 반복하니 시험을 보면 필기는 그냥 합격하겠다는 자신감이 붙었다. 그렇지 않아도 물어보는 가족들에게 내일 있을 시험은 걱정 말라고 큰소리도 쳤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 걸려온 한 통의 전화로 인해 박살이 났다.



전화 한 통, 오늘이었다.

저녁 7시가 좀 넘었을 즈음 회사에서 같이 일하던 동기로부터 전화가 왔다.


"오~! 오랜만이네! 잘 지냈어?"

퇴사를 했어도 동기는 반가웠기에 내 목소리는 한껏 올라갔다.


"여긴 뭐 지금도 여전해. 너 나가고 더 바빠 죽겠어."

"난 야근 안 하니까 건강은 알아서 회복되고 살만해."

곧이어 동기가 전화를 한 이유가 나왔다.


"그런데 너도 오늘 시험 봤지? 혹시 가채점해 봤어?"

"에엥? 가채점? 시험 내일 아냐? 잠깐만!"

나는 서둘러 방으로 들어와 출력해서 곱게 접어두었던 수험표를 펼쳐 확인했다.


"하, 오늘이었네..."

"내일로 착각했구나... 아무래도 통화하긴 어렵겠네 이만 끊을게!"

동기가 전화를 끊기 무섭게 내 손아귀에는 힘이 빠졌고 수험표는 내 손을 떠나 팔랑팔랑 바닥으로 떨어졌다. 방에 물이 차오르는 기분이었다. 허벅지, 허리, 가슴, 그리고 내가 잠겨 숨이 찰 만큼... 그러지 않고서야 '두근두근' 뛰는 심장소리와 '꿀꺽' 침 넘기는 소리가 이렇게 귓가에 생생할 리가 없다.


"뭐야 오빠? 가만히 서서 뭐 해?"

열린 방문으로 가만히 넋이 나간 채 서있는 내 모습을 본 동생이 들어왔다. 마치 물 바깥에서 물속에 잠긴 나를 부르는 것처럼 동생의 음성은 출렁거리는 물소리에 묻힌 양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아니 뭐, 아무것도 아냐."

적당히 둘러대며 동생을 내보낸 나는 지갑을 챙기고 후드티를 걸쳐 입었다.


"갑자기 어디가~!?"

등 뒤에서 들려오는 동생의 말을 듣고 혹여 어머니나 아버지께서 나를 붙잡으실까 서둘러 신발을 꺾어 신고 현관을 나섰다.


- 딸랑

후드를 깊게 눌러쓰고 집 근처 슈퍼에 들어갔다.


"이거 주시고요, 던힐 파인컷 프로스트 하나 주세요."

아래위로 나를 훑어보는 주인아저씨에게 살짝 후드를 들어 올리고 꾸벅 인사를 했다.

"난 또~! 누구신가 했네~"



정자, 소주 두 병, 음악 소리

정처 없이 걸어서 내가 도착한 곳은 공설 운동장 어느 한구석 정자였다. 이미 바닥에 나뒹굴고 있는 소주병이 보인 까닭에 이곳으로 정한 것이다. 부스럭거리는 검은 비닐봉지에서 꺼낸 것은 소주 두 병.


- 까드득

한 병을 열어서 단숨에 절반을 비우고는 어이가 없어서 한참을 웃었다.

"아하핳하하 어떻게 시험 날짜를 착각하나 몰라. 크크킄"

속이 쓰렸다. 아까 슈퍼에서 집어 들었다가 내려놓았던 과자가 생각났다.


"수능 시험 보던 날에는 신분증도 까먹었던 놈이 무슨... 자격도 없지."

내뱉은 한숨의 깊이만큼 다시 나머지 절반을 비웠다.


- 쿵짝쿵짝 쿵짝쿵짝

다이내믹 원주인지, 댄싱카니발인지 뭔지, 저 멀리 서는 축제가 한창이었다. 넓은 밤하늘 전체를 이불처럼 덮은 구름은 마치 도화지가 되기라도 한 듯 공연장에서 비추는 알록달록한 조명으로 물들었다. 저곳에서 시끄러운 음악 소리와 즐거워하는 사람들은 웃음소리가 들려올수록 이곳에서 한 손으로 머리를 뜯으며 담배연기를 내뿜고 있는 나는 초라하게 쪼그라든다.



어느덧 담뱃갑에 담배가 없다. 시끄럽던 공연장에서도 더 이상 쿵작 거리는 소음이 들려오지 않았다. 시간이 많이 지났음을 깨닫고 나는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


"아름다운~ 사람은~ 머문 자리도~ 아름답지요."

마치 어떤 노래의 가사라도 되는 양 아무런 음이나 붙여 부르며 비닐봉지에 소주 병과 담배꽁초를 담았다. 정자를 나오니 온 거리에 부슬비가 내리는 중이다.


"우산도 없는데, 하필 오늘 비라니."

"가만, 부슬비네? 어~! 아까 공연장에 구름!"

"층운, 온난전선! 그래서 바람이 불었구나."

취기가 슬슬 오르니 헛소리가 많아졌다.



시간을 확인하니 밤 12시가 넘었다. 거리를 비추는 가로등 불빛은 부슬비에 반사되어 더없이 반짝였다. 그저 눈으로 보이는 색깔일 뿐인데 마치 훈훈한 온기를 가지고 있는 듯 비를 맞으며 거리를 터벅터벅 걸어도 전혀 춥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이런 조용함도 위로가 될 수 있을까?



우산 아래의 침묵

저 멀리 집이 보였다. 가로등 아래 안 사람이 우산을 쓰고 있는 것이 보였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그 사람이 아버지를 닮았다는 생각이 들자 내 정신은 빠르게 멀쩡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아버지가 맞았던 것이다.


"어디 갔다가 오냐."

"아니 뭐 그냥 산책 좀 했어요."

아버지께서는 더 이상 아무것도 물어보지 않으시고 조용히 우산을 씌워주셨다. 옷에 뱄을 담배 냄새와 술 냄새 때문에 나는 아버지에게서 몇 발자국 떨어져서 걸었다. 우리 집에 술과 담배는 일절 없었다. 일할 때 아무리 담배를 피웠어도 집에 오기 전이면 양치에 가글에 페브리즈도 뿌렸던 나였다. 그런데 퇴사하고 처음 담배에 손을 댄 것이다.


"일로 들어와~! 비 맞잖냐."

"이미 많이 맞았는걸요."

나는 거절했지만 조용히 내 쪽으로 우산을 기울여 멈춰 선 아버지를 보자 그 옆에 붙을 수밖에 없었다.


"오~ 오셨는가 브라더~!"

동생이 반갑게 맞아주었지만 머쓱함에 고개만 끄덕였다.


"들어가서 자라."

"네."

아버지는 그대로 별말씀 없이 방으로 들어가셨고 나도 내 방으로 돌아왔다.


두 분 모두 내일 자격증 시험 보러 갈 줄 알고 계실 텐데 도무지 부모님께 말씀드릴 용기가 나지 않았지만 아무것도 묻지 않으셨던 오늘에 기대어 용기를 냈다.



두 가지 온도, 두 가지 위로

- 똑똑

"저 드릴 말씀이 있어요."

"그래 들어와라."

두 분 모두 주무시려고 누우시려던 참에 내 방문으로 인해 몸을 일으키셨다.


"내일 시험 보러 안 가요. 시험이 오늘이었대요."

어머니는 놀라셨지만 아버지는 아무런 말씀이 없으셨다.


"허탈하고 스스로가 한심해서 나갔다 왔습니다. 걱정 끼쳐드렸다면 죄송해요."

아버지는 여전히 조용하셨지만 어머니께서는 무슨 심각한 일이기에 나가서 몇 시간을 들어오지도 않고, 들어와서도 죽상인가 싶었다며 그런 문제는 그냥 털어버리라고 말씀하셨다.


"시험 까짓것 잊어버릴 수도 있지. 그거 한번 안 본다고 인생 망하는 거 아냐."

"그리고 너 씻고 자. 냄새난다. 힘들다고 술·담배 찾지 마."

말씀으로 다독여주신 어머니의 위로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시는 아버지의 위로는 분명 같지만 달랐다.


어머니의 말씀에 내 마음은 시원했고, 아버지의 조용히 우산은 따뜻했다. 한랭전선과 온난전선인가.

돌아서 나오려는 내 눈에 안방 창문 반투명 유리 너머로 어스름한 주황색 가로등 불빛이 번져 들어왔다.

그 밤의 조명은 주황색이었다. 말과 침묵, 서로 다른 두 가지 온도는 각자 다른 방식으로 한 사람을 위로했다.

내린 비에 쫄딱 젖었지만 이런 위로를 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에 더 깊이 젖었던 그런 밤이었다.



유난히 힘들던 날, 당신을 위로한 것은 말이었나요 아니면 곁을 내어준 침묵이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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