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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번의 1분

그날의 눈물은 내게 많은 것을 알려주었다

by 유화

보통 남자들 하면 '군대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외국 특히나 미국에 비해 우리나라 사람들의 군인에 대한 인식은 별로다. 입대 전에는 나라의 자식이지만, 사고가 나면 남의 자식이 되는 것이 군인이지 않을까? 보통 남자들은 다 가는 것이기에 군대에 다녀왔다고 명예랄 것도 없고 가산점을 받는 것도 아니기에 군대에서 보내는 시간은 설움의 시간이다.



군대에서 한 고생은 상대적이다. '나 때는 말이야'라고 입을 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이전에 더 가혹한 환경에서 복무를 한 것도 맞지만 그렇다고 내가 힘들지 않은 것은 아니기에, 타의에 의해 자유롭지 못한 2년여 시간을 보낸 모든 남자들은 고생한 것이 맞다. 아무리 처우가 개선되어 먹는 것이 잘 나온다고 해도 여전히 배가 고프고, 든든하게 껴입을 피복이 주어져도 여전히 춥고, 핸드폰을 사용하게 해 줘도 여전히 답답할 것이기 때문이다. 나 또한 그런 시절이 있었다. 2009년 11월 그 추운 겨울의 이야기를 시작해 보려 한다.



보통은 학기를 마치면서 휴학을 하고 입대를 하기 마련이다. 실제로 대학교 1학년 2학기를 마치자 1학기를 마쳤을 때보다 더 많은 친구들이 입대를 하며 사라졌고, 그 자리는 못 보던 복학생 선배들로 채워졌다. 나 또한 운전병으로 입대하고 싶어서 세 번이나 지원했지만 치열한 경쟁률 속에서 세 번 모두 떨어졌기에 2학년 1학기를 다니게 되었다.



입영통지서가 날아오는 현역병과는 다르게 기술행정병은 본인이 직접 지원을 한다. 입대하기 약 2~3개월 전, 지원자들은 몇 월에 입대하는지만 알고 구체적인 날짜는 모른다. 인터넷으로 지원을 받고 합격자 발표가 나서야 구체적인 날짜를 알게 된다. 나는 한창의 여름방학 중인 8월, 11월에 입대하는 '발전기 운용 및 정비병'으로 지원서를 넣었다.






휴학과 복학을 생각하면 1학기를 마치고 여름방학 때 가든지, 아니면 아예 2학년을 마치고 겨울방학 때 가든지 둘 중에 결정을 할 텐데 왜 하필 11월에 입대를 선택했을지 궁금해할 수 있다. 내 결정의 이유를 설명하자면 입대는 나에게 일종의 도피이자 꼼수였다.


복학생 선배들로 인하여 분위기는 1학년 때와는 조금 달라졌다. 여전히 노는 것을 좋아하는 선배들도 있었지만 학업에 열중하며 도서관에서 시간을 보내는 선배들도 많아졌기 때문이다.



언제나 보면 꼭 실행력이 없는 사람들이 명분과 구실을 찾곤 한다. 마치 안 하던 공부를 시작하려면 노트부터 새롭게 사야 하는 사람처럼 말이다. 계획하고 당장 실행하면 될 것을 내일부터, 다음 주부터, 다음 학기부터 새롭게 시작하겠다며 미루는데 그것이 나였다. 2학년이 되면서 이공계 공통으로 배우던 미적분과 물리 등이 아닌 전공 과정을 배우기 시작했는데 너무 공부가 어렵고 재미가 없었다. 그러던 중 학사 일정의 4분의 3을 채우면 강의를 다 듣지 않고도 다음 학년으로 올라갈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중간고사까지만 공부를 하고 군대에 가자.
그리고 대학교 3학년으로 복학하면 공부 열심히 하자.



내일부터, 다음 주부터가 아닌, 아예 다음 학년부터 공부를 하기로 미뤄버린 나였다. 지금 생각하면 참 생각이 어렸다. 2학년의 공부를 제대로 하지 않고 3학년으로 복학한들 과연 그 공부를 따라갈 수 있을까? 세상에는 피한다 한들 어떻게든 다시 마주해야 하는 상황들이 있는데 말이다. 하지만 당시에는 당구장에서 놀면서도 당장의 마음의 부담을 피하고 싶은 철없는 대학생일 뿐이었다.






내 계획은 보기 좋게 실패했다. 합격자 발표 이후 확정된 입대 날짜는 빼빼로데이 하루 전날인 11월 10일. 학사 일정의 4분의 3을 채우기에는 1주일이 모자랐기 때문이다. 학교 행정실에서는 등록금을 다시 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2학년 2학기로 복학해서 2학기를 다시 다녀야 한다는 안내를 들으며 나는 휴학을 했다.



2009년 11월 10일, 306 보충대가 위치한 의정부는 추웠다. 때마침 신종플루가 대한민국을 강타했기에 입영 식전행사 등은 모두 취소되어 없었다. 부대 입구에는 사람 한 명만 들어갈 수 있을 만큼의 펜스를 열어두었고 그 좁은 공간을 두고 사람들은 부채꼴로 늘어서 떠나는 이와 떠나보내는 이의 작별이 이루어졌다.



보충대에서 대기하던 2박 3일의 시간이 지나 각자가 배정받은 훈련소로 이동하는 버스에 몸을 실었고, 훈련소에서 나는 이름이 아닌 56번으로 불렸다. 겨울의 철원은 정말 추웠다. 개인 침대가 아닌 좌우로 길게 늘어선 침상 위에서 내 자리는 창가 바로 한 칸 앞이었다. 유리창이 깨졌으면 좀 보수라도 할 것이지, 두꺼운 김장용 비닐을 몇 겹으로 겹쳐 유리창에 대고 테이프로 덕지덕지 붙여놓은 것이 전부였다. 덕분에 밤이면 차가운 한기와 함께 매서운 바람 소리가 들려왔고 그 소리는 매일 창가를 바라보고 누워 입을 막고 훌쩍이는 57번의 울음소리를 지워주었다. 나는 울지 말아야지 마음을 먹었지만 훈련소 2주 차 때 비로소 눈물이 났다.



눈물이 났던 날은 바로 2주 차 개인화기 사격훈련이 있던 날이었다. 아무래도 총기를 다루는 훈련이다 보니 안일하게 풀어져 사고가 발생하지 않도록 조교들은 더 혹독하게 얼차려를 주며 훈련병들을 굴렸다. 그렇게 시작된 사격. 나는 20발 사격 중 18발을 명중했다. 20발 모두 명중 한 사람은 통화를 시켜준다고 했기 때문에 노력했던 것이었지만 물 건너갔기에 아쉬웠다. 그런데 모두에게 통화를 시켜준다는 것이었다.


침상에 앉아서 오늘 사격에 사용했던 총기를 닦고 있으면 3명씩 불려 가서 통화를 하고 돌아왔다. 기껏해야 1분의 통화였지만 기다리는 이들은 다들 묘하게 들떠있었고 돌아온 이들은 아쉬움과 후련함이 섞인 복잡한 기분이라고 했다.



55, 56, 57번 나와



내 번호가 호명되자 나는 용수철이 튕기듯 일어났다. 전화기 앞에서는 조교들이 스톱워치로 시간을 재고 있었다. 수없이 생각했다. 평소 전화를 해도 잘 받지 않는 엄마에게 전화를 걸기보다는 전화를 잘 받으시는 아빠에게 전화를 걸자고 말이다. 그런데 정작 내 손가락이 누른 번호는 엄마의 핸드폰 번호였다.



신호가 다섯 번이 울리고 열 번이 울렸다. 수화기를 내려놓았다가 다시 전화를 건다. 1초가 아쉬운 상황. 손가락은 12개의 다이얼 위를 날아다니며 다시 11자리의 번호를 누른다. 제발! 제발! 받아라 제발! 애꿎은 땅바닥에 퍽퍽 발을 굴러본다.



자, 30초 남았다!



지금이라도 아빠에게 전화를 걸까? 아니야 이미 늦었어. 엄마가 받기만을 바랄 수밖에 없어!



20초 남았다!



'하, 진짜! 시간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거 알고 있다고!' 뒤에서 초를 재고 있으니 속이 탔다. '제발, 아 제발' 마음으로 외치던 말은 중얼거림이 되어 입 밖으로 나왔다.


5, 4, 3, 2, 1 전화 끊어, 복귀!



결국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나는 수화기를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1열 종대가 되어 발맞추어 생활관으로 복귀하면서 내 눈에서는 눈물이 흘렀다. 55번은 뒤를 흘끗거리며 괜찮냐고 물었고, 매일 밤마다 울던 57번은 내 뒤통수를 향해 위로의 말을 전했다. 복도에서 떠들지 말랬다고 입을 움직이지 않고 복화술 하듯 건네는 그 위로에 눈물은 더욱 차올랐다.



생활관에서는 눈물을 닦으며 들어오는 나를 보고 다들 눈이 동그랗게 되어 물었고 55번과 57번은 나 대신 '전화를 받지 않아서' 그냥 돌아왔다는 것을 말해주었다. 그제야 이해가 가는지 고개를 주억거리는 동기들을 보며 나는 말없이 자리에 앉아 다시 총을 닦았다. 이후 점호를 마치고 내가 놀랐던 것이 2가지 있는데 하나는 통화 못한 것은 나밖에 없다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당직을 서는 간부가 나에게 다시 한번 전화할 기회를 주는 것에 대해 소대원들에게 물었을 때 모두가 동의해 준 것이었다.



다시 주어진 시간도 1분. 신호가 세 번이 넘어가기도 전에 달칵하며 통화가 연결되는 소리가 들렸다. 애타게 내가 맞는지 이름을 부르며 확인하는 엄마의 목소리는 잔뜩 물기를 머금고 있었다.



엄마! 저예요! 잘 지내셨어요?
나 건강하게 여기 잘 있어요!



부모님과 동생의 안부를 묻고, 모두의 배려로 다시 한번 전화할 수 있었음을 전했고 다시 또 통화할 수 있는 날을 기약하며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고작 1분이었지만 그 어느 때보다 가족의 소중함과 배려에 대한 감사를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다.



취침 소등을 하고 자리에 누워 모포를 덮었다. 어설프게 막아놓은 깨진 유리창을 통해 여전히 차가운 한기가 들어왔지만 이상하게도 춥지 않았다. 매서운 바람 소리 또한 여전했지만 57번은 그날 훌쩍이지 않았다.


그저 도피와 꼼수를 위해 선택한 입대였지만 군대였기에 평소라면 하지 못했을 의외의 경험을 할 수 있었다. 이처럼 앞으로 내가 살아갈 삶도 마냥 순탄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아니, 모두가 군대에서 저마다의 힘듦을 겪듯이 내가 마주할 나만의 어려움과 힘듦이 분명 있다. 그 어떤 곳에서도 가만히 주위를 둘러보면 이렇게 반짝이는 소중한 기억들이 내 삶을 채우고 있을 것임을... 그날 밤의 나는, 그것을 조용해 배워가고 있었다.



단 1분이 주어진다면, 지금 누구에게 어떤 말을 전하고 싶나요?

또한 가장 기억에 남는 전화 한 통은 무엇이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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