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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이력서가 툭 떨어졌다

나의 첫 직장, 마음에 걸리던 것.

by 유화

내 기억 속 첫 직장의 공기는, 오래된 종이 냄새와 물 비린내가 섞여 있었다. 4학년 1학기를 마치고 교수님의 소개로 작은 엔지니어링 회사에 취업하게 되었다. 이전 에피소드에서 잠깐 언급했던 그곳. 이번에는 그곳으로 출근을 결정했던 날의 풍경과 그날의 내 마음에 대해 이야기해 보려 한다.


2학년 2학기로 복학한 나는 학생식당에서 근로장학생으로 일했다. 내가 하는 일은 식당 이모들이 김밥을 말 수 있도록 재료를 준비하고, 주먹밥이 만들어지면 매점에 가져다 두는 것이었지만 가장 주된 일은 식당에서 국을 떠주는 것이었다. 하루에 2시간 정도 식당에서 일하면서 내가 받는 돈은 19만 3천2백 원. 이 돈이면 핸드폰 요금을 내고 버스를 타고 다니기에는 충분했다. 국을 뜨는 일은 간단했지만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일만 하기에는 너무 지루했기 때문에 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안녕하세요' 또는 '식사 맛있게 하세요~!'라는 말을 건넸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고개만 끄덕이면서 국을 받아갔다. 그런데 인사하던 모습도 인상 깊었는지 1년이 지나 식당에서 학과 사무실로 근무지를 바꿨을 때, 교수님께서는 이제 내가 식당에 보이지 않으니 허전하다고 말씀하셨다.


학과 사무실에서 근로장학생으로 일한 것도 어언 1년. 4학년 1학기를 마칠 즈음 교수님께서 나를 부르셨다. 취업자리가 들어와서 학생을 추천해야 하는데 나를 추천하고 싶다고 하시며 내 의견을 물으셨다. 고민을 해보고 말씀드리겠다며 일어나 문을 열다가 교수님께 추천 이유를 여쭤봤다.



이유? 성실하니까.
식당에서 싹싹하게 일하던 모습,
학과 사무실에서 일하면서 실습실 청소하는 거.
아무도 보지 않으니 대충 할 수 있는데
의자도 뒤집어 놓고 청소하던 그런 모습을 봤으니까.



결국 나는 다음날 교수님을 찾아뵙고 취업의사를 밝혔다. 교수님께서는 내게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작성해서 언제까지 회사로 찾아가 보라며 장소를 알려주셨다. 늦은 밤, 나는 집에서 4학년이 되며 작성해 두었던 자기소개서의 내용을 회사에 맞게 다듬었다. 이력서를 작성하며 학력사항에 졸업 예정이라는 내용을 기입하자 내 앞으로 성큼 다가온 취업이 실감 나기 시작했다. 그렇게 면접 날이 다가왔다.



아침부터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듯 장대비가 쏟아졌다. 옷장에서 잠들어있던 정장을 꺼내 입자 그 모습을 보시던 어머니께서는 넥타이를 매어 주셨다.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잘 챙겼는지 다시 한번 확인하고, 어머니께 인사를 드린 후에 집을 나섰다. 쏟아지는 장대비가 우산을 때리는 것처럼 아직 경험해 보지 못한 새로운 세상에 대한 기대와 설렘, 걱정과 두려움이 내 가슴을 두드렸다.




면접이 끝났다. 하지만 마음은 썩 개운하지 않았다. 편의점 바깥에 설치된 좁은 어닝 아래에서 비를 피하며 담배에 불을 붙였다. 내뱉는 연기는 낮게 깔린 채 퍼지다가 어닝을 벗어나자 이내 빗줄기 속에 녹아 사라졌고 나는 생각에 잠겼다.



면접을 보기로 한 시간보다 조금이라도 일찍 도착하기 위해 서둘렀던 회사 앞 교차로에서 물벼락을 맞았다. 횡단보도에 서있던 내 앞으로 택시가 지나가며 도로 가에 고여있던 빗물을 끼얹은 것이다. 급한 대로 우산을 내려 막았지만 정강이 아래부터 구두는 흠뻑 젖었다. 걸을 때마다 바지는 다리에 달라붙고 젖은 양말은 쭈빅쭈빅 소리를 내었다. 회사가 있는 사무실은 2층. 축축한 계단을 올라 낡은 철문을 열었다. 거슬리지는 않을 작은 소음과 함께 열린 문 안쪽에서는 시원한 에어컨 바람과 함께 오래된 종이 냄새가 났다. 사장님께서 자리를 비우셨기에 잠시 기다리라며 여직원은 의자를 권했고, 내 앞에 비타오백 한 병을 놓고는 자리로 돌아갔다. 울리는 전화벨 소리와 쉴 새 없이 딸깍거리는 클릭 소리를 들으면서 병에 맺힌 물방울을 손으로 문지르기를 몇 번. 이곳에서 아직까지는 이방인에 불과한 나에게 통화 내용을 비롯하여 이런저런 소음은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했다. 느껴지는 적막 속에서 입이 바짝 말랐기에 나는 비타오백 뚜껑을 열어서 입안에 털어 넣고 삼켰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사장님이 오셨고 나는 사장실로 들어가 면접을 보았다. 담배에 불을 붙이고 잠시동안 내 이력서를 훑어보던 사장님은 그대로 이력서를 책상에 내려놓은 채 내게 교수님은 잘 계시는지를 물어보셨다.



엔지니어링 회사는 건축사무소가 그려준 건축 도면 위에 각종 설비 도면을 그리는 일을 하는 곳이었다. 회사 내에는 기계설비가 한 파트 전기, 통신, 소방이 묶여서 한 파트로 총 2개의 파트가 존재했다. 전기과 학생이었던 나는 당연히 전기파트를 배정받게 될 것이라고 했다. 정해진 기한 내에 도면을 완성해야 하는 일이다 보니 책임감을 가지고 성실하게 일할 사람이 필요하다는 말과 건물 하나를 끝냈을 때 얻게 될 성취감이 크다는 말을 들었다. 월급은 세전 120만 원. 하지만 처음 3개월은 수습기간으로 급여는 75%. 적은 90만 원이었다. 처음이라 급여가 적은 것 같지만 열심히 해서 경력을 쌓아 연봉 올려가는 재미도 쏠쏠하다는 말을 끝으로 언제부터 출근할 수 있는지를 물어보셨다.



순간 내 머릿속에 부모님의 얼굴이 떠올랐다. 부모님께서는 무작정 출근하지 말고, 어떤 회사인지 잘 알아보고 결정하라고 하셨다. 하지만 과연 여기까지 와서 고사하고 돌아서도 괜찮은 것일까? 문을 나서면 다시 교수님 얼굴을 마주할 텐데. 설계의 매력과 성취감을 말하며 자신 있게 추천하셨던 교수님. 그 순간 의문이 스쳤다. 혹시 나는 '성실한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쓰기 쉬운 사람, 고마우면 고마운 대로, 아니면 언제든지 대체 가능한 사람으로 여겨졌던 건 아닐까? 일 특성상 야근도 잦다는데, 첫 3개월 월급은 90만 원. 성실함의 대가로 돌아온 건 이토록 초라한 현실이었다. 섭섭하고 배신감마저 들었다. 그래도 나를 오래 지켜본 분이기에, 나를 잘 아실 거라 믿었다. 그런데 이건 정말 나를 위한 추천이었을까? 돌아서면 모든 관계가 어색해질까 걱정했고, 그 서먹함이 발목을 잡았다. 나는 물 비린내를 싫어한다. 그런데 이곳으로 오기 전, 거리에서 맞은 물벼락 때문일까 물 비린내는 발치에 머무르지 않았다. 어느새 나를 따라와 코끝을 떠나지 않았다.



결국 출근 일자를 정했고 사장님과 이야기를 마쳤다. 결정을 내리자 여기저기에 쌓인 도면에서 나는 오래된 종이 냄새와 사장실 바깥에서 들려오는 통화 소리, 키보드와 마우스의 소음은 이제 이것이 앞으로 겪게 될 삶이라는 듯 성큼 나에게 다가왔다.




마지막으로 깊게 들이마신 담배 연기를 내뱉으며, 나는 왜 마음 한구석이 개운치 않았는지를 비로소 알 수 있었다. 면접을 마치고 돌아서던 순간, 사장님은 내가 제출한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마치 쓸모없는 종잇장처럼 한쪽 구석 쌓여있는 서류 더미 위에 툭 던져두었다. 자기소개서에 모든 정성을 쏟았는데, 그 짧고 무심한 동작 하나에 이곳은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고자 하지 않는다는 메시지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나는 이곳에서 대체 가능한 부속품 중 하나일 뿐이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부모님의 품 안에서 사랑받던 아들이자, 한 명의 학생이었던 나는 그렇게 눅눅하게 젖은 마음을 안고, 사회라는 바다에 첫 발을 내디뎠다.



일에서 당신을 지켜주는 경계는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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