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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제 Aug 12. 2021

예능 제작을 하는 이유

두도막 컨텍스트 #4 산타클로스가 되기 위하여



아 Analog 문자답 : 나의 버디버디 아이디

세상에 전하는 나의 선물



천리안을 쓰던 시절이 지나고 바야흐로 버디버디의 시대가 시작된 2000년대 초반. 버디버디 아이디는 곧 나의 이름이었다. 듣도보도 못 한 특수문자가 난무하는 아이디들 속에 나의 이름이 묻히면 안 될 일. 몇 날 며칠 머리를 싸맨 끝에 내가 원하는 인간상을 투영시켜 최대한 빛나면서도 심플한 이름을 창조해 냈다.


SantaClover ~"~


산타 클로버. 내가 생각하는 가장 이타적인 존재인 산타에 행운의 상징 클로버를 붙이고도 모자라 산타의 얼굴까지 만들어 붙여놓은, 한 마디로 좋은 건 다 때려 박은 결과물이었다. 이 아이디가 떠 있는 버디버디 창을 바라보며 흐뭇한 웃음을 지었던 어린 날의 기억. 문제가 하나 있다면, 지금도 이 아이디가 그다지 유치하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누구에게나 산타 같은 존재가 되겠다는 열망. 일 년 365일 나를 만나는 사람들에게 선물 같은 날을 주겠다는 각오. 정말이지 원대한 꿈이 담겨있는 네임이 아닐 수 없다며, 나르시시스트 같은 생각을 해본다.


놀랍게도 (혹은 놀랍지 않게도) 세상을 더 좋은 곳으로 만들고 싶다는 나의 꿈은 성인이 될 때까지도 사그라들지 않았다. 사실 공학을 전공으로 선택한 이유도 '공학이야말로 인류를 이롭게 하는 학문'이라 들었기 때문이니까. 기어코 직 (돈벌이 수단)과 업 (하고 싶은 일)을 합치시키고자 20대를 다 바친 이유도 같은 맥락이었다. 직장은 하루의 3분의 1 이상을 보내는 곳이므로, 반드시 나의 소명인 '세상을 더 좋게 만드는 일'과 맞닿아 있어야 했다.


더 좋은 세상을 만드는 영상


영상은 참 많이들 본다. 휴식하기 위해 예능을 보고, 새로운 지식을 얻기 위해 다큐를 보고. 함께하는 여가로 영화를 선택하거나 모여 앉아 스포츠 중계를 보는 것은 물론, 잠들기 직전까지 유튜브 알고리즘에 눈을 맡기곤 한다. 영상을 보는 목적이나 형태와 상관없이 일관적인 한 가지 사실은, 영상은 절대 보는 이들을 긴장 상태로 몰아넣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바로 이 점이 내가 더 좋은 세상을 만들 도구로 영상을 - 좀 더 자세히 말하면 예능을 - 선택한 이유다.


예능을 보는 건 시간 허비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다. 얻는 것 하나 없이 웃다 끝나니까. 하지만 아무 생각 없이 웃을 수 있게 하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님을 깨닫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심지어 요즘 예능은 의식주뿐 아니라 여행, 직업, 음악, 스포츠, 추리, 심지어 범죄까지 우리 사회 전반을 아우르면서 의미적으로 그 입지를 넓히고 있지 않나. 주제의 범주가 넓어지면서 예능은 재미뿐 아니라 의미까지 전하는 매개체가 되었다.


누군가 내가 만든 프로그램을 보고 재미나 의미를 얻는다면? 그로 인해 그의 하루가 어제보다 나아졌다면? 프로그램 속에서 어떠한 메시지를 얻고 더 나은 내일을 마주할 수 있게 되었다면? 내가 하는 일로 누군가의 우주가 한 뼘 더 좋아진다면 그보다 더 좋은 일은 없을 것이다.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우리 삶에서 영상 콘텐츠가 사라질 수는 없다.




심지어 피디는 함께 일하는 사람들에게도 같은 경험을 선물할 수 있다.


영상 일을 한다고 해서 피디가 아티스트인 것은 아니다. 작가팀, 무대팀, 미술팀, 음향팀, CG팀에 이르는 수많은 능력자들이 실력을 마구 펼칠 수 있는 장을 펼쳐주는 철저한 플래너니까. 피디가 아티스트가 아닌 플래너임을 깨달은 순간은 나 스스로에게 피디를 해도 괜찮다는 허가를 준 결정적 설득의 순간과도 같았다.


나는 느리고 진득한 성격이다. 좋게 말하면 진득한 거고 나쁘게 말하면 느리다는 말이다. 회의가 끝나면 반드시 정리하는 시간이 필요하고, 탄탄한 근거가 없으면 섣불리 의견을 내지 않는다. 언론고시를 준비하기 전에 대학원 생활을 했던 CT(문화기술대학원)에는 톡톡 튀는 아이디어를 거리낌 없이 내어놓는 능력자들이 많았다. 때문에 내 의견이 맞다고 주장하기보단 동료들의 좋은 아이디어를 쏙쏙 끄집어내는 역할을 하게 된 건 무척 자연스러운 일이다.


너랑 있으면 내가 잘하는 사람인 것 같아. 너랑 있으면 내가 좋은 사람인 것 같아.


난 이 말을 듣는 게 좋았다. 디지털 퍼포먼스라는, 한 학기 동안 각종 테크놀로지를 이용하여 한 편의 극을 만드는 수업에서였다. 표현하고 싶은 시나리오에 대해 세상 러프하게 얘기를 했음에도 콘티는 척척 그려져서 나왔고, 그것이 무용으로 펼쳐졌고, 그 움직임을 캐치한 모션 그래픽이 만들어졌다. 나는 우리가 목표 대비 얼마큼 하고 있는지를 팔로업하고, 방향이 조금 엇나간 듯하면 바로잡고, 잘못된 부분과 잘 된 부분을 캐치해서 공유하기만 하면 될 뿐이었다. 메인 아이디어를 제시하고 나니 능력자들이 다 알아서 만들어 주는 마법. 그들은 저마다의 능력이 발휘되는 것을 무척 즐거워했고, 나는 옆에서 열심히 박수를 쳤다.


영상을 전공하고 감독 일을 하다 온 (그리고 내가 피디의 꿈을 갖고 있다는 걸 알고 있던) 한 동기는 내게 얘기해줬다. 네가 지금 하고 있는 게 피디 일이라고. 바로 그거라고. 그래서 알았다. 피디는 수많은 능력자들의 교차점에 존재하는 인물이구나. 존재만 잘해주면 되는구나. 그래 그럼 나도 잘할 수 있겠다.


능력자들의 밥상에 숟가락을 얹은 디지털 퍼포먼스. 극장은 만석이었다.


이런 역할은 입사 후로도 이어졌다. 최고의 능력맨인 감독님들께 제작팀의 아이디어를 알려드리고 박수 치는 역할. 특히 무대 녹화를 할 때 정말 많이 느낀다. 우리 프로그램을 위해 노력해 주시는 수많은 팀이 존재하고, 그 가운데서 내가 하는 건 조율뿐인데도 연출팀 이름이 스크롤 가장 마지막에 나간다니. 기분이 이상해질 때가 많지만, 이 스크롤의 모든 이름들이 의미 있는 일을 하실 수 있도록 하나의 장을 만든 것이라 생각하면 제법 뿌듯해진다.


백스테이지 스태프들은 전부 검정 옷을 입는다. 방송은 검정 옷의 마법과도 같다.




디 Digital 문자답 : 클라우스 (Klaus)

세상이 내게 전하는 선물



산타가 없다는 사실을 안 건 초등학교 6학년 때였다. 아무리 마음속으로 받고 싶은 선물을 빌어도 엉뚱한 선물이 오곤 했지만, 산타의 동선을 과학적으로 분석할 수 있다는, 어른들이 보는 9시 뉴스를 산타가 있다는 말로 철석같이 믿었던 것이다. 결국 진실을 알게 된 중학생은 무럭무럭 자라서 북유럽 어딘가엔 우리가 모르는 산타가 있을 것이라 믿는 어른이 되었다. 모름지기 과학을 믿는 사람이라면 과학의 완전하지 않음도 믿는 법이고, 초자연적인 존재 또한 믿게 되는 법이지.


아무튼 산타는 존재한다. 적어도 우리 마음속엔 하나씩 있기 때문에 <클라우스> 같은 재탕 삼탕의 산타 이야기도 깊은 여운을 남길 수 있는 거 아니겠나. 우연히 저지른 어떠한 일이 선한 영향력을 주고, 그것이 다시 나에게 되돌아온다는 그런 이야기. <클라우스> 속 집배원 재스퍼와 선생님 앨바, 그리고 목수 할아버지 클라우스는 저마다의 니즈로 편지와 장난감 배달을 하지만, 거기에 어린이들의 행동력이 더해져 전쟁 같은 마을을 평화롭게 만든다. 무심코 저지른 착한 행동이 다시 그들에게 선물처럼 돌아온다는 결말이다.


매년 보던 나 홀로 집에를 가볍게 물리친 크리스마스 영화


별다른 의도 없이 행한 착한 일도 이렇게 선한 영향력으로 돌아온다면, 좋은 세상을 만들고자 하는 열망으로 하는 일은 얼마나 큰 힘을 갖게 될까. 사람들 한 명 한 명이 더 좋은 세상을 만나는 창구이길 바라며 내가 영상을 만드는 이유다.


My way To Make The World a Better Place


그러고 보면 나의 꿈은 스스로 산타가 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언젠가 내가 만드는 프로그램으로 누군가 더 나은 삶으로 갈 수 있는 선택지를 알게 된다면 - 이 프로를 통해 새로운 사람을 알거나, 새로운 일을 발견하거나, 새로운 삶의 형태를 인지하거나, 새로운 재미를 찾거나, 그게 무엇이든 - 그것만으로 참 뿌듯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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