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된 감각
조울증 치료를 시작하고 나서, 내 인생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게' 되었다.
폭발적인 영감도, 밤을 지새워도 쌩쌩하던 무한한 에너지도, 내가 세상의 주인공이 된 것 같은 명료한 확신과 고양도 사라졌다.
우울 삽화가 생기고 나서 조울증을 깨달은 만큼, 치료를 하면 우울하기 이전의 나로 돌아갈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나는 예전의 나로 돌아가지 못하고 낯선 나를 마주하게 되었다.
지겨움을 견디며 꾸준히 무언가를 하는 나. 뜨거운 몰입도, 바닥을 치는 무기력도 없어진 잔잔한 평온함 속에서 불안이 고개를 들었다.
나는 혹시 무난하고 평범한 겁쟁이가 되어버린 걸까?
조증은 단순히 기분이 좋은 상태가 아니다. 그건 속도와 확신과 감정의 고양이 한 번에 휘몰아쳐 돌아가는 엔진이면서, '지능의 체감값'을 왜곡하는 정교한 엔진이다. 사고 흐름은 빛의 속도로 흐르고, 피로 인식은 고장난다.
우울의 터널을 지나온 뒤 돌아본 그 이전의 시절은 '가장 나다웠던 전성기'처럼 보였다.
오랜 모토인 '짧고 굵은 삶'에 걸맞게, 순간에 최선을 다하고 불태우는 감각. 그 감각이 아른거리는데, 다시 돌아올 기미가 보이지 않자 상담실을 찾아가 온갖 심리검사를 진행했다. 나에게 아직 내가 남아있을까?
결과적으로 TCI(기질 및 성격 검사지)에서 높았던 '자극 추구'는 주춤했고, '위험 회피'는 이전보다 높아졌다. 마주하기 싫은 현실에 상담 선생님은 좋아졌다고 나를 달랬다.
그동안에는 엑셀만 밟고 달리는 자동차였다면, 이제는 브레이크가 달려서 좀더 완성도가 높은 자동차가 된 것이라고. 조증의 '가짜 전능감'은 뇌가 과부하로 타들어가도 계기판에는 '상태 최상'만을 가리키게 했던 위험한 착각에 불과하다고 말이다.
짧고 굵은 삶, 뜨거운 몰입. 그것은 불꽃놀이였다.
나의 미학적 선택이 아니라 사실은, 내일이 올 것이라 믿지 못했던 자의 고육지책이었다. 언제 에너지가 꺼질 지 모르는 또다른 불안감이 만든 생존 전략이자 재현할 수 없고, 지속할 수 없는 컨디션에 철저히 의존해서 나타나던 성과.
하지만 지금은 일상이 피로하며 지루하다. 나는 이것을 '집중력 저하'라 불렀지만, 이것은 '경고등의 복구'였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이 고요한 일상은, 현재를 유지하고 오래 가는 삶을 선택할 자유를 선사한다.
정보 처리 속도는 느려졌지만, 안정적이다. 이제는 결론을 내리기 전 "잠깐만"이 자동으로 붙는다. 자기 설득 대신 자기 검증을 하면서 나는 예전보다 덜 확신하고 덜 뜨겁다. 대신 더 오래 생각하며 더 오래 남고 오래 쌓는다.
이제서야 비로소 '다음'을 전제할 수 있게 된 나는, 새로운 용기를 기르고 있다. 한계를 무시하고 밀어붙이는 과거의 파괴적인 용기 대신 멈출 줄 아는 용기, 흥분 없이 일상을 유지하는 용기. 그래서 지속 가능한 용기.
나는 이제 한 번 화려하게 타오르고 재가 되는 사람이기를 포기했다. 대신, 언제든 꺼진 불씨를 다시 지필 수 있는 사람이 될 것이다.
겁쟁이 - 이것은 자기비하가 아니라 상실감에 붙은 임시 이름이다.
나는 무언가 잃었고, 잃은 감각은 강렬했고, 나를 살게도 하고 또 망가뜨렸다.
그러니 이것은 병리도, 실패도 아니고 전환기의 정상적인 애도 반응일 터이다.
이제 나는 애도가 나약함의 상징이 아님을 안다. 현재, 나는 과거와 미래의 나를 통합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