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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제 Nov 02. 2022

변곡점에서 춤을

메인 피디가 될 테야


본 글의 초안은 2022년 초에 작성되었습니다.



이직을 하면 모든 부분이 나아질까. 그렇지는 않다. 회사 문제는 언제나 복잡하니까.


"당신의 회사는 좋은 회사인가요?" 라는 질문에 "떡볶이를 좋아하세요?" 라는 물음을 마주할 때처럼 빠르게 답변하는 사람은 없다. 일이 즐거운지, 동료들과 잘 맞는지, 업무 프로세스는 합리적인지, 연봉은 적합한지, 통근시간은 적절한지와 같은 여러 요소를 고려해야 하니까 말이다. 너무나 많은 변수는 회사의 좋고 나쁨에 대한 판단을 어렵게 만들고, 이 어려운 문제는 이직할 때에도 계속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이직을 했다면? 가장 중요한 가치가 더 나았기 때문일 것이다.



옮길 것이냐 남을 것이냐



내게 전 회사와 현 회사의 가장 큰 차이를 묻는다면 주저 없이 대답할 수 있다. "메인 피디가 될 수 있을까" 라는 의문이 "그럴 수 있겠다" 라는 가능성으로 바뀌었다는 점. 그리고 아주 당당히, 이것 하나만으로도 성공적인 이직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피디들 중에 꿈이 조연출이었던 사람은 없을 것이다. 피디라는 직함으로 일을 시작했다고 해서 꿈을 온전히 이룬 건 아닐 확률이 높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때는 몰랐다. 조연출이 되는 것조차 얼마나 힘든 세상인데. 온 힘을 다해 피디의 세계로 들어왔건만 펼쳐진 건 꽃길이 아니었다. 하긴, 솔직히 꽃길까지는 바라지도 않았다. 분초를 다투는 방송 일이 쉬울 리 없으니까. 그래도 진흙길 정도는 될 줄 알았던 모양이다. 정말 가시밭길이 펼쳐지니 사고가 정지되었다.


막내 시절엔 그 가시밭길을 걷기 바빴다. 오직 견딜 뿐, 아무런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아니 생각이라는 걸 할 틈이 아예 없었던 것 같다. 한 달 가까이 퇴근 한 번 못 하고 쪽잠을 자는 게 미덕이었던 시절. 발에 생채기가 날지언정 포기하고 싶지 않은 일이었던 것도 사실이지만, 어느 날들엔, 달리는 발을 멈출 수 없어서 그냥 그 관성으로 발을 굴리기도 했다.


시간이 조금 지나 견디는 맷집이 생기고 나니 더 큰 문제가 보였다. 연출팀 1로써 주어진 프로그램을 위해 끊임없이 일하긴 했는데. 정작 내 이름으로 만들고 싶은 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오직 아웃풋만 있고 인풋은 없던 세월들. 이대로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프로그램을 만들 수 있는 건가? 기획안 한 장 없는 조연출인데 대체 뭘 할 수 있겠어. 짤막한 구성과 편집이야 얼마든지 해봤지만, 회사를 설득할 만한 번뜩이는 아이디어를 나는 전혀 가지고 있지 않았다. 블록버스터급 꿈을 말해도 이해받던 신입 시절과는 다르니까. "만들고 싶은 것" 이 아닌, "만들고 싶은 것 중 실현 가능한 것" 을 이제 한두 개쯤 가지고 있어야 했다.


기획도 기획이지만 한 가지 문제가 더 있었다. 메인 피디가 될 수 있는 역량이 있는가. 혹은 그 역량이 길러지고 있는가. 나는 여기에도 선뜻 긍정적인 대답을 할 수 없었다.


메인 피디가 된다는 건 한 팀을 운영하는 리드가 된다는 의미다. 연출팀과 작가팀, 그리고 모든 스탭과 회사 사이의 가교가 되어야 하는데 내가 그걸 할 수 있게 된다고? 이대로 가다가는 전혀 가능할 것 같지가 않았다. 회사에 학교처럼 정해진 교과과정이 있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3년 후, 5년 후의 미래를 예측하고 주도적으로 길을 꾸려나가고 싶은데. 현실엔 미래에 대한 물음표만 가득했다. 역피라미드형 인력 구조 때문이었을까 너무 거대한 프로그램들만 있어서였을까. 능력 있는 젊은 선배들은 전부 누군가의 조연출이었다. 자신만의 프로그램을 하는 사람은 한두 명에 불과한 현실. 그나마도 있던 프로그램을 물려받으면 다행이었다.




놀랍게도 새 회사는 이 두 가지 문제를 모두 해결해 주었다.



첫째로, 새 회사는 피디들에게 콘텐츠를 기획하게 한다. (이럴 수가 문장으로 적고 보니 너무나 당연하기 짝이 없다...) 물론 전 회사에도 기획하는 사람은 있었다. 하지만 기획할 수 있는 장이 없었다. 기획안을 발표하는 시간이 일 년에 한 번쯤 있었지만, 그리고 그 장에서 우승을 하면 프로그램을 만들 수 있다고들 했지만, 그것이 언제나 지켜지는 것은 아니었다. 아무리 기획을 해도 프로그램으로 연결되리라는 보장이 없었던 거다. 그러니 당장 수면시간을 지키기도 어려운 사람들이 열심히 기획할 의지를 불태울 리 만무했다.


반면, 새 회사에는 시스템이라는 것이 있다. 정기 회의를 두어 주기적으로 기획을 디벨롭하는데, 이때 정말 아무나 의견을 낼 수 있다. 팀장급이든 1년 차 막내든 상관하지 않는다. 형식적인 자유가 아니라, 정말 거리낌 없이 의견을 낼 수 있도록 모두가 배려해 주는 편이다. (이처럼 열린 분위기를 조성하는 선배들에 대해서 별도의 글을 쓸 예정이다.) 그러다 보니 회의 전에 내 아이디어를 자꾸 정리하게 되고, 이 과정이 누적되다 보면 무언가 만들어질 것이라는 믿음도 생긴다.


별도로 포맷 스터디를 진행하는 것도 무척 바람직하다. 로컬과 글로벌을 가리지 않고 리뷰하는데, 이때 얼마나 큰 성과를 거두었는지, 타겟층이 어떠했는지, 얼마나 많이 리메이크 되었는지, 우리는 어떤 식으로 이것을 바꿀 수 있을지, 다각도로 검토하고 의견을 공유한다. 완전히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것도 좋지만 미지의 세계를 추측하여 도전하는 건 무척 어려우니까. 인류가 미래를 위해 역사를 공부하듯, 콘텐츠의 세계에서도 성공한 것을 재해석하는 연습이 필요하다.


돌이켜 보면 전 회사는 젊은 피디의 아이디어를 발굴하고 그것을 콘텐츠화할 여유가 없었던 것 같다. 하지만 당신들은 피디니까 알아서 기획하세요, 라는 말은 조금 무책임하다고 생각한다. 각종 교육 프로그램을 만들어주는 것까지 바라지는 않았다. 다만 최소한의 제도라도 또렷하게 운영됐으면 어땠을까... 라는 아쉬움이 있을 뿐. 이런 아쉬움들은 피디는 물론이고 피디가 아닌 직원분들까지 프로그램 아이디어를 고민해주고, 커피 한 잔 내리다가도 함께 생각해주는 현 회사의 분위기 속에서 마음껏 해소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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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한 명의 머리에서 혜성처럼 나타나는 프로그램은 없다. 



둘째로, 새 회사는 사업을 세팅하는 단계에서부터 피디와 함께한다. 이것을 단점으로 해석한다면 자본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볼 수도 있다. 전 회사는 프로그램 내용을 오더 하는 대신 제작비도 쥐어 주었으니까. 여기는 프로그램 기획에 있어 자유도가 높은 대신 제작비 이슈도 함께 고민해야 하는 셈이다. 처음 이 상황을 마주했을 때에는 "역시 집 나오면 고생" 이라는 문장이 툭 하고 마음에서 튀어나왔더랬다. "대감집 벗어나면 야생이라더니" 라는 퇴사 동기들의 이야기도 퍼뜩 떠올랐다. 하지만 지금은 뭐랄까... 일단 이 야생을 즐기는 중이다. 어찌 됐든 자유도가 있는 것이 없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제작비를 만드는 것부터 시작하다 보니 상당히 다양한 계약 구조를 만나게 된다. 심지어 공동제작과 외주제작에 글로벌과 OTT 개념마저 맞물리니 레퍼런스라는 게 있을 수가 없다. 정말이지 모든 것이 복잡 그 자체이지만, 그러면서 시장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알게 되는 것이 좋다. 콘텐츠 생태계가 어마어마하게 변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온실 속에 있을 때에는 몰랐던 것들 말이다. (물론 온실 속에서도 알 사람은 안다. 내가 너무 환경 변이적 인간인 탓에 온실 속에선 온실에만 적응하여 사느라 몰랐던 것일 뿐...) 아무튼 이런 일련의 과정을 겪으면 내겐 작은 것이라도 러닝이 생기고, 그 러닝이 차츰차츰 모여 재산이 되어가고 있음을 느낀다. 이렇게 여러 독특한 케이스에서 일하다 보면 어느 시점에선 새로운 방법을 고안할 수도 있지 않을까.






어느 회사나 그렇듯 여기에도 매뉴얼은 없다. 그리고 이 방식이 누구에게나 정답이라고 확언하기도 어렵다. 어쨌든 좋은 결과를 꾸준히 내고 있는 건 현 회사가 아닌 전 회사이니까. 하지만 각종 시스템과 프로그램, 그리고 선후배들까지, 온 우주가 나를 도와주고 있다는 기분은 어디에서나 경험하는 것이 아니다.


진짜 피디로서 해야 할 일을 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겉에서 보기엔 잠시 멈춰 있는 듯하지만 실은 속을 채우고 있는 셈이니까. 이를 계속해서 인지하며 노력해 나가려고 한다. 인생에 몇 번 없다는 터닝포인트, 그 변곡점이 있다면 다름 아닌 지금일 거라 굳게 믿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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