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와 아들은 서로의 방식으로 다가간다.
월요일 아침 9시 10분
모두가 회의실로 들어갔다.
"여섯 시 되었다고 쌩하니 가는 사람들..."
사장님의 말이 허공에 걸렸다. 그날 이후, 퇴근은 '시간'이 아니라 '눈치'가 되었다. 첫 직장은 그렇게 내 삶의 속도를 바꾸었다.
첫 직장에서 일하면서 칼퇴근을 해본 것은 단 이틀뿐이었다. 목요일에 출근해서 자리를 배정받고 컴퓨터를 켰다. 다들 바쁘게 일하며 아무도 신경을 쓰지 않기에 나는 머쓱함을 느끼며 바탕화면에 있는 오토 캐드를 실행했다. 캐드를 몰랐기에 인터넷에서 실습 예제 동영상을 검색했다. 그 영상을 보며 따라 하길 몇 분, 전기 파트 직원이 와서 샘플로 완성된 도면을 주고는 도면에 사용된 심벌을 설명해 주었다. 사무실이 많이 바빠서 자세히 설명해 주지 못해 미안하다며 점심 식사 후에 다른 것을 설명해 주겠다는 말을 남기고 돌아갔다. 그렇게 나는 이틀 동안 배운 대로 오전 9시에 출근하면 샘플로 받은 도면을 켜놓고 단축키를 사용해서 선을 그리고 심벌에 연결하는 작업을 하다가 저녁 6시가 되면 인사를 드리고 퇴근했다.
주말이 지나 맞이한 월요일. 시곗바늘이 9시 10분을 가리키니 모두가 하던 일을 멈추고 회의실로 들어갔다. 매주 월요일 아침에는 업무회의가 있다고 했다. 이때 각 파트 책임자들은 맡은 작업 진행 상황을 보고하고 사장님이 세부 내용을 물어보면 실무자들이 답변하는 시간이었다. 그 외에 지난주에 미처 소개하지 못했지만 새로운 직원이 왔다며 나를 소개하는 시간도 있었다. 그리고 회의가 끝나기 직전 사장님이 전달사항이 있다며 입을 떼셨다.
가만 보니까 여섯 시 되었다고 쌩하니 가는 사람들이 있던데
우리 회사는 그런 개인주의가 팽배한 곳 아니잖아.
자기 일 다 끝났으면 도움이 필요한 팀원들이 있는지
돌아볼 줄 아는 그런 사람들이 되자고! 으흠!
다들 6시가 되었는데 누구 하나 일어날 생각도 안 하던 모습을 기억한다. 그렇기에 사장님의 말은 나를 겨냥한 말이었다. 그 후 며칠은 팀원들을 도와서 도면 출력하거나 내역서를 복사하며 회사에 남았지만, 며칠 뒤 내가 실제 업무에 투입되고 난 이후부터는 내 일이 쌓여서 집에 갈 수가 없었다.
창고방 침대
만약 내가 사람을 상대하는 일을 했다면 사람들이 집에 가면 나도 갈 텐데, 컴퓨터랑 일하는 것이다 보니 컴퓨터가 망가지지 않는 이상 도면은 그려도 그려도 끝이 없었다. 하나의 프로젝트를 끝내면 곧 다음 프로젝트가, 다음 프로젝트를 끝내면 또 다른 프로젝트가 기다리고 있었다.
가정이 있는 여직원 분들은 늦어도 밤 10시가 넘으면 퇴근하셨지만 나보다 1주일 늦게 들어온 내 동기와 나는 그렇지 못했다. 대개 밤 10시, 조금 늦으면 밤 12시, 많이 늦으면 새벽 4시, 아예 다음날 7시가 되어 집에 가서 씻고 다시 9시에 출근하기도 했다.
언제나 피곤에 절어있는 직원들을 위해서인지 회사 창고 방에는 일하다가 피곤하면 들어가서 자고 나올 수 있도록 짝퉁 라꾸라꾸침대와 얇은 이불이 하나 놓여 있었다. 선임들마다 하는 말은 자기가 입사했을 때부터 한 번도 세탁하지 않았다고 했다. 5년, 7년, 9년 대체 몇 년을 그대로 둔 것일까? 그 위에 몸을 누이면 매캐한 먼지 냄새가 내 몸에 스며드는 것 같았다. 하지만 졸려 죽겠는데 그게 무슨 대수일까. 내가 나가야 동기도 들어와서 잘 테니까 20분 알람을 맞추고 서둘러 눈을 감는다.
식탁 위의 대화
1년이 조금 지났을까 무너진 일상의 반복. 쳇바퀴 돌 듯 반복되는 매일의 삶은 도무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나는 많이 지쳐있었다. 그러던 어느 주말 가족들과 저녁 식사를 하다가 회사가 힘들어서 때려치우고 싶다는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불평을 들으신 아버지께서는 움직이던 수저를 멈추고 말씀하셨다.
"너는 가만히 보면 끈기가 없어"
씹던 밥이 한순간에 모래로 변하기라도 한 것일까 목이 메었다.
"힘들어도 진득하니 참고 버티면 점점 나아지는 거야."
말씀하는 아버지도, 그걸 듣는 나도 식사를 멈췄다.
"이런 것도 버티지 못한다면 어딜 가도 똑같아."
"아니 뭐 내가 당장 그만둔데요? 아니 그냥 힘드니까 말해본 거지!"
바로 옆에 있어도 내 말이 그에게 닿지 않을 것 같으면 목소리도 그만큼 커진다.
"사회가 얼마나 냉혹한데, 계획은 있고?"
"무서워서 뭔 말을 못 하겠네."
머쓱함에 나는 대화를 끝내려 했다.
"아직 네가 세상을 몰라서 걱정이다."
이 말은 걱정일까 핀잔일까. 그 사이 어딘가에 걸쳐있던 말은 내 가슴을 후벼 팠다.
얼굴이 붉어지는 기분이 들며 양쪽 귀가 후끈거린다. 명의를 대여해 줬다가 고생했던 일이 떠올랐다. 뒤이어 처음 면허를 따고 차 끌고 강릉에 다녀온다며 허락을 구하던 때가 마치 머릿속에서 비디오라도 재생한 것처럼 보였다. 다시 현재로 돌아왔다. 나는 아직도 아버지에게 신뢰를 드리지 못하는 아들이었던 것이다.
"요즘은 아버지가 살던 평생직장의 시대가 아니에요."
"아버지도 하나로 안되니까 투잡 뛰시는 거 아니에요?"
최선의 방어는 공격이라고 했던가. 차분하게 내 기분을 설명하며 대화를 하기보다는 가장 쉽고 빠른 방법을 선택한다. 잠깐의 서운함으로부터 나를 지키고자 사랑하는 아버지를 향해 화살을 쏘듯 내뱉는 말로 상처를 낸다.
"전부터 말씀하시던 재형저축, 그거로 집 살 수 있어요?"
"아버지 때나 그런 저축이 먹혔지요. 요즘 은행 이율이 얼만데요."
어쩔 때 보면 말은 폭주하는 기차 같다. 폭주하는 기관차에 연결된 열차들이 줄지어 따르는 것처럼 내뱉은 한 문장은 다음 문장을 부르고, 다음 문장은 또 다른 문장을 부른다. 그리고 내가 쏜 화살은 돌고 돌아 다시 나를 향한다.
"개고생 해서 꼴랑 백오십! 이걸로 언제..! 뭘 어떻게..!"
말하지 않았던 속마음이 나왔다. 일을 하면서 가장 마음이 좋지 않았던 것은 바로 시간을 갈아 넣고, 건강을 갈아 넣는데 손에 쥐는 돈은 형편없었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저 우리 과에서 가장 먼저 일을 시작했을 뿐, 좋은 곳에 취업한 친구들은 이미 나를 성큼 앞질러 달려간다. 뒤처지는 듯한 기분에서 느껴지는 조급함과 아버지를 향한 섭섭함, 쳇바퀴를 벗어날 계획도 없는 나를 향한 답답함이 섞여 나를 짓눌렀다.
"밥 더 먹으면 체할 것 같아요. 죄송하지만 먼저 들어가 볼게요."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눈시울이 붉어졌다.
날카로운 가시를 바짝 세운 채 머리에서 떠오르는 생각을 그대로 공격 수단으로 사용한 결과는 처참했다. 아버지가 경험하신 삶의 지혜, 가정을 지켜온 성실함의 가치를 폄하하여 기어이 내 눈높이까지 끄집어 내렸다. 가족을 사랑하며 누구보다 치열한 삶을 살아오신 아버지를 나는 몇 마디 말로 구시대에 가두어 놓고는 아무것도 지키지 못한 스스로를 보며 자괴감에 빠졌다. 차라리 방으로 들어가려는 나를 아버지께서 불러 세우고 혼을 내셨다면 마음이 이보다는 편했을 것을. 깊은 밤은 내 가슴에 상처를 보며 아버지 가슴에 남았을 상처를 알아가는 시간이었다.
서로의 방식으로
상처는 하루아침에 아물지 않는다. 하지만 서로에게 마음을 열고 다가갈 때 비로소 치유는 시작된다. 나는 깊은 밤을 지새우고 맞이한 아침 아버지께 사과드리는 말로, 아버지께서는 야근하고 돌아온 내게 '그놈의 회사는 직원을 너무 막 굴린다'라는 말로 어색하지만 서로에게 다가갔다.
그렇게 몇 개월 뒤, 속이 너무 쓰려서 받은 위내시경 결과가 좋지 않았던 것을 이유로 나는 1년 6개월 만에 퇴사를 했다. 사장님은 '이렇게 나가면 너를 추천한 교수님은 뭐가 되겠냐'라는 말씀을 하셨지만 그것이 내 결정에 영향을 주지는 못했다.
가끔이지만 힘들 때면 처음 면접 보던 날의 물 비린내와 오래된 종이 냄새가 느껴질 때가 있다. 아마도 4학년 1학기에 취업을 결정했던 선택의 결과가 지금도 꼬리표처럼 나를 따라다니는 것은 아닐까? 하지만 나는 지금의 나를 사랑하고, 지금 내게 허락된 것들을 사랑하기에 모든 것이 최고의 선택이었다고 믿는다. 나의 선택이 모여 지금의 내가 만들어졌다면 그 선택을 받아들이지 않고서는 지금의 자신을 사랑할 수 없기 때문이다.
늘 그렇듯. 오지 않을 '만약'은 멀고. 우리가 누려야 할 '지금'은 가깝다.
여러 순간의 버팀과 그만둠 사이에서, 당신이 그어 온 기준은 무엇인가요? (직장·관계 등 삶 전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