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우울증이 심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진단명이 바뀌었다. 다름 아닌 '양극형 정동장애 2형', 옛날 용어로는 조울증, 조울병이다. 조울증이 인식의 왜곡을 가져올 수 있어서 이름이 바뀌었다는데, 한국 사회 인식상 '양극형 정동 장애'가 더욱 왜곡된 인식을 가져오지 않나? '장애'라는 낙인 효과가 발생해서 다들 꺼릴 것 같은데 말이지.
어찌 됐건 우울증이 오래되었고 치료도 받았는데 전혀 진전이 없다 싶더니, 조울병이란다. 오진이 가장 흔한 질병 중 하나인 만큼, 초기에는 우울증으로 진단받기 쉽다. 나 역시 병원에 처음 내원한 이유는 초조하고 불안하고 가슴이 너무 쿵쾅거려서 잠을 이루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집중력이 떨어지고 우유부단해져서 일상생활에 지장이 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받은 우울증 약을 먹는데도 증상은 도통 나아지지 않았다. 공적인 영역에도 점차 영향이 가자 이내 숨고 싶어졌다. 어느새 불면은 과수면으로 바뀌었다. 18시간씩 사흘을 내리 잘 때도 있었고, 몇 안 되는 깨어있는 시간에는 무얼 봐도 발작처럼 눈물이 나왔다. 원체 흥미 없던 온갖 SNS 계정을 만들고 쇼츠와 릴스를 반복적으로 스쳐 보았다. 나중에는 기초적인 씻는 생활조차 어려울 정도로 삶에 활력이 없었다.
낮의 시간을 거의 활용할 수 없다 보니 병원에 다시 가는 데에도 정말 오랜 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막상 바뀐 진단 하에 다른 약물치료를 시작하니, 가파르게 상태가 좋아지고 있는 중이다. 동면하다시피 몇 개월을 날린 게 꿈결 같고 아직 실감이 나지 않는다. 해당 기간 동안의 기억은 위의 생활이 전부이다. 우울증은 이제 만인의 질병이 된 것 같은데, 이 조울병은 아직 그렇지 못한 것 같다. 나를 그렇게 괴롭히고 거짓말같이 자취를 감추고 있는 조울병은 대체 무엇인가?
양극성 장애는 1형과 2형으로 나뉜다. 조증과 우울증이 교대로 나타나면 1형, 경조증과 우울증이 교대로 나타나면 2형으로 구분한다. 조울병은 대체로 1형을 일컫기는 한다. 양극성 장애 대부분은 우울 삽화로 증상이 시작되는 경우가 많다. 조증 삽화로 병원에 오는 경우는 망상 장애나 조현병 수준의 심각한 상태가 대부분이다.
경조증은 말 그대로 경미한 수준의 조증을 의미한다. 그렇지만 기본적으로 조증 삽화는 자존감의 증가와 수면에 대한 욕구 감소, 사고의 비약, 주의 산만, 목표 지향적 활동 증가, 리스크가 큰 활동에 지나친 몰두 등이 있다. 돌이켜보면 나 역시 우울 삽화 때 병원을 찾았을 뿐, 약한 정도의 앞선 증상은 항상 있어 왔다. 그래서 나를 스스로 ADHD로 여기기도 하고, 멀쩡한 뇌파 검사에 의아해하기도 했다.
동시에 경조증 상태는 에너지가 넘치기 때문에 해당 상태의 나를 긍정적으로 여겼다. 때문에 나처럼 경조증 삽화를 치료하기 싫어하는 사람도 왕왕 있다고 한다. 하지만 조증 삽화 뒤에는 우울삽화가 오기 마련이고, 양극성 장애의 우울 삽화는 일반 우울증보다 증세가 심각하고 예후가 좋지 않다. 따라서 양극성 장애는 꼭 치료가 필요하다. 더욱이 양극성 장애는 재발이 잘 되는 만큼, 꾸준한 관리도 함께 해야 한다.
양극성 장애는 최근 들어 유전적 요인이 큰 영향을 준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나 같은 경우에는 가족과 친인척 중에 비슷한 증세를 가진 사람은 없었다. 이는 하나의 특정 유전자 이상으로 발병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가족력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더라도 여러 인자를 통해 나에게만 발현될 수 있다. 씨앗이 땅에 묻혀 있더라도 발아하려면 햇빛과 물이 필요하듯, 발현 시기와 양태도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나는 이전에 40일이 걸릴 일을 4일 만에 끝내고, 4시간이면 될 일을 40일이 걸리기도 했다. 이제 겨우 제대로 된 약물치료를 시작한 지 보름째지만, 나는 더 이상 엄청나게 할 일에 몰두하지도, 도피하지도 않는다. 옛날의 생산성을 그리워하기보다는 차분히 다음 해야 할 것을 생각하고 침착해지고 있다. 조울병은 기분안정제가 1차적으로 투입되기 때문에 증세가 비슷해도 우울증 약하고는 다르다. 혹여 우울증 약으로 효과를 보지 못했다면, 나와 비슷한 유형의 사람이라면 조울병을 의심해 보라.
그리고 나아가자, 앞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