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할 수 있는 삶
만족하는 삶이란 어떤 삶일까, 우리는 살면서 다양한 모습의 허기와 갈증을 경험한다. 고등학생 시절 내가 마주했던 허기와 갈증은 돈이었다. 처음 겪어보는 진지한 고민 속에서 어찌할 바를 모른 채 답답함으로 속이 꽉 막혀서 한숨조차 쉽사리 나오지 않던 그날 나는 어머니와 함께 공원 벤치에 앉아있었다.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공원 벤치였는데 어찌하여 어머니와 내가 함께 앉아서 하늘을 분홍빛으로 물들인 저녁노을을 바라보고 있었는지는 아쉽게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노을이 너무 아름다웠기 때문일까 꽉 막혀있던 속에는 작은 균열이 생겼고 그 균열을 통해 말이 튀어나왔다.
엄마, 나 고민이 있어요.
내가 말하기 전부터 분위기를 심상치 않게 잡았던 탓일까 어머니께서는 화들짝 놀라시는 것 대신 무슨 고민이 있는지 조용히 되물으셨다. 작은 균열로 나온 말에 들을 준비가 되었다는 듯 차분한 어머니의 목소리를 듣자 내 안에 있던 균열은 이내 둑이 터지는 것처럼 막힌 것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하고 싶은 것도 많고, 사고 싶은 것 또한 많다. 하지만 돈이 없다. 우리 집의 형편을 알고 있기에 매달 주시던 용돈의 귀중함을 안다. 하지만 그 귀중함을 아는 것이 허기와 갈증을 채워주지는 못했다. 부모님을 원망하는 것이 아니었다. 나의 원망의 대상이자 답답함의 원인은 바로 끝날 줄 모르는 갈망에 사로잡힌 나 자신이었다.
내가 가장 중요히 여기던 가치는 바로 자유였다. 선택의 자유. 매일 라면만 먹고산다 해도 내가 라면을 먹기로 선택한 것이라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라면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나는 자유를 빼앗겼다고 느꼈고 그것이 나 스스로를 꺾었다.
쉬는 시간이면 친구들 MP3를 빌려서 음악을 들으며 더 이상 MP3를 빌려서 듣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그때부터 나는 마치 커다란 모래시계 속에 갇힌 것처럼 내가 갖지 못한 것들이 고운 모래처럼 떨어져 나를 덮는 것을 느꼈다. 비관하는 마음은 사람의 눈을 가리고 생각마저 비튼다. 어느덧 내 안에서는 군것질을 딱히 좋아하지 않았기에 가지 않던 매점도 돈이 없어서 못 가는 것이 되었다.
비관하는 마음속에서 알게 된 것이 하나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어려움과 힘듦이란 절대적이지 않다는 것이었다. 세상에는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있다. 그들 중에는 나보다 상황이 나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나와 비슷한 사람도 있고, 나보다 더 어려운 사람도 있다. 짊어진 짐의 크기가 곧 어려움이라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다. 왜냐하면 어려움은 절대 수치화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한 가정을 책임지는 가장은 모든 어려움을 감내하고 이겨내겠지만 세 살배기 어린아이는 이불로 만들어 놓은 경비실이 무너지는 것을 보며 곧 세상이 무너지는 것처럼 느낄 수도 있는 것이니 말이다.
사고 싶은 것들은 너무 많은데, 내가 돈이 없어.
내가 나중에 돈을 벌어도 이것은
여전히 변하지 않을 것 같아서 고민이에요.
앞으로 내가 자라서 대학도 가고, 군대도 다녀오고, 취업도 하게 되었을 때 상황이 나아질 수만 있다면 당장 내 눈앞에 보이는 어려움은 그냥 참고 넘길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런 허기와 갈증이 계속 따라올까 봐, 앞으로도 나는 쭈욱 선택하지 못하는 것들에 둘러싸여 말라갈 것이 겁이 났던 것이었다. 이야기를 하며 내 감정을 한 꺼풀 한 꺼풀 벗겨 보니 나를 가득 채웠던 것은 두려움이었다.
그런 나에게 어머니께서는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어머니께서는 일을 하실 때, 월급날이 되면 레코드판을 하나씩 사서 모으셨다고 한다. 쉽게 얻은 것은 마음에서 쉽게 사라지고, 어렵게 얻은 것은 그만큼 마음에 오래 남는 것처럼 한 달의 시간과 노력이 담겨 있는 레코드판이었기에 그 기쁨과 뿌듯함은 이로 말할 수 없었다고 하셨다. 어머니께서는 내게 한 가지를 강조하셨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진열대에 꼽혀있는 수많은 레코드판이 아닌 내 손에 들린 한 장의 레코드 판이라는 것을 말이다.
어머니와 나눈 대화를 통해 나는 다시 자유를 얻을 수 있었다. 우리는 종종 내가 갖지 못한 것을 바라보며 정작 이미 손에 들린 소중함은 모르고 있을 때가 많다. 갖지 못한 것을 향한 비관이 나를 덮고, 그걸 가진 이들을 보며 비교까지 한다면 우리는 한없는 바닥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이때 필요한 것은 내가 이미 가진 것에 대한 감사다. 감사할 때 우리는 비틀린 시각이 아닌 올바른 시각으로 삶을 바라보게 된다. 비로소 삶의 진정한 기쁨과 즐거움을 맛보게 되는 것이다.
제일 맛있는 귤을 먹는 방법을 아는가? 그것은 바로 귤 상자에서 제일 맛있어 보이는 귤을 고르는 것이다. 아까운 마음에 곧 상할 것 같은 귤을 골라 먹는 사람은 귤 한 상자를 다 먹기까지 계속 썩기 직전의 귤 밖에 먹을 수 없다. 반면 제일 맛있어 보이는 귤을 선택한 사람은 매번 제일 맛있는 귤을 먹는다. 가질 수 없어 마음을 상하게 만드는 귤보다 지금 내 앞에 놓인 맛있는 귤을 선택하는 것.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생각이 들 때마저도 내게는 여전히 감사를 택할 수 있는 자유가 있었던 것이다.
그날 이후로 내 삶에 허기와 갈증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종종 찾아와서 내 마음을 어지럽히고 나를 힘들게 하였다. 하지만 그것은 오래가지 않았다. 감사를 선택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레코드판 이야기 덕분에 아들은 감사를 배웠다.
지금 당신 손에 이미 쥐고 있는 한 장의 레코드판은 무엇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