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희제 Oct 11. 2022

젊은 회사를 일구어 가는 즐거움

외국계 대기업에서 스타트업 즐기기


본 글의 초안은 2022년 초에 작성되었습니다.



우리 회사는 글로벌 대기업과 스타트업의 분위기가 뒤섞인 곳이다. 세계를 커버하는 대규모 회사이고, 업계 사람이 아니어도 이름만 들으면 알 만큼 인지도가 높은 브랜드지만, 한국에 진출한 지는 얼마 되지 않기 때문에 스타트업 같은 분위기가 분명 존재한다. 직원 수가 천 단위에서 움직이는 대기업에선 꿈도 꾸기 어려웠던 일들 - 가령 전 직원이 모여 크리스마스 파티를 한다거나, 복도에서 대표님과 마주쳐 스몰 토크를 나눈다거나 하는 - 이 심심찮게 일어나는 회사인 것이다.


솔직히 말하면, 이런 스타트업 분위기를 항상 동경해왔다. 어릴 때부터 “튀는 돌”이 아니었기 때문에 사회가 원하는 프레임에 따라 공채 관문을 통과할 수 있었고, 대기업이 원하는 인재상으로 나름 순탄하게 살아왔다. 하지만 “튀는 돌”이 아니었던 탓에 항상 품고 있던 답답함을 표출할 방법이 없었던 것 같다. 규율과 직급과 연차 같은 “응당 따라야 할 것들”을 살짝 비틀면 더 효율성이 높아질 수 있는데. 이미 완성형처럼 보이는 대기업 시스템은 무척 견고해서, 직원 한 명의 목소리로 바뀔 리 없어 보였다.


하지만 회사를 차릴 만큼 용감하진 않았고, 스타트업으로 이직하자니 커리어가 맞지 않았다. 리멤버를 통해 들어오는 제안은 대부분 브랜디드나 디지털 콘텐츠 제작이어서 예능 제작 커리어를 이어가기엔 적합하지 않았던 것이다. 내가 원하는 커리어 패스를 지키려면 결국 큰 회사에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일까. 이런 생각에 잠겨 있을 무렵, 외국계에서 제안이 들어왔다. 현 회사보다 오히려 규모가 큰 회사에서 말이다. 스타트업에 대한 동경이 와르르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지만, 내 사주팔자에 규모 큰 회사만 있다면 어쩔 수 없지, 그나마 외국계니까 비교적 열린 분위기를 경험할 수 있지 않을까, 라는 한가닥 희망으로 운명을 받아들였다. 그렇게 원하던 스타트업 분위기까지 더블로 경험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모르고.



외국계 대기업인데 왜 스타트업이래 ??



멋들어진 사옥에 몇천 명의 직원들이 사원증을 찍고 들어간다. 층층이 서는 엘리베이터를 이용하여 각자의 자리로 찾아가고, 식사 시간엔 맛있는 밥이 나오는 구내식당에 삼삼오오 줄을 선다. 잘 구비되어 있는 휴게 공간과 종종 열리는 직원 대상 행사들은 덤. 돈과 시간으로 제공되는 복지는 제법 탄탄해서 애사심을 고양시키기에 충분하다.


대기업의 모습을 떠올리면 보통 이런 그림이 그려진다. 물론 업계에 따라 다르고 같은 업계 내에서도 부서에 따라 체감 컬러가 달라지지만, 이 모습이 전무한 대기업은 없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적어도 내가 겪은 두 곳의 대기업은 이런 모습이었으니까. 하지만 글로벌 기업의 모습은 사뭇 다르다.



오피스 비주얼


겉모습만 생각해 보아도 그렇다. 전 세계에 산재해 있는 오피스를 전부 거대 사옥의 형태로 만든다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에 직원 수와 사업의 중요도에 따라 국가별 사무실의 규모를 조정할 수밖에 없다. 실제로 우리 회사의 경우 Korea 직원은 50명도 채 되지 않아서, 처음 입사했을 때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중기업은커녕 소기업 정도로 분류해야 알맞을 정도라니. 그렇다 보니 큰 빌딩의 대여 공간을 사용하게 되었고, 모두가 오밀조밀 모여 스타트업처럼 일을 하고 있다.


이런 느낌의 복작복작



직원 구성


직원들의 연령대가 다양한 것도 스타트업 분위기에 한몫한다. 물론 연령대가 다양한 건 대기업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직원 수가 많은 곳에서는 이런 다양성이 크게 빛을 발하지 않는다. 잘 맞는 사람들끼리 공감대를 형성하고 친하게 지내면 그만이니까. 모수가 많으면 다양한 가운데서도 비슷한 사람들끼리 모일 수 있다는 말이다. 물론,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스타트업 - 그러니까 "젊은 기업"들은 2~30대로 구성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연령대의 소집단인 우리 회사가 스타트업 분위기라는 건, 사람들이 그만큼 열려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외국계 회사라는 걸 알고 입사한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보니 젊은 주니어들은 물론, 시니어들도 상당히 유연하게 사고하는 편이다.


사실, 기대와는 다르게 우리는 유명한 몇몇 회사들처럼 영어 이름으로 서로를 호칭하지는 않는다. 영어 이름이 필수도 아닐뿐더러 간혹 영어 이름을 사용하더라도 뒤에 직급을 붙여 부르기 때문에 큰 의미는 없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외국계 회사 직원이라는 정체성"이 대부분 직원들의 마음에 있기 때문에, 소통할 때 수직적인 방향보다는 수평적인 방향을 지향한다.



복지


아쉽지만 어쩔 수 없는 점이 한 가지 있다면, 국내 대기업을 따라가지 못하는 복지다. 대기업에서는 야근을 하며 저녁식사를 사비로 해결한 적이 없고, 추가 근무수당을 받지 못한 적도 없다. 수당으로 해결이 어려울 경우엔 대체 휴가 개념으로 충분한 휴식을 제공하는데, 솔직히 말하면 현 회사엔 아직 이러한 시스템이 갖춰져 있지 않다.


외국계라서라기보다는 한국에 진출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벌어지는 문제일 수도 있다. 게다가 콘텐츠 자체 제작은 다른 국가에서 주로 하던 사업군이 아니므로 회사 입장에서도 충분한 학습의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고무적인 사실은, 실제로 히스토리를 보면 휴가를 포함한 각종 복지가 분명 존재한다는 점이다. 어떻게 로컬라이징하여 적용할 것인가, 라는 시간문제만 남은 셈이니 충분히 믿고 기다려 볼 필요가 있다.



시스템


스타트업들이 종종 부딪히는 문제는 다름 아닌 시스템의 결여다. 어쩌면 여기가 스타트업처럼 느껴지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이 시스템의 부재인지도 모르겠다. 복지가 없는 건 기다리면 될 일이지만, 업무적 시스템이 없는 건 시급한 문제이니까.


회사에 입사한 첫날, 따뜻하게 맞아 주신 직원분들 중 일부와 점심 식사를 하게 되었다. 저마다 자기소개를 해 주시는데 무척 아리송했던 기억이 난다. 인사팀, 재무팀, 편성팀으로 명확히 구분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각종 업무가 혼재되어 있었던 것. 그러니까 이렇게 두 분은 인사 업무를 보시고, 저렇게 두 분은 재무를 하시는데 이 분은 사업관리를 하시면서 또 다른 분과 다른 일을 하신다는 거죠...? 라던 나에게, 아직 초기라 팀 개념이 없다고 대답하던 분들의 표정이 가끔 생각난다. 계약 타입에 따라 저마다 달라지는 프로세스에 적응해야 했을 때, 세컨 연출부터 FD까지 이어지는 모든 업무를 커버할 때, 방송국이라면 당연히 가지고 있던 모든 시스템이 없다는 걸 확인했을 때. 그럴 때마다 저 표정을 떠올리며 견디는 중이다.



Systemizing



없다고 해서 그 없는 것을 그대로 둘 리는 없다. 체계는 없지만 1인 다역으로 무장된 직원들이 가득한 회사니까. 마치 무에서 유가 창조되듯, 계속해서 무언가가 만들어지고 있다. 입문 교육도 최근에 만들어진 것들 중 하나다. 회사를 이해시킬 수 있는 루트가 만들어졌다는 건 체계라는 것이 실재하기 시작했다는 의미 아닌가. 이후로 회사엔 공식적인 영어 교육도 생겼고, 이는 영어 교육을 넘어 온 직원들에게 소속감을 부여하고 있다.


확실히 회사 전체의 관점에서 만들어지는 시스템을 봤을 때 나는 수혜자다. 그렇다면 제작팀의 시스템은? 당연히 내가 만들어야 하는 입장이다. 일례로, 얼마 전엔 사업관리팀으로부터 제작비 관련 내용을 설명 듣고는 깊은 고민에 빠졌더랬다. 대체 어디부터 어디까지 세팅을 해야 하는 것인지. 작게는 필요한 외장하드 수량을 구매 근거로 만드는 것부터 조연출에게 필요한 담당자 표를 제작하는 것까지, 크게는 연출의 프리 프로덕션 절차와 원활한 보고 체계 정립 그리고 사업적 마인드 장착을 위한 스터디까지. 손을 대야만 하는 일과 손을 대면 좋을 일들이 눈앞에 가득 펼쳐져 있었다.


다행스러운 건, 결코 아득한 기분이 아니라는 점이다. 여기라면 그 짐을 내가 지고 싶고, 능히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느낌. 젊은 회사를 일구어 가는 느낌이 부담스럽기보다는 반가워서, 이곳에 오길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타트업형 인재



스타트업에 대한 정보는 사실 많다. 조금만 찾아봐도 파도처럼 밀려오는 정보를 한껏 느낄 수 있으니까. 물론 대기업에 대한 정보도 마찬가지인데, 외국계에 대한 정보는 상대적으로 적은 느낌이다. 그래서 나도 오퍼를 받고는 내가 잘 맞을 것인지를 가늠하기가 참 어려웠었다.


그러고 보면 스타트업형 인재가 곧 외국계형 인재가 아닐까 싶다. 그러면 스타트업형 인재는 뭐냐고? 없는 시스템을 만들어 나가는 걸 가치롭게 여기는가. 이것부터 살펴보면 될 것 같다.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나가야 하는 순간. 그것이 설렌다면 스타트업에, 그리고 외국계에 어울리는 인재형일 거니까.


매거진의 이전글 3등실에만 있을 수 없잖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