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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

예능 PD 입봉일기 #20

by 희제


링크드인의 예능 피디 입봉일기를 브런치에도 옮겨둡니다.

브런치를 읽는 팀장님들, 대표님들, 그리고 직장인 분들이 조금이나마 공감하거나 위로받으면 좋겠습니다.

*** 사진은 AI 로 작업합니다.




한여름에 시작한 프로그램이 겨울과 함께 끝났습니다. 마지막 날까지 꼬박 밤을 지새운 후, 막내들과 출소하듯 짐을 챙겨 퇴근하면서 나뭇가지에서 버티고 있는 마지막 낙엽을 구경했어요.


사실, 로또가 되어도 지금 하는 일을 계속할 것인가, 라는 질문에 속 시원하게 대답한 적이 없었습니다. 너는 예능을 좋아하니? 라는 근본적인 질문에도 그렇다는 대답을 하기가 힘들었어요. 처음엔 드라마 피디가 하고 싶었고, 다큐 피디를 준비하다가 얼떨결에 예능 피디가 된 사람이라, 예능과 나 사이의 궁합에 대한 고민을 내려놓기 어려웠습니다. “예능 = 시청자를 웃겨야 하는 존재” 라는 공식에 갇혀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요.


그런데 오히려, 입봉하면서 예능에 정이 든 것 같아요. 마지막 회에 붙는 에필로그 자막을 쓰면서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모든 걸 결정하는 존재인 메인은 마지막 메시지도 마음대로 쓸 수 있구나. 결국 내가 좋아하는 것들만 남겨 방송으로 내보낸다는 사실은 정말이지 대단한 특권이며 결정의 최종선이구나. 이러려고 버텼구나. 순리대로 살길 잘했다. 그러면서 동시에 생각했습니다. 예능 재밌네. 이렇게 모든 걸 할 수 있는 열린 장르라면 이제 하고싶은 건 충분히 할 수 있겠다.


메인이라는 포지션이 제법 적성에 맞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도 중요한 지점입니다. 저보다 훨씬 능력 있는 팀원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들과 함께 맨바닥에 성을 쌓아 올리는 일은 진짜 즐거웠어요. 햇병아리 메인에겐 버거운 분량을 두고 치열하게 고민하며 버틴 것도 솔직히 조금 재밌었습니다. 이 프로젝트 외적인 것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오롯이 집중한 기간이었어요.


그래서 로또가 되어도 지금 하는 일을 계속할 것인가, 다시 묻는다면, 그래도 대답하긴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이젠 조금 무언가가 보이기 시작했거든요. 산 중턱에 올라와 보니 구름으로 가려져 있던 산 꼭대기가 보인다고 해야 할까요? 물론 그곳까지 가는 길은 훨씬 더 험난하고 유의미하겠으나, 그렇게 때문에 더욱더 “저 꼭대기까지의 여정이 내게 맞는가” 라는 질문을 외면하긴 어렵게 되었습니다.


당분간은 업에 대한 고민을 좀 더 큰 시야에서 해 보려고 해요. 사실 다음 주부터는 다시 큰 팀에 소속되거든요. 지금까지 했던 그 어떤 프로그램보다 규모가 큰 대형 프로젝트이고, 저는 한 명의 팀원으로 다시 돌아가지만, 완전히 달라진 시야로 전력투구하며 다시 다음 스텝을 고민해 보려고 합니다.


예능 피디라는 업과 삶 사이의 균형, 이것에 대한 생각의 조각들로 다시 돌아오겠다는 의미예요. 우선 휴가의 마지막을 (ㅜㅜ) 충분히 즐긴 다음 천천히 돌아오겠습니다.


지금까지 주절주절 입봉일기를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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