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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제 Oct 14. 2022

꿈에 그리던 저녁 퇴근

회사원의 삶 즐기기


본 글의 초안은 2022년 초에 작성되었습니다.



피디들의 하루는 보통 점심시간쯤 시작된다. 기획 회의는 오후 한 시쯤 시작하는 것이 국룰. 좀 일찍 시작해야 한대도 오전 열한 시다. 오전 열 시는 꼭두새벽이므로 어림도 없거든. 그래서 상암동은 유독 점심시간이 활기차다. 직장인의 점심시간과 피디 작가의 출근 시간이 겹치기 때문이다. 촬영 편집 기간도 마찬가지다. 밤 열한 시가 되면 "오늘의 마지막 커피"를 주문하기 위한 배민 전쟁이 시작되고, 그 커피로 해가 뜰 때까지 버티는 것이 일상이니까.


대체 왜 하루를 일찍 시작하지 않는지에 대한 의문은 항상 있었다. 오전부터 일을 시작하면 대중교통으로 퇴근할 수 있을 텐데. 점심 저녁 야식이 아니라 아침 점심 저녁을 먹고 잠도 좀 잘 수 있을 텐데. 늦은 점심이나 이른 저녁을 먹으며, 퇴근하는 수많은 인파를 부러워하곤 했더랬다. 나의 하루는 이제 시작이란 말이지. 저녁이 있는 삶은 사치인 피디 인생. 그렇다고 아침이 있는 것도 아닌 전쟁 같은 하루하루.


아침형 생활이 저녁형보다 훨씬 우월(?)하다는 고정관념은 업계에 깊이 뿌리 박힌 패턴에 눌려 힘없이 쓰러졌다. 아침 수영으로 하루를 열던 대학 시절은 대체 언제인지. 나의 바이오리듬마저 새까맣게 잊어버린 아침형 생활 습관은 연기처럼 사라진 지 오래였다.



퇴근이라는 변수가 생겼다.



그러던 내게 저녁 퇴근이라는 변수가 생겼다. 오전 출근을 중시하는 국장님 덕분이었다. 수십 년간 피디 생활을 하신 분이라 이 업계에서 아침형 생활이 잘 될 수만은 없다는 걸 알고 계시지만, 좋은 아이디어는 아침 루틴에서 나온다는 생각이 확고한 분이었다.


나는 이게 그렇게 좋았다. 아침에 출근해서 업계 뉴스를 읽고, 아이디어 정리를 하고, 할 일 목록을 훑어도 점심시간이 되지 않는 기적. 그 앞에 회사에서 제공하는 영어 수업까지 붙이니 마치 내가 대단한 사람이 된 것 같았다. 가끔 운동까지 하고 하루를 시작하면 미라클 모닝도 부럽지 않을 정도다. 새벽부터 움직이는 보통의 직장인들에겐 애들 장난처럼 귀엽게 느껴지겠지만 그래도 이게 어디야.


밤이 되면 살아나는 상암동
아침의 상암동을 마주한다는 건 밤을 지새웠다는 의미였다.



Negative


물론 몇 년간 축적된 바이오리듬을 한 번에 바꾸기는 쉽지 않다. 자주 투덜거리긴 했지만 돌이켜보면, "현대인의 생체 리듬이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피디의 루틴"은 몸에 적합했던 것 같다. 출근하기 위해 알람을 맞출 때 스트레스를 받은 기억이 거의 없는 걸 보니 말이다. 심지어 대중교통의 출퇴근 러시에 편승할 필요도 없고, 점심시간의 웨이팅에 동참할 필요도 없다. 오히려 아침 일찍 출근하는 것과 별개로 오후 업무는 그대로 진행되다 보니, 전반적인 근무 시간이 늘어난 것 같은 느낌마저 든다.


피디 루틴으로 살면 이런 상황과 마주칠 일은 없다.


사람은 정말 간사한 동물이 맞다. 회사원의 루틴으로 겪게 되는 불편을 마주하다 보니 슬며시 옛날 생각이 나는 걸 보니. 지금까지 무척 자유도 높은 생활을 했다는 걸 단 며칠 만에 느끼며, 이 땅의 수많은 직장인들께 존경의 마음을 전해 보기도 했다. 밤을 새우는 것보다, 불규칙하게 사는 것보다, 어쩌면 아침 일찍 일어나 적은 자유도로 근무하는 것이 더 지속하기 어려운 일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 동시에, 그렇기 때문에 도전할 만한 가치가 있겠다는 생각. 회사원의 루틴이 자칫 깨어져버린 어느 날, 큰일 났다는 생각으로 높은 효율의 하루를 보내기 위해 무던히 노력했더랬다. 그래. 이러니 저러니 해도 아침형 루틴은 효율 좋을 확률이 높은 거잖아. 늦게 일어나면 힘든 일이 일찍 일어나기만 하면 쉬워지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지. 열심히 살고픈 인간에게, 하루 효율을 높이는 것만큼 중요한 미션은 없으니까.



Positive


가장 좋은 건 긍정적인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할 수 있다는 거다. 물론 아홉 시에 칼같이 업무를 시작해야 하는 입장이라면 기분이 다르겠지만, 자유의지에 의해 아침을 열고 나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찾아온다. 이미 "오직 나만을 위한 일"을 해치웠기 때문에 낮 시간 동안엔 업무에 집중할 수 있고, 틈틈이 생기는 자투리 시간도 좀 더 효율적으로 쓸 수 있기 때문에 창의성이 요구되는 일을 하기에도 훨씬 적합하다. 퇴근할 즈음, 오늘 참 다채로운 일들을 했다는 만족감이 찾아오는 건 덤이다. 몸이 파김치일지언정 자기 효능감에 젖어 기쁘게 퇴근을 하면 다음날에도 루틴이 지속될 확률은 무척 높아진다.


다른 부서 사람들과 협업하는 데에도 아침 루틴은 도움이 된다. 어쨌든 피디도 타인과 함께 일하는 회사원 아닌가. 제작팀이 아닌 스탭 부서 분들은 일반적인 회사원의 루틴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시차로 인하여 서로 얼굴 붉힐 일도 제법 많았다. 주말이나 명절에도 일하는 것이 당연한 제작진에게 평일 오전은 유일하게 쉬는 시간이니까. 심지어 어떤 경우엔 오후 두세 시까지도 정신을 못 차리기도 하니, 서로가 함께 깨어 있는 시간대가 그리 넉넉하지 않은 탓에 커뮤니케이션이 쉽지 않았다. 하지만 부지런히 움직여 시차를 맞추니 온갖 대응이 가능해졌다. 심지어 아침에 개인 업무를 모두 마치고 나면 사람이 여유로워지고, 따라서 날카롭게 반응할 일도 줄어든다. 일이 잘 되는 선순환이 생기는 것이다.


저녁 루틴으로 이어지는 것도 제법 긍정적인 측면 중 하나다. 아침 루틴이 저녁 루틴을 부르는가, 저녁 루틴이 부르는가 하는 것은 여전히 닭 달걀 문제로 남아 있지만, 어찌 됐든 서로에게 도움을 주며 온전한 하루가 굴러가도록 만드는 것만은 확실하다.


아침저녁으로 사용 중인 루티너리 어플. 물 마시기처럼 아주 간단한 것도 여기 입력하면 만족감이 2배가 된다.




물론 잘 지켜지지 않는 날도 태반이다. 바쁜 일, 힘든 일, 스트레스, 여행과 같은 변수, 뭐 이런 것들이 생기면 무너지곤 하는 것이 사람의 의지 아닌가. 그래도 이 긍정적인 점을 경험했다는 데에 큰 점수를 부여하며, 무너져도 다시 시작하려고 끊임없이 노력 중이다. 루틴을 지켰을 때마다 느끼는 행복감을 언제나 기억할 것. 아침 습관만 지키면 건강한 몸과 마음으로 밀도 있는 시간을 보낼 수 있음을 기억할 것. 그걸 통해 앞으로도 멋진 회사원이 되기 위해 아침을 붙잡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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