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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제 Aug 19. 2021

건강한 삶의 딜레마

두도막 컨텍스트 #5 그래도 미룰 것이 따로 있지



아 Analog 문자답 : 새벽 수영

규칙적인 삶



핀수영이라는 것이 있다. 우리가 흔히 오리발로 알고 있는 것은 바이핀. 모노핀은 두 발을 함께 끼워 마치 돌고래처럼 헤엄치게 만드는 커다란 꼬리 지느러미다. 이 모노핀과 함께 스노클을 끼고 수영을 하면 그 속도가 너무나 빨라서, 양 옆으로 물이 슉슉 지나가는 소리가 들리곤 한다. 물에 잠겨 천천히 유영하는 경영(일반 수영 영법)과는 또 다른 매력이 있는 핀수영. 현존하는 가장 빠른 영법인 이 핀수영을 무척이나 즐기던 동아리가 하나 있었다.


모노핀 수영. 양 손을 앞으로 뻗은 채 하체의 동력만으로 전진한다.


이 동아리 사람들은 일주일에 네 번 이른 새벽에 만나 한 시간 반 정도 수영을 했다. '훈련'이라는 이름으로 훈련부장의 지도 아래 진행되는 이 시간은 유유자적한 분위기와는 거리가 멀다. 숨이 턱까지 차오를 만큼 물살을 가르다 보면 3000m는 우스울 정도. 하지만 한 번 하기로 한 이상 피할 수도 없다. 결석비가 무려 이만 원이기 때문이다.


동아리 이름은 고래도 상어도 아닌 가오리. 여름이면 육상 훈련까지 병행하는 열정치곤 너무나 귀엽고 순둥한 이름이었다.


매일 아침을 시작하던 다이빙대 위에서


얼마 전엔 이 가오리들을 오랜만에 만났다. 코로나 때문인지 무척 조용했던 어느 주말. 잔잔한 공간에서 점심을 먹고 커피를 마시며, 세상 열정적으로 살던 그 시절을 추억했다.




왜 그리 힘들게 수영을 했을까. 겨울이면 깜깜하기까지 한 새벽에 눈을 뜨고, 대회를 위해 선수 등록까지 해가며 왜 그렇게 수영을 못 해서 안달이었을까. 결론을 추려보니 다들 건강한 삶을 원했기 때문이었다. 건강한 삶의 정의가 조금씩 다르긴 했지만 말이다.


고즈넉한 운치가 있던 상수 경주식당. 가오리답게 건강한 음식을 먹으며 이야기했다.


건강한 삶의 정의


가오리에는 인도어 파와 아웃도어 파가 있었다. 무 자르듯 딱 잘라 나눈 건 아니지만 분위기가 그랬다. 인도어 파는 수영장 안을 선호하는 사람들. 완벽히 갖춰진 환경에서 기록 단축을 위해 단련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반대로 아웃도어 파는 자연과 함께하는 운동을 좋아해서, 바다수영을 다니거나 자전거 여행을 즐기며 시시때때로 달리기를 했다. 나와 함께 명백한 아웃도어 파였던 바람이(실명은 아니다)는 여전히 산과 바다를 다니고 있었다. 캠핑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모아 자연 속 깊이 들어가 보는 여행을 기획하는 사람. 환경 친화적인 제품만을 사용하고 쓰레기를 되가져오는 우먼스 베이스캠프(https://www.instagram.com/womensbasecamp/)는 과연 학생 때부터 환경을 전공하며 관심을 가지던 바람이와 닮아 있었다. 바람이에게 건강한 삶이란 환경을 지키고 자연과 함께하는 것 같았다.


아웃도어 러버들에게 수영 도구는 여행 필수품이다. 핀을 끼고 들어가 실컷 수영했던 프랑스의 어느 해변. 


작은 체구로도 장거리 대회의 금메달은 죄다 휩쓸던 구름이(이것도 실명은 아니다)는 이미 직장을 다닌 지 오래되어서 제법 안정을 찾은 상태였다. 고양이 둘을 키우며 빈 시간엔 자수를 놓다가, 최근엔 춤을 배우고 인라인을 타는 등 여러 가지 동호회 활동으로 업무 외 시간을 채워나가고 있었다. 나의 선입관일지도 모르지만 디자인 전공자들은 유난히 부지런한 경향이 있다. 구름이에게 건강한 삶은 다채로움에 대한 꾸준한 도전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날 함께하기로 했지만 올 수 없었던 나머지 한 명은 노을이다. 가오리의 아침 훈련이 끝나면 꼭 다시 텅 빈 수영장으로 들어가 천천히 잠영을 하던 노을이. 느리지만 힘 있는, 그러나 결코 둔하지 않아서 한없이 여유로워 보이던 동작이었다. 일 년 정도 휴직을 하고는 이곳저곳 다니며 사진을 찍는다던데 어찌나 잘 어울리던지. 언제나 철학자 같은 깊이감을 보여주던 모습에 딱 알맞다는 생각을 했다. 그에겐 천천히 흐르는 시간 속에서 의미를 찾는 것이 건강한 삶의 정의 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때처럼 지금도 노을이는 유영 중


그럼 나에게 건강한 삶이란 뭘까. 장고 끝에 내린 답은 규칙적인 삶이었다. 돌이켜보면 가오리에 들어간 것도 같은 이유에서였다. 24시간을 세밀하게 나눈 시간표에 맞춰 살 수는 없지만, 적어도 아침에 운동하는 루틴 정도는 챙기고 싶었으니까. 그러고 보면 휴가를 받을 때마다 가장 먼저 하는 것도 규칙 되돌리기였다.


규칙적인 삶의 딜레마


직업적 특성상 한 프로그램이 끝나면 넉넉한 휴가를 받는다. 매번 지금처럼 한 달씩 쉴 수는 없지만 여느 직장인들이 부러워할 만큼 넉넉한 기간인 건 확실하다. 일 년에 두 번 정도는 누릴 수 있는 이 기회를 온통 여행으로 보내는 분들이 많지만, 나는 불규칙한 촬영과 밤샘 편집으로 엉망이 된 바이오리듬을 정상화하는 데에 총력을 다하곤 했다.


이번 휴가 때에는 인생 첫 PT를 하며 좋은 습관 만들기에 열심이었던 것 같다. 적어도 아침 9시 전엔 일어나 운동을 하고, 채소와 단백질이 충분한 좋은 점심을 먹고, 단정한 옷을 입은 다음 정해진 시간에 카페로 출근하여 글을 쓰는 하루하루. 주중 시간을 이렇게 보내니 자연스레 삶에 활기가 돌았다. 휴가 기간이라서 마음이 저절로 여유로워진 게 아니라, 내 시간을 직접 요리하고 컨트롤하는 데에서 나오는 넉넉함이었다.


좀 더 자세히 말하면 내게 중요한 건 시간의 계획적 운용이 아닌 습관의 지속성이다. 얼마나 절제된 식사를 했는지, 불필요한 일을 얼마나 줄이고 일에 집중했는지, 얼마나 바른 자세와 언행을 지켰는지에 대해 검열하는 걸 즐긴달까. 이렇게 쓰고 보니 수도자가 되어야 할 것 같지만 수도자만큼 이 모든 걸 지킨다는 뜻은 아니다. 단지 저 높은 곳에 기준을 두고 '바른 생활'을 실천하려 노력하기를 좋아할 뿐.


수도자가 되겠다는 말은 아닙니다.


문제는 세상 불규칙한 업계에서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새벽 퇴근이 일상인, 당장 내일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는 삶. 한 번 프로그램에 들어가면 몇 달 동안은 어떤 종류의 약속도 할 수 없는 삶. 천성적으로는 불편하기 그지없지만, 일 자체가 좋으니 적당히 타협하며 살 수밖에 없다. 인생 최대의 딜레마다.




디 Digital 문자답 : 카모메 식당 (かもめ食堂)

여유로운 삶



시간의 축을 미래로 옮겨본다. 내가 꿈꾸는 4~50대의 건강한 삶은 무엇일지. 만약 누군가 이 질문을 내게 던진다면, 일본 영화 <카모메 식당>을 보여줘도 괜찮을 것 같다.


일본 영화는 일상을 가만히 들여다보는 느낌을 참 잘 표현한다. 창문을 통해 내부를 향하는 앵글들. 쫀쫀한 대사로 짜 맞추기보단 현실적인 공백을 그대로 놔두는 자연스러움. 인물의 움직임이 정적이거나 캐릭터가 평면적인 것도 아닌데, 일본 영화의 이야기들은 또렷한 기승전결 없이 유유히 흘러가곤 한다. 




핀란드로 훌쩍 떠나간 중년 여성 세 명의 이야기 <카모메 식당>도 잔잔한 일본 영화 특유의 감성을 보여준다. 특별 포인트는 동시에 꽤나 유쾌하다는 점이다. 이삼십 대 청년들은 흉내 내려야 도무지 낼 수가 없는 중년만의 관록에서 비롯된 해학 같은 것이 있지 않나. 이 점이 가장 잘 드러나는 장면은 단연 갓챠맨 씬이라고 할 수 있다. 두 일본인이 핀란드 한복판의 어느 서점에 앉아 만화영화의 주제곡 가사를 복기해 내는 장면. 웃음이 배실배실 배어 나오지만 결코 우습진 않게 많드는 그들만의 진지함 - 눈을 동그랗게 뜨고 집중하는 두 사람의 모습은 한없이 순수하고 맑다.


어서 나이 들고 싶게 만드는 카모메 식당의 세 주인공


연륜에 비일상이 더해지는 매직


모든 중년의 어른들이 순수하고 맑은 것은 아니다. 오히려 어른들의 때 묻지 않음은 놀랄 만한 일에 가깝다. 사실 순수하다거나 맑다는 수식어가 중년의 나이와는 좀처럼 어울리지 않으니까. 하지만 이들은 좀 다르다. 모든 걸 내려놓고 머나먼 핀란드로 편도행 티켓을 끊었다는 특별함. 카모메 식당의 세 사람이 유독 투명한 이유를 찾는다면 바로 이것일 거다.


처음 만난 사람에게 선뜻 자신의 집에 머물라 말하는 관용. 아무렇지 않게 앞치마를 둘러메고는 완전히 낯선 이의 식당에서 기꺼이 식탁을 닦는 소박한 여유. 아무렇지 않게 인생에 관한 질문을 던지고, 그걸 함께 고민해주는 담백한 연륜까지.


이들은 여유를 넘어 어떠한 초능력을 갖추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중년의 여유에 타국의 비일상이 더해지면서 생긴 마법 아닐지. 거대한 대도시인 도쿄의 일상에 찌든 상태였다면, 같은 인물이어도 저렇게까지 여유를 가질 수는 없었을 것이다. 우리도 여행지에서는 조금 더 넉넉해지고 때로는 과감해지지 않나. 커피를 내리며 '커피 루왁'이라 말하면 더 맛있어진다는 손님의 말. 이것마저 한 번쯤 슬쩍 믿어볼 수 있는 건, 그곳이 도쿄에서 멀리 떨어진 핀란드이기 때문일 것이다.


카모메 식당은 핀란드 그 자체다.


칭찬이라는 마법


세 인물은 칭찬에 관대하다. 우리는 모르는 게 너무 많아요, 라는 겸손한 대사에서 비롯된 칭찬 말이다. 사치에가 미도리의 엉망진창 그림을 칭찬할 때만 해도 그저 인사치레라 생각했는데. 영화 후반부에서 그 그림이 떡하니 걸려 있는 벽면을 봤을 땐 진심으로 놀랐다. 아니 놀란 나 스스로에게 놀랐다는 말이 더 알맞을 것이다. 그럼 아까 했던 칭찬이 진심이었던 거야? 난 그걸 당연히 가짜라고 생각했던 거야?


해석이라는 마법


한 술 더 떠 마사코는 언어를 넘나드는 공감 능력을 보여준다. 술에 잔뜩 취해 기절한 한 핀란드인 여성을 집까지 데려다주고는, 그녀의 하소연을 끝까지 들으며 고개를 끄덕이던 마사코. 나는 또 그러려니 했다. 알아듣지 못하면서도 눈을 보며 끄덕여 주다니 참 친절하기도 하지. 그런데 웬걸. 그 핀란드인의 집에서 나오면서, 마사코는 그녀의 남편이 도망갔다는 설명을 두 친구에게 해 주고 있었다. 아니 그럼 정말 알아들은 거야? 이게 가능한 건가?


맨 오른쪽의 마사코와 맨 왼쪽의 핀란드는 절친이 되었을 것이다.


여유로운 삶의 딜레마


물론 한없이 멋지고 건강해 보이는 중년에게도 힘듦은 있다. 넓은 수영장에서 혼자 외로이 수영을 하는 사치에의 씬. 머나먼 나라에서 자리를 잡아가는 과정이 결코 쉽지 않음을 반영한 이 씬을 보며, 그들에게 여유를 가져다준 것들이 동시에 고난을 가져다주었음을 상기했다. 여유를 즐기려면 견뎌야 한다는 건가.


결국 같은 수영장에서 수많은 핀란드 사람들로부터 박수를 받는 씬이 영화 후반부에 등장하지만, 속이 시원하다기보단 다행스러웠다는 표현이 맞을 것 같다. 텅 비었다가 가득 차는 수영장이 사치에의 힘겨운 마음 변화를 보여주는 것만 같아서. 그리고 정작 미도리와 마사코가 그곳에 없는 걸 보니, 여전히 사치에에게 핀란드는 고향처럼 편안하진 않은 것 같아서.


텅 빈 수영장을 채운 건 핀란드 손님들이다. 미도리와 마사코는 없는 수영장.


하지만 이러니 저러니 해도 여유를 갖춘 채 고난을 기꺼이 감내하여 물리치는 건 중년만이 해낼 수 있는 멋진 마법이다. 이랏샤이! 하는 상쾌한 인사로 영화는 끝났지만, 그들에겐 끝이 아닌 시작일 거라 믿는 이유다.


건강한 삶의 기본인 좋은 먹거리, 살기 좋은 공간, 좋은 친구들에 관심이 많다면, 그리고 그중에서도 특별히 중년의 모습이 궁금하다면 EBS 다큐 <60세 미만 출입금지>도 추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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