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희제 Oct 03. 2022

3등실에만 있을 수 없잖아

워커 말고 플레이어


이직 후 첫 프로그램을 마무리한 건 여름이었다. 넉넉한 휴가를 마치고 복귀했을 때에도 여전히 더위가 머물러 있었으니 늦가을이 성큼 다가온 현재 시점으로도 제법 과거인 셈이다. 그러니 그동안 많은 일이 있었음은 어쩌면 당연하다. 새해와 함께 시작된 프로그램은 회사 적응과 맞물려 돌아갔고, 어떠한 부침에 따라 나의 개인적인 부침도 자연스레 일어났다.


한없는 기대감으로 시작했던 마음이 무너지기도 했다. 무너지다 못해 깊은 절벽으로 떨어질 때쯤, 그 깊이가 제법 아득하게 느껴질 때쯤, 이직 직후의 일기를 살펴보았던 기억이 난다. 새로운 시작이 너무나 좋았던 시기. 회사 예찬으로 가득한 일기장. 노션에 적어둔 대여섯 개의 글도 읽어보며, 그 어느 때보다 높은 자존감으로 희망차게 살던 순간을 떠올렸다. 외국계니까 좀 다를 거라는 기대감으로 왔건만. 기존 제작 환경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상황에 놓여 좌절하던 순간, 그 글들을 보며 조금만 더 믿어 보자고 스스로를 다독였더랬다.




다행히 그 믿음은 옳았다. 회사는 이제 합병 후 마무리를 향해 나아가고 있고, 앞으로는 글로벌 협업에 초점을 맞추겠다고 한다. 아직 성공 사례는 없지만 분명 이 거대한 배의 방향은 그쪽을 향하고 있는 것이다. 조금씩 전진하려는 움직임도 눈에 보이니 이보다 더 다행일 수가 없다.


회사는 출항 중



배를 움직이는 플레이어



배가 움직인다는 건 그 배를 움직이는 사람들이 있다는 뜻이다. 기꺼이 동력이 되는 사람이 있고, 그걸 알면서도 관망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배의 방향 자체를 불신하고 투덜거리는 사람도 있지만, 어쨌든 중요한 건 첫 번째 사람들이다. 세 번째 유형은 이 배에서 언젠가 내리게 될 테니 차치한다면 관건은 두 번째 사람들을 어떻게 돌려 놓느냐겠지.


사실 나는 바로 저 두 번째 인간이었다. 배의 방향도 맞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도 알았던 것 같은데. 처음 탑승한 공간이 3등실이었다는 이유로 모든 상황으로부터 고개를 돌렸다. "배에서 내려야 하나" 생각한 것이 지난 8월이고 "갑판으로 올라가 보기라도 하자" 생각한 것이 지난 9월이니, 짧은 시간 안에 생각이 급변했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그리고 지금, 나는 이 배의 동력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고자 있는 힘껏 노력하는 중이다.


3등실에 가만히 있으면 바깥세상만 좋아 보이기 마련
몸을 움직여 위로 올라가야 이 배가 어떤 배인지 알 수 있다.


그러려면 워커(Worker)가 아닌 플레이어(Player)가 되어야 한다. 주어진 일만 해도 원하는 걸 이룰 수 있는 시대는 옛날 옛적에 마감 됐거든. 사실 이건 모두가 안다. 나도 알고는 있었던 것 같다. 단지 내가 워커라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을 뿐. 아니 어쩌면, 스스로가 한없이 정적인 워커임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이건 여담인데, 환경에 대해 투덜거리면 보통 워커다. 플레이어는 투덜거릴 시간에 그 환경을 빠져나가더라고. 탈출은 지능 순이라는 말은 이제 거의 명언에 가깝다.)


앞서 말했듯이, 다행히 나의 환경은 좋은 환경이다. 개인의 성장과 회사의 성장이 얼라인 될 여지가 있고, 같은 생각을 하는 동료도 주위에 제법 많거든. 이젠 변명의 여지없이 내가 플레이어로 바뀌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래서 다시, 그 어느 때보다 높은 기대감으로 자존감을 한껏 끌어올리며 액티브한 에너지를 내고 있는 이 시기에, 이런 회사 생활도 존재한다는 걸 글로 기록해 두고 싶다. 머지않은 미래에 또 좌절한다면 이 글로부터 힘을 얻을 수도 있겠지.




우선은 노션에 끄적거려 둔 입사 직후의 글들을 올릴 예정이다. 그때의 느낌을 현재의 언어로 바꾸면 그 맛이 안 날 것 같거든. 첫 프로그램을 한창 하던 때의 이야기도 빼놓기는 어려울 것이다. 좋은 배에 올라타서도 여전히 워커를 자처하던 시기의 읊조림이니 나름 자양분이 되지 않을까.


이어지는 글들은 아마 메인 PD 입봉기가 될 것 같다. 내년 상반기를 목표로, 해외로부터 투자를 받아 그들과 협업하며 온전한 내 기획을 실현시키는 그런 이야기.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일을 이렇게 문장화시키는 건 설레발 같아서 지양하는 편인데, 이번엔 왠지 그래도 될 것 같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온 힘을 다해 실현시켜 볼 생각이거든. 그럴 만한 가치가 충분하다는 점도 마음에 불을 지피는 것 같다. 펀딩부터 제작까지 해외 국가와 협업하는 첫 케이스이라는 점. 그리고 존재하던 프로그램을 이어받는 것이 아닌 온전한 내 기획이라는 점. 이렇게 두 가지 측면에서 완전히 새로운 경험일 것이므로, 결과가 어떻게 되든 엄청난 러닝이 될 거라 믿는다.


결과적으로 이건 회사를 통해 나만의 브랜드 컬러를 만드는 이야기가 될 것이다. 워커(Worker)가 아닌 플레이어(Player)가 되고픈 분들이 조금이라도 읽고 함께해 주시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의지를 다지기 위한 글쓰기를 시작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외국계 회사는 처음이라서 2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