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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제 Mar 15. 2024

역지사지로 편집하기

240315 언저리의 기록


편집 기간이 무르익고 있다. 코멘터리 편집과 종편은 아직 한창이지만 장인처럼 창조해야 하는 가편은 단 한 번 남았으니까. 마침내 절정에 이른 기분이라고나 할까. 지난하고도 지난한 시간이지만 좋은 편집에 대한 생각을 깊이 할 수 있는 기간이기도 했어서, 조금은 시원섭섭한 마음으로 지난 몇 달을 돌이켜봤다.


편집 시작할 무렵의 계절. 전생같다.



좋은 편집 = 보게 되는 편집



이러니저러니해도 결국 좋은 편집은 '보게 되는 편집'이다. 재밌어서든 배울 내용이 있어서든 몰입감이 높아서든, 이유 불문하고 봐지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하루에도 수천수만 개의 콘텐츠가 쏟아지는 세상에서 소비자의 간택을 받고 그 간택을 끝까지 이어가는 힘. 누군가의 시간을 무의미하지 않게 만드는 방법. 이것이 좋은 편집의 정의가 아닐까.


그리고 보통은, 하고자 하는 말이 명확하면 대체로 봐진다. 잘 된 구성으로 촬영만 잘 떠지면 편집이 쉬워지는 것은 이런 이유다. 이렇게 편집할 것임, 에서 출발하는 것이 촬영 구성이고, 이런 주제를 이렇게 촬영하여 풀어낼 것임, 에서 출발하는 것이 프로그램 구성이니까. 하지만 프로그램 장르가 리얼리티라면? 구성의 기능은 약화된다. 기본 구성은 당연히 존재하지만 출연자들에게 고도의 자유를 주기 때문에 촬영은 그들을 따라가게 되고, 결국 편집단에서 스토리를 창조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어려웠다. 구성된 뼈대가 있으면 그 외의 내용을 버리면 되는데 우린 뼈대부터 만들어야 하니까. 이 뼈대가 프로그램 전체를 관통하는 뼈대와 어울릴지를 생각하는 건 기본이다. 뼈대를 몇 개 만들지, 얼마나 굵은 뼈대를 만들지, 이 뼈대들을 어떻게 끼워 맞출지, 그 뼈대에 붙일 근육과 살은 충분한지까지 고려하다 보면 머리에 쥐가 난다. 불필요한 내용을 잘 버리고 빨리 조각을 시작하고 싶은데, 이 내용을 버렸다가 중간에 뼈대가 바뀔까봐 섣불리 버리지 못하는 것도 참 난관이었다. 15시간 정도의 촬영분을 2~30분짜리 방송으로 줄여야 한다는 걸 알면 척척 쳐낼 법도 한데. 자식 같은 촬영본이라 그런지 그게 참 쉽지가 않았다.



인고의 시간을 보내는 의자. 자식 같은 촬영본을 버리는 건 너무 어렵다.



그래서 이번에 노력한 포인트는 '시청자 입장에서 바라보기'였다. 봐지는 편집을 해야 하니까. 내 자식 같다는 제작자 마인드를 잠시 옆으로 치우고, 시청자 시뮬레이션을 조금씩 시도해 봤다.



뒤로가기 권법



첫 번째는 뒤로가기 권법. 마치 시험 문제를 풀고 검산하듯 시청자의 입장에서 편집본을 구경하는 방식이다. 나의 작업본을 하나의 유튜브 콘텐츠라 상상하고는, 뒤로가기를 누를 만한 순간에 마커를 찍으며 본다. (여러 번 미는 스타일의 편집자라면 컷편을 끝내고 해도 좋지만 나는 처음부터 쭉 미는 방식으로 작업하기 때문에 구다리별로 적용하는 중이다.) 정말 수없이 많은 마커가 찍힌 걸 보면 암담해지지만, 이렇게 해야 지루한 부분을 과감히 버릴 수 있게 되는 것 같다. 맥락에 안 맞지만 좀 웃기니까 넣어볼까? 했던 부분, 맥락엔 맞지만 굳이 필요한가? 싶었던 부분들엔 어김없이 마커가 찍힌다. 한 발 더 나아가서 어떤 댓글이 달릴 것인지도 생각해 보면 좋다.



다시보기 권법



두 번째는 다시보기 권법. 조금 시간이 지난 후에 다시 수정을 보는 방식이다. 지금까지는 시사를 보고 수정한 뒤 마스터로 넘기고 나면 다시 열어보지 않았는데, 해외납품 때문에 입고와 방송 사이의 시차가 있다 보니 수정과 마스터 사이에 시간이 떴다. 그래서 다음 회차 편집을 하며 며칠 묵혀놨다가 다시 열어봤는데 세상에. 너무너무 재미없는 부분이 또 산더미였다. 머리가 환기되는 시간이 이래서 필요한 건가 싶어서, 그때부터는 선배가 마스터를 보기 직전에 다시 열어보고 있다. 같은 영화도 두 번 보면 새로운 것이 보인다고 하지 않나. 두 번 보고도 재밌는 부분은 정말 재밌는 거고, 두 번째에는 재미없다면 첫 번째 시청자에게도 자칫 재미없을 수 있다. 




결국 편집은 대화라는 생각을 한다. 시청자와 제작자 사이의 대화를 미리 시뮬레이션해 보는 과정. 어느 정도 연차가 차고 달라진 건, 항상 너무 당연했던 것을 다시금 깨닫는 경험이 잦다는 것이다. 생각보다 알면서도 안 하는 것들, 알면서도 못하고 있는 것들이 제법 많다. 그중 하나라도 깨닫게 되어서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드는 리얼리티 편집 기간. 재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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