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계의 영혼들에 인사한 날의 기록
이삿날로부터 정확히 한 달이 지났다. 그런데 왜 아직 짐 정리는 끝나지 않았을까? 정리에 있어서만큼은 그다지 게으르지 않았던 것 같은데. 새 가구를 많이 사서 그런가? 확실히 그러긴 했다. 베란다 창고와 붙박이 장이 있던 지난번 집과 달리 여긴 수납공간이 거의 없었으니까. 거대한 행거를 주문하여 틀을 만들고, 수납이 되는 침대 프레임을 구입했다. 이케아에선 서랍장을 데려와 뚝딱뚝딱 조립도 했고. 그런데 잠깐... 막상 세어 보니 세 개가 전부잖아? 단열 벽지 작업을 이유 삼기엔 너무 하루 만에 끝났고, 집이 넓어졌다는 핑계를 대자니 입주 청소 영수증이 마음에 걸린다.
결국 나는 그냥... 느렸던 거다. 옷을 정리하며 버릴 옷을 아까워하는 데에 한세월. 끌어안고 있던 15년 치 일기장을 굳이 읽어보느라 두세월. 평소엔 보지도 않는 전공책은 왜 지금껏 끌어안고 있어서 새삼 보고 싶게 만드는 것이며, 각종 여행 기념품과 장식용 향초 구경은 어쩜 이렇게 재밌는 것인지. 심지어 약통을 정리하자며 펼쳐 놓고는, 작년에 받았던 처방전(왜 갖고 있는지 도저히 모를 일이다)을 읽으며 아팠던 시간을 추억하기까지 하니 뭐 이젠 더 이상 변명의 여지가 없다.
어차피 이 정리는 한 달쯤 더 걸릴 것이 뻔하다. 그래서 오늘은 이왕 이렇게 된 거, 천천히 과거를 추억하기로 마음먹었는데 하필... 열어젖힌 서랍에서 과거의 기계들이 쏟아져 나왔다.
문득 이 2012년식 맥북과 조용히 고별식을 가진 작년이 떠오른다. 함께 학교도 다니고 여행도 다녔던 나의 첫 번째 애플. 연구동에서 한창 코딩할 때에도, 밤새 카페에 앉아 자소서를 쓸 때에도, 못다 한 편집을 하겠다며 프리미어를 만지작거릴 때에도, 늘 힘없는 배터리를 끝까지 돌려가며 버텨 주었던 맥북에게 조용히 작별 인사를 건넸다.
가족과도 같은 내 친구야 고마워.
가장 혼란스럽고도 열정적이었던 나의 시간들을 함께해 줬구나.
기계에도 영혼이 있다는 말을 나는 믿으니까
너의 영혼이 사라지지 않은 채 다시 새로운 기계로 돌아와 줄 것도 믿는다.
오래도록 한 가족을 태우고 다녔던 자동차가, 폐차장에서 시동이 꺼지지 않다가 따뜻한 인사를 듣고 나서야 수명을 다했다는 이야기를 참 좋아한다. 사람의 손을 타고 또 정을 듬뿍 받는 존재는 비록 무생물이어도 없던 영혼이 생겨나지 않을까. 과학적 근거를 떠나 그냥 믿고 싶다. 사람보다는 기계와 마주하는 시간이 더 많아진 것이 현실이고, 인간은 점점 더 많은 기계들에 둘러싸여 살아갈 테니까.
반려동물뿐 아니라 반려기계들에게도 정을 주고 아껴야 하는 시대. 내 생활의 일부이자 분신이 되는 기계들을 애써 사랑할 필요가 분명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