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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컸다는 착각과 어른의 그늘

수능 당일, 신분증 하나에 무너질 뻔했다.

by 유화

어린 시절이라면 누구에게나 부모님께 '나는 다 컸다'라고 말하던 시기가 있을 것이다. 나 또한 그런 시기가 있었다. 처음으로 혼자 라면을 끓이고 계란후라이를 할 수 있었던 초등학교 3학년 이후 줄곧 부모님께 이제 다 컸다는 말을 달고 살아왔다. 이번에는 다 컸다고 말했던 고등학교 3학년의 내가 어떤 사고를 쳤는지 소개해보려고 한다.


시간은 참 빠르게 흘렀다. 전단지 아르바이트를 하겠다던 중학교 1학년은 곧 고등학교는 꼭 남녀공학을 가겠다던 중학교 3학년이 되었고, 어느덧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다녀온 고등학교 2학년이 되었으며 이제는 수능을 앞둔 고3 수험생이 되었으니 말이다.


학원 하나 다니지 않고도 학급에서 적어도 1/3 안에는 들 수 있다는 것은 충분히 말이 되는 얘기다. 내가 그랬기 때문이다. 내가 잘했다는 자랑을 늘어놓고 싶은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공부에 대한 열망을 갖고 학원도 다니면 다들 잘할 수 있을 거라는 말이었다. 자녀가 더 좋은 결과를 내었으면 하는 욕심이 있는 부모님이라면 학원을 보내기도 하셨겠지만 어머니 아버지께서는 그저 노력하는 나를 격려해 주셨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형편이 어려워서 학원을 가지 못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때 경험했던 따돌림은 중학생이 되며 선생님 말씀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들었다. 재미있는 사람이 되고 친구들을 많이 만들기 위해서 내가 택했던 것은 장난이었다. 그 장난은 학교뿐만 아니라 학원에서도 이어졌는데 처음 1~2개월은 학원에서 분위기를 익히며 아주 수업을 모범적으로 들었다. 나 때문에 수업할 맛이 난다며 선생님께서 집으로 전화를 하실 정도였으니 말 다 했다. 하지만 적응이 끝나면 본격적으로 장난을 쳤다. 쉬지 않고 떠들며 애들과 선생님을 웃기는 통에 학원에서는 도저히 수업을 진행할 수 없었다. 주의는 경고가 되고, 경고는 얼마 못 가서 부모님께 학원에 나를 보내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전화가 되었다. 중학교 3학년 때 '네 학원비가 대체 얼마인 줄 아느냐'라는 어머니의 책망에 '나한테 투자 그만하시고, 동생이나 밀어주시라'는 말씀을 드린 이후 부모님께서는 더 이상 내게 학원 가라는 말씀을 하지 않으셨다.


그렇게 3년의 시간이 흐르고 대망의 2007년 수능 하루 전날이 되었다. 밤 10시까지 독서실에서 공부를 하고 집으로 돌아온 나는 냉장고에서 찹쌀떡을 연달아 3개나 꺼내 먹었다. 원래도 찹쌀떡을 좋아했는데 수능 덕분에 여기저기서 선물로 주셔서 찹쌀떡 수급만 끊이지 않는다면 매년 수능을 보고 싶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내일 컨디션을 위해 이만 들어가 자라고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말씀에 나는 수험표를 머리맡에 두고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날, 아침에 뭐 하나 빠뜨린 것 없이 잘 챙겼냐는 아버지의 걱정 섞인 물음에 몇 번 건성으로 대답을 하다가 나는 결국 아버지께 짜증을 냈다.



내가 애도 아니고! 나도 다 컸으니까
걱정은 붙들어 매셔!



가방도, 도시락도 모두 챙기고 손에 든 수험표를 팔랑팔랑 흔들며 나는 아버지 차에 몸을 실었다. 시험장 앞에 도착하여 최선을 다하라는 부모님의 말씀에 손을 흔들며 차가운 공기를 깊이 들이마셨다. 저기 앞에는 담임선생님께서 보였다. 사물놀이 동아리 후배들도 북을 들고 나와서 응원해 주었다. 종이컵에 담긴 뜨끈한 어묵 국물을 들고 담임 선생님 옆에서 수다를 떨고 있다가 넌 안 올라가냐는 담임선생님의 핀잔에 나는 시험장으로 들어갔다. 나는 확실히 긴장하면 말이 많아지는 것 같다. 책상 옆에 가방을 걸어 놓고도 친구들 자리로 가서 들뜬 기분을 주체하지 못하고 떠들었으니 말이다. 결국 내가 자리에 앉을 수 있었던 것은 감독관이 시험장에 들어오시고 난 후였다.


수능에 관한 안내 사항을 일러주던 감독관은 이제 모두들 책상 위에 신분증과 수험표 등 시험에 필요한 것을 제외하고는 전부 집어넣으라는 말씀을 하셨고, 나는 신분증을 꺼내기 위해 가방을 열었다.


가방 속에 보이는 것은 익숙한 문제집과 공책이었다. "하... XX 조졌네" 입에서 나직이 욕지기가 튀어나왔다. 그것은 수험용 가방이 아니라 독서실에 갈 때 들었던 가방이었던 것이다. 온몸에서 피가 빠져나가는 느낌 속에서 호흡은 가빠졌다. 지갑은 이 가방이 아닌 다른 가방에 있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몸은 그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듯 내 손은 의미 없이 가방 속을 뒤적이고 있었다.


스스로를 자책해 봤자 아무것도 변하지 않건만 이 순간에는 무엇이든 탓할 대상을 찾고 싶었던 내 머릿속에는 나도 다 컸다고 말하며 아버지께 짜증을 내던 모습이 떠올랐다. 이내 담임선생님과 농담 따먹기를 하던 모습에 이어 그리고는 후배들 앞에서 니들도 1년 금방이라며 너스레를 떨던 모습, 시험장에 도착하고서도 친구들 자리로 가서 떠들던 모습이 그려졌다. '아오 이 답도 없는 새끼. 가방도 한번 안 열어 보고 뭐 했냐' 더 이상 자책은 할 수 없었다. 어느덧 감독관은 내 앞에서 수험표를 확인하고 신분증을 요구하였기 때문이다.



하... 제가 신분증을 집에 두고 온 것 같습니다.



내가 말을 내뱉음과 동시에 여기저기에서 헛바람을 들이켜는 소리와 함께 막힌 담이 허물어지듯 탄식이 터져 나왔다. 시험장의 천장이 빙그르르 도는 것을 느끼며 나는 어지러움에 눈을 질끈 감았다. 눈앞에는 각목 쪼가리가 들어있는 녹슨 페인트 깡통이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타고 있었다. 나는 종이컵에 담긴 믹스커피를 홀짝이며 추운 손을 비비고 있었다. 이곳은 새벽 인력사무소였다.


'아, 수능은 못 보고 쫓겨났구나, 대학은 당연히 못 갔고, 나는 인력소에 나온 건가?' 막막한 상상 속에 빠져들던 나는 이내 감독관의 말씀에 눈을 떴다.


"어서 행정본부에 가서 신분증 가져오시도록 집에 연락하세요."


후들거리는 다리로 어떻게 행정본부로 도착했는지 모르겠다. 본부 유선 전화를 통해 아버지 핸드폰 번호를 몇 번이고 누르려했지만 떨리는 손은 자꾸 엉뚱한 번호를 눌렀다. 떨지 말라며 나를 안심시키는 관계자의 말씀은 하나도 위로가 되지 않았다. 모르는 번호라고 전화를 받지 않으시면 어쩌나 하는 걱정 했지만 신호음이 세 번인가 울렸을 즈음 아버지께서는 전화를 받으셨다.


이런 전화는 받아보지 못한 부모들이 대부분이겠지만 덜렁대는 아들 덕에 우리 아버지는 그날 상당히 특별한 경험을 하셨을 것이다.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아버지의 당황한 목소리는 이내 바로 가겠다는 짧은 대답과 함께 끊겼다. 아버지께서 신분증을 가져오시기만을 기다리며 나는 창밖에 보이는 텅 빈 운동장과 교문만 바라보고 있었다. 째깍거리며 귓가에 울리던 시계 초침 소리가 느려지더니 이내 시간이 아예 멈춰버린 것은 아닐까 싶었던 순간, 운동장에 먼지를 일으키며 하얀 자동차 한 대가 달려오는 것을 보았다. 아버지였다.


신분증을 확인받고 시험장으로 돌아와 자리에 앉았다. 언어영역 듣기 평가에 대해서는 그저 여섯 문항 모두 찍고 시작했다는 것 외에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 '수능 조졌다.'라는 생각에 다 때려치우고 싶었지만 한편으로는 '이게 그렇게 큰일인가' 싶은 생각 또한 들었다.


이것은 큰일이 맞다. 고등학생 기준에서 큰일은 맞는데, 아무리 큰일이라도 앞으로 인생을 살아가며 맞닥뜨릴 일들은 이것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자 비로소 마음을 다잡고 수능에 임할 수 있었다.


수능이 끝났다. 신분증을 집에 두고 오는 사고를 쳐 놓고도 친구들과 놀 생각에 부풀어 집에 들러 지갑만 챙겨 다시 나온 나였다. 친구들과의 대화 주제는 당연히 '시험도 못 보고 쫓겨날 뻔했던 나'였다. 사람들은 그래서 수능 성적은 어떻게 나왔는지가 궁금할 수도 있다. 성적은 정말 감사하게도 그렇게 나쁘진 않았다. 수시 때 그렇게 매번 예비 번호에 이름만 올려두고 떨어졌던 간호학과에도 원서를 넣어볼 수 있지 않을까 싶은 정도였다. 하지만 담임선생님 말씀을 따라 수시 원서 하나를 안전한 전기과에 넣어두었는데 그게 합격했기에 다른 곳은 볼 것도 없이 코가 꿰었다.


우리는 살면서 정말 많은 경험을 한다. 우리 앞을 가로막은 크고 높은 문제와 때로는 하늘이 무너질 것만 같았던 경험도 지나서 돌이켜 보면 그래도 넘을만했다는 것, 살면 그런대로 살아진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런데 한 가지 점점 자신이 없는 것이 있다. 사랑하는 부모님의 아들, 우리 집 장남이었던 나는 이제 한 여자의 남편이 되었고, 두 아이의 아빠도 되었는데 나이가 들어갈수록 '나는 다 컸다.'라는 말을 내뱉을 자신이 없다.


초등학교 3학년 때는 스스로 라면을 끓일 수 있게 되자 부모님께 나는 다 컸다고 외쳤다. 그런데 자라면 자랄수록 세상은 너무나 넓고, 아직 모르는 것으로 넘쳤으며, 너무 빠르게 변해간다. 이 세상을 살며 기댈 수 있는 진정한 어른, 부모님이 계시다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소나기 속에서 잠시 비를 피할 짧은 처마를 만난 것처럼 잠시 쉼을 얻는다. 다 큰 어른이 아닌 아직은 더 자라야 할 아이의 모습으로 말이다. 그런 부모님이 계시다는 것에 이 아들은 오늘도 감사를 기억한다.



당신은 언제 '나는 다 컸다'고 믿으셨나요, 그리고 무엇이 그 믿음을 바꾸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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