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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유작이길 바라는 마음으로

예능 PD 입봉일기 #19

by 희제


링크드인의 예능 피디 입봉일기를 브런치에도 옮겨둡니다.

브런치를 읽는 팀장님들, 대표님들, 그리고 직장인 분들이 조금이나마 공감하거나 위로받으면 좋겠습니다.

*** 사진은 AI 로 작업합니다.




11월 첫날, 동료 한 명을 하늘로 떠나보낸 채 11월 마지막 날, 프로그램을 마무리했습니다.


조부모상 소식들 사이에 부친/모친상이 조금씩 섞이는 것에 조금은 익숙해진 나이인데. 본인상은 도무지 받아들이기 힘드네요. 다음에 어떤 프로그램을 하든 무조건 같이 일하고 싶었던 든든한 또래 작가님을, 이 프로그램이 채 끝나기도 전에 떠나보냈습니다.


마지막 촬영을 마친 후, 몸이 좋지 않아서 정밀검진을 받으신다며 시사 못 가서 미안하다고, 검진을 받다 보니 새로 알게 된 사실들이 있다며 돌아가면 얘기해 주겠다던 작가님이었어요. 평소처럼 호탕하게 웃으며 조만간 보자고 했으면서, 며칠 뒤에 본인상 부고를 카톡으로 보내왔습니다. 시사 전날, 편집실에 있던 피디들은 마스터룸에 모여서 온종일 울었고, 작가님들과 기차 타고 내려가 조문하며 또 한바탕 울었습니다. 정말 별일 다 일어나는 팀이라며 자조 섞인 농담을 하곤 했는데. 이제 더 이상의 별일은 있을 수조차 없도록, 항상 큰 소리로 재밌게 웃던 작가님이 끝까지 이야깃거리 만들어 주고 가네, 애써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하며 고인을 추모했던 것 같아요.


이 이야기를 쓸지 말 지에 대해 꽤 고민하다가 쓰는 건, 작가님이 저희 팀에 남긴 선물 때문입니다. 이 프로그램은 탄생이 참 신기했거든요. 브랜드 콜라보라는 명목으로 개설한 신생 팀이고, 아웃풋을 내긴 해야 하는데 편성된 건 없는 상황에서, 출연자를 먼저 정한 후 그의 스케줄에 맞추어 촬영을 시작했습니다. 제작 순서가 이렇게도 되는구나, 하는 생각으로 무작정 노를 젓다 보니 마케팅 팀도 도와주고 디자인 팀도 발 벗고 나서주고, 사업팀도 잘 팔아주어서 결국 편성이 되어버린, 앞뒤가 뒤바뀐 것 같지만 결국 되긴 된 그런 케이스예요.


촬영하고 편집하면서도 이게 세상에 나가긴 하는 건가, 하는 의구심을 가슴속 깊이 모두가 품고 있었을 텐데. 작가님을 보내드리고 돌아온 며칠 후, 방송 편성이 되었고 OTT 에도 많이 팔렸습니다. 대한민국에서 OTT 를 하나라도 구독하고 있다면 반드시 볼 수 있을 정도로 대부분의 OTT 에 판매되었어요.


이 소식을 작가님이 듣고 가셨으면 좋았을 텐데, 아쉬워하다 보니 문득 작가님이 주신 선물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조문하고 돌아오던 기차 안, “피디님과 이 프로그램 함께해서 행복했어요” 라는 마지막 카톡을 보며, 그저 편성이 되기만 하면 좋겠다던 소박한 꿈을 “그래도 좀 더 많은 사람들이 봤으면 좋겠다” 로 슬며시 바꾸었더랬는데. 그러자마자 편성이 잘 되었으니 작가님이 주신 선물 맞는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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