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평범함을 싫어했을까

by 능소니

기억나지도 않는 오래전부터 나는 개명을 하고 싶었다. 내게는 뜻도 좋고, 엄마가 고심해서 지어준 소중한 이름이 있었음에도 말이다.


그 이름은 무척 흔했다. 20년 내내 그 해의 신생아 인기 이름 top10에 내 이름이 들어가 있을 정도였다. 중학교 때는 우연찮게 성만 다른 나와 같은 이름의 친구들 4명과 같은 반이 된 적도 있었다.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리면 그곳엔 언제나 동명이인이 있었다. 불리고는 있지만, 나를 지목하지 않는 감각. 언제든 대체 가능한 존재가 또 있다는 사실은 어린 내게 '존재의 불안'을 심었다.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내가 '평범한데 특별해지고 싶어서 아등바등하는 아이'가 된 것은.


그것은 허영이나 잘난 척이 아니었다. 그저 한 번만이라도 나라는 존재가 겹쳐지지 않고 사라지지 않기 위한 필사의 몸부림이었다.


사람들은 흔히 특별해지고 싶은 마음을 우월감이나 욕심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나에게 평범함에 대한 거부감은 '공포'에 가까웠던 것 같다. 이름만으로는 나를 드러낼 수 없다는 결핍 외에도 조울증 기질은 내게 극단적인 두 세계를 보여주었다.


어떤 날은 남들보다 훨씬 선명하고 비상하며 날카로웠지만, 어떤 날은 바닥까지 침전했다. 내 뇌는 본능적으로 학습했다. "높이 올라가야 안전하다. 평지는 추락하기 직전의 상태일 뿐이다."


경조증의 파도를 탈 때의 나는 호쾌하고, 명료하며, 매력적이었다. 주변에서 들리는 찬사는 독이 든 성배였다. 그 순간부터 본능적으로 내게 평범함은 인정과 관심을 모두 잃게 될지 모른다는 상실의 징후가 되었다.


결국 나의 '평범함 혐오'는 취향이 아니라, 기분의 진폭이 만든 학습이자 나를 지키기 위한 방어 전략이었다.



치료를 시작하고 기분의 파도가 잦아들자, 내가 그토록 혐오하던 '평범함'이 일상을 가득 채웠다. 예전에는 평범해지더라도 곧 다시 솟구칠 것이라는 예감이 있었거나, 혹은 떨어질 것이라는 긴장감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평범함은 지속된다. 고양도, 추락도 없는 이 고요함 속에서 나는 불안을 느낀다.


"이게 정말 나인가? 아무런 색깔도 특징도 없는 이 모습이 나의 진짜 얼굴인가?"


이것은 단순한 기분 탓이 아니다. 정체성의 공백에서 오는 존재론적인 불안이다. 내가 싫어했던 것은 평범함 그 자체가 아니라, 평범해졌을 때 나를 아무도 주목하지 않을까 봐, 내가 먼지처럼 사라져 버릴까 봐 두려웠던 것이다.


머리로는 이해한다. 내가 붙잡고 있던 '특별함'이라는 밧줄이 사실은 나를 옥죄고 있었다는 것을. 하지만 마음은 아직 그 밧줄을 놓을 준비가 되지 않았다.


누군가는 "이제 평범함을 사랑하라"고, "새로운 삶의 방식을 채택하라"고 쉽게 말할지 모른다. 하지만 나에게 그것은 배신처럼 느껴진다. 비록 나를 망가뜨렸을지언정, 그 치열했던 자극과 열망들이 나를 여기까지 데려온 것 또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지금 내 마음은 의리를 저버리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평범해도 사라지지 않는 사람이 된다"는 말이 아직 와닿지 않는다. 여전히 짧고 굵은 삶에 마음이 가고, 밋밋한 오늘의 내가 낯설어 견딜 수가 없다.


다만 한 가지 달라진 것이 있다면, 이제는 내 오랜 신념을 조금씩 '의심'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이 의심은 변절이 아니라, 새로이 자리할 신념이 자리 잡기 위한 공간을 만드는 과정이라고 나를 달래면서.


"나는 여전히 짧고 굵은 삶을 동경하지만, 이제는 예전처럼 그곳에 내 전부를 걸 자신이 없다."

이 불완전한 문장이 전환점에 서 있는 지금의 나에게는 가장 정직한 결론이다. 오늘은 이 정도의 이해만 서랍 속에 넣어둔 채, 다시 올 이 지루하고 평범한 밤을 견뎌보기로 한다. 이해가 먼저 오고, 감각은 나중에 따라오는 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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