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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와 나는 아직도 서툴다

진밥, 용기 내어 내민 화해의 손길.

by 유화

우리는 살면서 다양한 문제들을 마주한다. 많은 문제 중에서 하나는 단연 사람 관계에서 오는 마찰일 것이다.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는 세상이기에 마찰이 없을 수는 없다. 이 말은 가정 내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가깝고 친밀할수록 우리는 쉽게 상처를 주고받는다. 다른 사람들에게 요구하는 것보다 더 높은 이해를 당연하게 요구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대하는 것보다는 박하게 대하다 보니 쉽게 상처를 받는 것이 아닐까.


우리 집은 화목한 가정이었지만 그렇다고 마찰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부모님과 특히 아버지와 마찰이 있을 때마다 내게 가장 불편하게 다가왔던 것은 대화의 부재였다. 아버지와의 갈등이 해결되지 않은 채로 가족이 다 같이 식사를 한다거나, 거실에서 아버지와 눈이 마주치는 상황이 힘들었던 것이다.


나는 어색한 기류를 피하기 위해 바깥에서 밥을 먹고 들어오고, 내 방에 들어가면 나오지 않았다. 물론 불편함의 원인이 무엇인지조차 모르는 것은 아니다. 서로가 불편함의 원인이 무엇인지는 짐작한다. 하지만 짐작하는 것이기에 문제가 된다.


평상시의 대화에서는 문제가 없다. 하지만 아버지께서 내가 하는 것들에 대해 이런저런 말씀을 시작하시면 나는 마치 고슴도치라도 되는 양 가시를 곤두세우고 방어적으로 대응한다. 한차례 폭풍 같은 공방을 주고받으면 나는 늘 하던 대로 사과를 드리고, 아버지께서는 쉽사리 풀리지 않는 냉전이었다.


어떤 마음으로 이야기를 시작한 것인지, 그 이야기를 듣는 사람은 어떤 마음인지 모른다.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전하고 싶은 것인지는 사라진다. 그저 한쪽은 비교대상보다 얼마나 부족한지만 알게 되고 다른 한쪽은 대화가 성립되지 않음에 답답함만 가중될 뿐. 아무것도 바뀌지 않고, 서로가 감정만 상한 채로 끝이 난다.




대학교 2학년 1학기 여름의 초입. 컴퓨터를 아예 내 방으로 옮겼어야 했는데 거실에 두었더니 문제가 되었다. 게임을 하는 자녀의 뒤통수는 늘 부모님의 한소리를 부르니 말이다. 평소였다면 아버지가 집에 오시면 주섬주섬 컴퓨터를 정리하고 방으로 들어가곤 했는데 그날은 달랐다. 나는 변하지 않았는데 아버지가 계시고, 계시지 않는다고 다르게 행동하는 것이 너무 비겁해 보였기에 인사만 드리고 그냥 게임을 했다. 방으로 들어가시는 소리가 없던 것을 보면 아버지는 여전히 거실에 계신다. 뒤통수가 따갑다. 시간이 흐르고 아버지께서 말씀하셨다.


넌 앞으로 뭐가 하고 싶으냐?!



갑자기 들어온 질문에 나는 당황한다. 엄청 긴 시간이 흐른 것 같다만 실제로는 한 5초 정도 흘렀을까, 손으로 멀티탭의 스위치를 그냥 꺼버린다. 퍽하고 꺼져버리는 컴퓨터를 뒤로하고 돌아서서 아버지를 마주한다. 이미 뭐라고 말씀하시든 다 튕겨내겠다는 각오를 다진 상태다.


그냥 내가 알아서 할게요~!


이미 각오를 다졌기에 결코 말이 곱게 나오지 않는다. 그렇다고 갑자기 이런 질문을 받고 PPT 발표하듯 1년 5년 10년 계획을 줄줄 말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어머니와의 대화가 서로 동등하게 협상테이블에 앉아 나누는 대화라면 아버지와의 대화는 내가 저울 위에 올라가서 나누는 대화 같다. 곧 있으면 나와 비교할 누군가가 등장할 것이다. 이번에는 아버지 지인의 아들이다. 나보다 형인데 참...


아, 게임 안 해. 안 할 테니까 그만하세요.
그리고 내 인생 아빠한테 대신 살아달라고 안 할 테니까
딴 집 아들 얘기는 이제 그만하시라고요.


거칠게 일방적으로 대화를 끊어내고 돌아서는 내 귓가에 '얘기만 꺼내면 날카롭게 곤두선다'라는 아버지의 말씀이 들린다. 내 입에서 나온 말이 곱지 않다는 것은 알지만 당장은 죄송하다는 사과도 나오지 않는다. 저녁이 되었다. 엄마는 김치찌개를 끓이셨다. 나는 식탁에 앉아서 밥 먹기에 앞서 아까 심하게 말씀드린 것에 대해 죄송하다고 아버지께 말씀드렸다.


뭐 네 인생이라는데 내가 뭘...



이 말씀이 마지막이었다. 마음이 상하신 게 분위기로 느껴진다. 사흘정도 지났을까 학교는 오후 수업만 있어서 오전 내내 집에 있었다. 밥통은 비어있다. 아버지와 어색함이 싫었기에 쌀을 씻어 밥솥에 안친다. 나름 평평한 곳에 두고 눈금에 물을 맞췄는데 물 양 조절에 실패했는지 죽 까지는 아니지만 많이 진밥이 되었다.


조금이라도 살려보려고 밥솥 뚜껑을 열어둔 채 점심을 먹었다. 대여섯 숟가락 떠먹어 보다가 더 먹지 못하고 치운 채 학교에 갔다. 아버지께는 밥을 차려 두었으니 오셔서 식사하시라는 문자를 남겼다. 수업이 끝나고 용기를 내어 전화를 걸었다.


식사는 하셨어요? 진밥을 하려던 것은 아니었는데
물 조절에 실패했어요.



밥이라도 좀 고슬고슬하니 잘 되었으면 좋았을 것을 거의 죽밥을 만들어 놓고 말을 꺼내려니 쉽지가 않았다.



네가 해놓고 간 밥이라 맛있었다.
그리고, 아빠가 미안하다.



진밥을 살려보려고 나름 뚜껑도 열어두었다는 등의 그 어떤 변명도 필요치 않을 아버지의 말씀에 나는 목이 잠겨왔다. 진심은 서로를 걱정하고 위하는 마음이었지만 방식이 서툴렀던 아버지와 나였던 것이다. 누가 먼 저랄 것 없이 망설임을 깨고 한걸음 나아갈 용기만으로 이렇게 관계가 회복되기도 하는 것을 경험한다. 아버지와 나는 여전히 서툴다. 하지만 서툴다는 것을 핑계로 멈춰있지 않는다. 우리는 매 순간 조금 더 나은 모습으로 한 걸음씩 내딛는다.


내가 게임을 했던 이유는 경험치를 쌓고 레벨 업을 하며 좋은 아이템을 착용하는 것으로 내 캐릭터가 강해지는 것을 눈으로 바로 볼 수 있는 것이 좋아서였다. 가시적인 성장은 곧 성취감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씨앗은 심는다고 바로 뿌리가 나오는 것이 아니고 물 몇 컵과 비료 몇 그램이 채워진다고 바로 1cm가 자라지도 않는다. 자라는 것이 바로 나타나지 않는 식물과 같이 바로 확인할 수 없는 나의 성장이 답답했다.


내가 뭘 하고 싶은지, 앞으로 무얼 하며 살아야 할지 고민도 걱정도 많았다. 하지만 바로 답이 나오는 것이 아니기에 애써 외면하고 게임으로 시선을 돌렸던 나였음을 스스로가 알기에 아버지의 말씀에 더 과하게 반응했다.



죽밥이 뭐가 맛있다 그래요...!
다음번에는 제대로 된 밥으로 차려드릴게요!
이따 집 가서 뵐게요.



다음 수업을 위해 실험 실습동으로 넘어가기 위한 구름다리 입구, 초록색 폴리카보네이트 지붕을 통해 보이는 눈부신 햇살, 시끌시끌 떠드는 학생들의 소리, 핸드폰 너머로 들리는 아버지의 웃음소리. 아버지와 아들. 서로가 용기 있게 내디딘 한 걸음으로 인해, 이 모든 것이 나에게로 다가와 의미가 되었고 따스한 추억으로 남았다.



관계를 회복하려 서툴지만 내민 당신의 '진밥'은 무엇이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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