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망한 마음을 되찾은 날의 기록
드디어 마음을 조금 내려놓은 것 같다. 불과 일주일 사이에 찾아온 변화다. 잠시 좌절했던 마음을 본 궤도로 되돌려놓은 것이니 "변화" 보다는 "안정" 이라는 낱말을 쓰는 것이 맞으려나. 참 신기한 일이다. 마음을 내려놓자며 스스로를 다독인 것도 아닌데.
일을 한두 해 한 것이 아니니 이런 가벼운 좌절 내지는 실망이 처음일 리 없다. 그럴 때마다 스스로를 다독이려 애써도 깊은 골을 빠져나오긴 쉽지 않았던 것 같은데. 이번엔 왜 이렇게 빨리 빠져나왔지? 생각해 보니 주변 사람들의 도움 덕택이었다.
그저께는 내가 마음을 완전히 내려놓았다고 착각한 날이다. 타인과 나를 비교하지 말자, 괜한 에너지 소모일 뿐이다, 스스로를 믿자, 바른 길의 끝은 있다, 와 같은 책 속 명언을 억지로 머리와 가슴에 욱여넣은 채 꾸역꾸역 웃은 그런 날. 팀장 선배와 함께 커피를 한 잔 마시고 올라와 구성에 대한 이야기를 한 판 한 저녁, 비로소 마음이 풀리는 걸 느끼고서야 알았다.
영업 진행이 지지부진한 건 그 어떤 사람의 탓도 아니었다. 국가별 취향이 다른 것을 어떡하겠어. 혹시 몰라 서브로 제출했던 구성안이 받아들여졌으니 그것을 잘 일구면 되는 거였다. 내가 썼지만 긴가민가한 표정을 알아챘는지, 팀장 선배는 이런저런 아이디어를 칠판 가득 쏟아내주었다. 아 그렇구나. 이거 재밌는 아이디어 맞구나. 만드는 과정도 재밌고 결과도 재밌을 수 있겠구나. 내가 느끼기에도 한결 환해진 표정으로 "선배 이거 재밌게 만들 수 있을 것 같아요!!" 라고 말하자 선배가 말했다. 자신감 가지라고. 처음 입봉할 때는 다 깔아주는 판에서 연출만 하면 되는 거라고. 도울 수 있는 방법 다 생각해 놓고 있으니 조바심 갖지 말고 천천히 가면 된다고. 그래서 나도 말했다. 선배가 있으니까 입봉 하는 거라고. 진짜라고. 멍청하게도 감사하다는 말은 미처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지만, 나의 표정 변화를 이번에도 분명 알아채셨을 거다.
덕분에 어제는 무척 바쁘게 보낼 수 있었다. 기운차게 작가팀 회의도 하고 제작사 미팅도 하고. 심지어 미팅할 때에는 팀장 선배와 함께 둘째 선배도 들어와 주셨다. 우렁차게 인사를 하며 들어오셔서는, 우리 재서 피디가 열심히 준비하고 있으니 잘 부탁한다고 약간의 너스레를 떨었다.
일렬로 앉아 있어서 얼굴이 잘 보이진 않았지만 안 봐도 뻔했다. 처음 이런 미팅을 하는 후배에게 힘 잔뜩 실어 주려고 일부러 들어오셨다는 걸. 순간적으로 뭉클한 감동이 뭉게뭉게 피어나는 그 기분은 정말 겪어보지 않으면 모른다. 어떻게든 프로그램 만들어 보려고 아는 인맥 동원하여 스케줄 잡아가는 나의 등 뒤로, 커다랗고 따뜻한 손 두 개가 토닥토닥 다가오는 그런 느낌. 솔직히 두 선배는 색깔이 무척 다르다. 팀장 선배는 지극히 외향적이고 직관적이지만 둘째 선배는 내향적이면서 계획적이거든. 극강의 EP와 극강의 IJ는 서로 언성 높여 토론할 때가 있지만, 언제나 애정 어린 토론을 하듯 나에게도 아낌없는 애정을 부어 주고 있었다.
만나는 제작사도 함께 일하며 참 좋은 사람들이라고 느꼈던 곳이다. 내가 만든 이 자리가 좋은 사람들과 좋은 사람들의 만남이 되었구나 - 싶으니 뿌듯하기도 하고 행복하기도 하고. 어찌 될지 결과는 알 수 없지만 최소한 물꼬를 튼 것은 분명했다.
마침 저녁엔 이직하는 다른 팀 동료분의 송별회가 있었다. 이모저모 모인 인원은 무려 11명. 이 조그만 회사에서 11명이 모이는 일은 절대 흔하지 않다. 떠나는 분이 참 좋은 분이라는 점이 가장 큰 이유였겠지만, 동시에 우리 회사 참 정 있는 곳이구나 싶었던 순간.
이 날의 가장 큰 기억은 다섯 명의 40 대 시니어가 쪼르르 앉아 웃는 장면일 것이다. 개인적으로 회식을 마다하는 편은 아니지만 그래도 마음 편한 회식이 있고 불편한 회식이 있지 않나. 이 날은 각 팀의 중추인 헤드들이 모두 모여 있는데도 전혀 불편하지 않았다. 이렇게까지 꼰대라는 말과는 거리가 먼 건강한 어른들이라니. 서로 다른 회사들을 지나왔지만, 오랜 기간을 한 분야에서 일하다 보니 이미 서로 알고 있는 관계였다. 그 길고 긴 시간들에 깃든 신뢰 속에서 넉넉함이 나오는 건 어쩌면 무척 당연한 일이겠지. 글로벌 마인드와 넓은 마음을 함께 가진 분들이 2~30 대 후배를 바라봐 주는 모습은, 이 회사에 남길 잘했다고 생각하기에 충분했다.
회사에서 찾아온 실망감을 회사 사람들로부터 풀게 된 경험은 앞으로도 잊기 힘들지 않을까. 이렇게 사람들을 믿고, 나를 믿고, 마음 푹 놓고 천천히 가기만 하면 된다는 걸 깨달은 날들. 결과가 어떻든 괜찮다는 생각마저 드는 걸 보니, 나도 한 차례 더 성장하며 넉넉해져 가는 것이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