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일상기록

사람은 일 년에 한 명만 남아도

211230 목요일 - 내 곁의 사람들을 생각한 날의 기록

by 희제


연말연시는 묵은 인사를 나누기에 적절한 때다. 내게도 꼭 안부를 묻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 인사가 참 반갑고 고마우면서도 선뜻 주위 분들을 먼저 챙기지는 못한다. 좀처럼 살뜰하지 못한 성격 탓도 있지만 ( 단지 먼저 다가가지 못 할 뿐이다. 거꾸로 먼저 다가와 주면 너무나 좋아하는 이 모순덩어리... ) 사실 더 간단한 표면적 이유가 있다. 아직 내 앞가림도 제대로 못 하고 있다는 생각 때문. 진학이나 취업을 준비할 때 잠수를 타는 것과는 결이 다르다. 데일리 라이프에 대한 만족감이 떨어지는 데서 오는 자신감 결여라고나 할까. 열심히 살고는 있는데, 이 방향이 맞는 것인지 잘 모르겠는 느낌 말이다. 언제나 다음 스텝에 대한 고민과 무수한 일들에 마음이 치여, 아직 인사할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얼토당토않은 변명에 뒤얽힌 채 새해를 맞이하곤 했다.


그러던 내가 이번 연말엔 고마운 분들을 찾아 인사를 드렸다. 분명 회사를 옮기며 마음에 여유가 생겨서였을 것이다. 이직이라는 큰 이벤트가 생기며 환경의 격변을 맞이한데다 그 시기가 연말과 딱 맞물린 상황. 더 이상 미룰 수 없을 만큼의 의미부여가 이루어진 덕분에, 오직 근거에 의해 움직이는 극 J 형 인간은 겸사겸사 미뤄왔던 만남을 챙길 수 있었다.


약속에 나갈 때마다 나는 그간의 무심함부터 사과했다. 연락하지 않으려던 건 아니지만 연락하지 못했던 것에 대한 사과 말이다. 하지만 놀랍게도 돌아오는 대답은 한결같았다. 마음이 있다는 걸 아니까 괜찮아. 가끔 만나도 좋은 사람은 덜 봐도 괜찮아. 안부만 주고받아도 충분하다면 그게 더 깊은 사이 아니겠어?



Scene #1 수백 명 중 열 명 - 동기들



회사 동기는 인생 마지막 친구라는 말이 있다. 이후로도 친구는 생기는 걸 보니 반은 틀리고 반은 맞지만, 그 맞는 부분만큼은 정말 제대로라고 생각하게 해 준 사람들이 있다. 입사 첫 해, 거대 규모의 신입사원 행사를 티에프라는 이름으로 함께 준비한 사람들. 계열사는 제각각이지만 딱 한 달의 시간동안 함께 머리를 맞대고 땀 흘린 기억 덕분에 아직도 종종 연락을 하고 있다.


그런 티에프가 이번 연말엔 조촐한 송년회를 가졌다. 집합 제한으로 소소하게 만난 서울 거주민 네 명. 다들 뭐 하고 지내는지 궁금하여 하나하나 짚어 보는데, 어느새 열 명 중 절반이 퇴사를 하고 없었다. 그래도 우린 아직 모일 수 있는 사이잖아. 담백하게 미래 얘기를 나누며 함께 나이들어갈 수 있잖아. 그러니 열 명은 아직 그대로 존재하는 거라며, 수백 명의 동기들 중 열 명이나 남다니 참 행운이라는 소회를 나누었다. 서로 다른 길을 갈수록 더 재미있는 법이란 말도 덧붙이면서.


20211210_222916.jpg 준지의 아름다운 하루. 대학 감성이 물씬 나던 공간.


벌써 세 번째 회사를 다니며 자유도 높은 생활을 하고 있는 기역이는 종종 무인도를 탐험하고 있었다. 인터뷰 컨셉의 유튜브 콘텐츠도 하나 기획하고 있다는데 잘 되려나. 너는 한국 땅에서 좀처럼 보기 힘든 에너자이저니까 꼭 주인공이어야 한다며, 잘 가고 있는 말에 채찍질하는 의미로 한 잔을 마셨다.


영업직을 내려놓고 데이터 분석가로 당당히 변신한 니은이는 확실히 스타트업이 잘 맞는다고 했다. 어엿한 점장일 때에도 휴무를 쪼개어 온갖 자격증을 섭렵하던 사람이 어디 갈 리 없지. 아직도 불 붙어 있는 열정에 존중을 표하며 또 한 잔을 마셨다.


가장 먼저 퇴사할 것 같았던 디귿이는 회사에 굳건히 남아 성실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낚시를 하고 스쿠터를 타며 제주 오피스에서 보낸 한 달의 이야기. 아무리 힘들어도 항상 웃던 6년 전과 꼭 같은 모습이어서, 그 한결같음을 축하하며 마지막 한 잔을 마셨다.


20211211_013229.jpg 잔잔하고 포근한 대화는 새벽까지 이어졌다. 알맹이가 제법 단단한 시간으로 기억될 것이다.


자리는 달라졌지만 모두들 제법 여문 사회인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런 우리들의 대화 역시 알맞게 익은 듯했다. 일뿐 아니라 삶 자체를 매만지는 기술이 조금은 익숙해진 사람들. 어느 분야에서든 내게 맞는 길을 만들고 그것을 사랑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추구하는 모습이 같기 때문에 우리는 아직도 만나고 있는지 모른다.



Scene #2 수십 명 중 네 명 - 친구들



나는 크리스마스를 좋아한다. 크리스마스 시즌의 들뜨는 분위기가 좋다. 주위 사람들은 나이들다 보니 점점 감흥이 사라진다던데. 나는 삼십 대가 되어도 변함이 없어서, 크리스마스 기대 하나도 안 된다는 밈조차 쓰기 조심스러울 지경이다.


그런 내게 크리스마스 로망이 하나 있었으니 바로 "나만의 독립 공간에 친구들 초대하기". 독립하고 맞이하는 두 번째 크리스마스지만 작년 크리스마스는 편집실에서 맞이했으므로, 이번엔 반드시 이 로망을 실현해야만 했다. 크리스마스 일정만큼은 끝까지 비워 두고 있다가 친구들에게 초대장을 보낸 나. 길고 긴 시험을 이제 막 끝낸 친구들은 기꺼이 먼 길을 달려와 주었다.




입사하기 한참 전. 라디오 활동을 하면서 만난 친구들이 여럿 있었다. 한창 백수였던 시기라 이런저런 활동을 하다 보니 사람들이 모였다가도 떠나가고 다시 찾아왔다가도 금세 떠난다는 사실을 알게 됐지만, 간혹 벌어지는 다툼 속에서도 내 곁을 굳건히 지켜 주는 사람들은 존재했고, 그들은 친구가 되어 아직까지도 남아 있다.


남을 사람은 결국 남게 되어 있다는 뜻이다. 저마다 바쁜 시기를 보냈는데도 이렇게 특별한 날 함께 있다는 사실이 새삼 신기하지 않나. 어쩌면 우리는 각자 성격이 달라서, 그래서 퍼즐처럼 똑 맞아 떨어질 수 있어서 계속 만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수십 명을 곁에 남길 수 없어 속상했던 시간은 이제 안녕. 이렇게 넷이면 충분하다고, 늙으니 다 버겁다고, 농담 반 진담 반 말을 섞으며 우리는 고즈넉한 새벽을 기꺼이 지새웠다.


1640530777422-14.jpg 크리스마스 인파를 뚫고 데려온 루돌프. 서로 주는 것을 아끼지 않아서 곁에 존재할 수 있는 건지도.



Scene #3. 일 년에 한 명 - 동료들



믿고 의지하던 외주 팀장님도 만났다. 연차가 한참 높으신데도 언제나 어린 피디들을 존중해 주는 분이었다. 솔선수범할 뿐더러 아무리 바빠도 넉넉한 웃음은 잃지 않는 분. 이제 피디 그만둘거라는 말씀을 입에 달고 살지만, 역시나 이번에도 현장을 몇 개 뛰더니 재밌었다며 신나는 표정을 지으셨다.


"이직 축하해요. 너무 잘됐어요. 무조건 잘 된 거예요."


걱정하지 말라고, 잘 할 거라고, 이번에도 역시나 무조건적 응원을 보내는 피디님께, 은근히 품고 있던 응어리 하나를 꺼내 보였다.


"저는 항상 사람이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했거든요. 같이 일 하는 사람들을 잘 대하려 언제나 애썼는데. 막상 이직 인사를 하려니 그럴 사람이 그리 많지 않더라고요. 잘 한다고 다 남는 건 아닌가봐요."


피디님은 대답했다.


"피디님, 내가 지금까지 일해보니까, 일 년에 진짜 좋은 사람 딱 한 명 남으면 많이 남는 거예요. 일 잘 하고 마음 잘 맞고 선한 동료 딱 한 명. 그거면 충분한 성공이예요."


그러고 보니 그랬다. 우린 동료로 만난 것이지 친구는 아니잖은가. 그렇게 보면 내게 남은 사람은 정말 많은 셈이었다. 금세 생각이 바뀌어, 나는 얼마나 복 받은 사람인지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 나였다.


20211213_204505.jpg 좋은 사람은 남는다. 어떻게든.






매번 우리는 같은 말을 했다. 여기서 한 명만 남아도 성공이지. 일 년에 한 명만 남아도 행복한거지. 최종 정답 같지만 인간관계의 깊이와 넓이에 대한 고민은 쉽사리 끝나지 않을 것 같다. 점심 메뉴 고민처럼 평생 달고 살다가 새로운 사람을 알게 되면 다시 마주하지 않을까. 그럴 때마다 오늘을 돌이켜 되뇌어볼 생각이다. 여기서 한 명만 남아도 성공이라고. 일 년에 한 명만 남아도 정말 행복할거라고.




@ 김수영 - 사랑하자


우리 조금 더 서로를 사랑하자

내가 아픈 건 나밖에 모르잖아

생각보다 사람들은 그다지 나에게 관심이 없대

정말 아프지 하지만 진짜 그렇대


그 누구보다 우리 조금 더 서로를 위해서

나를 좀 더 사랑하자

그냥 그렇게 서로를 사랑해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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