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420 언저리의 기록
폭풍이 지나갔다. 사람이 잠을 이렇게 못 잘 수도 있구나, 싶은 기간이었다. 편집을 하다가 해가 뜨면 촬영을 가고, 뒷정리 후 편집실로 돌아와 자막을 넣고, 어찌저찌 편집을 마치고 시사를 보다가 수정이 왔다는 소식에 달려 나가 종편 그림을 얹는 그런 순간들의 연속. 다 먹고살자고 하는 일인데, 라는 생각은 사치였다. 몸속에 에너지 음료를 채워 넣으며, 진짜 죽을 것 같은 순간에만 회의실에 들어가 이불을 뒤집어쓰고 잠깐 엎드려 눈을 붙였다. 왜 이렇게까지 하게 됐지, 라는, 잠시 미뤄두었던 생각을 이제 드디어 할 수 있게 됐다.
매 프로그램마다 극한을 느끼면서도 그 기록을 또 경신할 수 있다는 사실이 가끔은 경이롭다. 사흘 만에 집에 돌아왔지만 어지러운 집에서 잠들면 쉬는 느낌이 안 들 것 같았다. 마지막 정신을 붙잡은 채 빨래를 돌리고 바닥을 청소한 다음, 한 달 전쯤 받은 생일선물들을 풀어보며 정리하다가 한 후배가 준 책을 꺼내 들었다. <톡이나 할까?>와 <사상검증구역: 더 커뮤니티>의 권성민 PD님 책 <직면하는 마음>. (<사상검증구역: 더 커뮤니티>는 <환승연애>와 더불어 나의 인생 예능 리스트 1위에 올라있다. 다양한 인간 군상을 보여주는 연속성 있는 시리즈물 사랑합니다...) 열두 시간쯤 기절했다가 오랜만에 맨 정신으로 출근하며 읽은 책엔 '왜 이렇게까지...?' 의 해답 같은 말이 적혀 있었다.
... 그게 뭔지 (꼭 보여주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PD 자신도 모를 때가 있다. 그러면 PD도 괴롭고 함께 일하는 동료들도 괴롭다. 확신이 없으니 '일단 만들어서 한 번 보자'가 된다. 이렇게 만들어봤다가 아닌 것 같으면 저렇게도 만들어본다. 일이 두 배, 세 배가 되는데 방송이 나가야 하는 시간은 정해져 있으니 결국 자야 할 시간을 계속 가져다 쓴다. 타협할 수 없는 장면에 공을 들이느라 밤을 새울 때는 다 함께 달려간다는 고양감이라도 있지, 뭘 타협해야 할지 몰라서 헤매느라 밤을 새우고 있는 팀은 곳곳에서 곡소리가 나온다.
<직면하는 마음> 중에서
이 방법이 완전히 틀렸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대본이 없는 예능의 세계에서, 그리고 그 예능에 맛을 들인 시청자들에게 더 높은 수준의 자유도를 보여주려면 완전히 풀어놓고 촬영해야 하고, 그럼 자연스럽게 '일단 만들어서 한 번 보자'가 될 확률이 높으니까. 고민의 중심은 '이 방식을 내가 원하느냐' 일 것이다.
고민을 타고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왜 피디를 시작했는지에 다다른다. 나는 감정적으로든 지적으로든, 좋은 콘텐츠로 누군가의 사고 확장에 기여하고 싶었다. 세상에 이런 사람도 있어? 이런 생각도 있어? 이런 관계가 있어? 이런 세계관이 있어? 라는 반응을 보고 싶었다. 그 대상이 지구 반대편에 존재할 수도 있는 높은 파급력의 콘텐츠는 영상이라 생각했을 뿐, 드라마든 다큐든 예능이든 그 형태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걸 꼭 이렇게 스무 명 가까운 사람들을 갈아 만드는 방법으로 해야 하는 걸까. 갈려야 열심히 하는 존재로 치부되는 70년대식 사고가 당연하지 않은 곳을 원하는데. 모든 케이스를 알고 있는 건 아니지만, 한국 예능계의 대부분은 이 방식이 당연해 보인다. 지상파 3사만 존재하는 몇십 년 전이었다면 중이 절을 떠나야 했겠지만 지금은 2024년 아닌가. 조금 다른 방식과 조금 다른 제작구조를 만들 수도 있을 거라는 희망을 놓기엔 21세기도 1/4이나 지났다.
사소한 것 하나도 타협하지 않는 거장은 마스터피스를 남기지만, 사소한 것 하나도 타협하지 않는 PD가 만나게 될 것은 방송사고이다. 삶이 거장의 예술이면 좋으련만, 실제로는 완성도를 기다려주지 않고 시시각각 다가오는 방송시간에 더 가깝다. 삶은 기다려주지 않는다. 시간이 되면 어떻게든 나가게 되어 있는 방송처럼.
<직면하는 마음> 중에서
그래서 한 번은 해보기로 했다. 예전 같았으면 또다시 대형 프로그램으로 가겠다며 손을 들었겠지만, 이번엔 지금까지와는 조금 다른 방향을 선택했다. 신생 팀에 들어가 아무 베이스도 없는 곳에서 무언가를 만드는 작업. 말 그대로 맨땅에 헤딩하며 뭐라도 지어 올려야 하는 자리다. 이름 있는 큰 프로그램에서 또다시 한 명의 피디로 일하는 것도 물론 자양분이 되겠지만 스스로를 속일 수는 없으니까. 내가 아직 한참 부족해서, 무서워서, 때가 아닌 것 같아서, 각양각색의 이유로 거대한 지붕 아래로 들어가는 안주에 가까웠던 걸 나는 안다.
피디는 크리에이터가 아닌 플래너라고 생각하며 지금껏 왔잖아. 동료들의 이야기를 듣고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어가는 과정 자체를 즐기고 싶어서 여기까지 왔잖아. 이 생각으로 다음 모험을 선택했으니 새 방법을 만들어보고 싶다. 한 번에 잘 되진 않겠지만 어떤 선수가 첫 게임부터 홈런을 치겠어. 어쩌면 실험하고 실패하기에 딱 적합한 때일지도 모른다. 소신을 믿고 나만의 작은 우주를 만들어볼 앞날을 기대하며... 셀프화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