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일상기록

대충 쓸 결심

좋아하는 시시콜콜 #1 글쓰기

by 희제


찜찜한 휴가


한 달쯤 되는 긴 휴가가 다시 찾아왔다. 새 회사에 적응하며 첫 프로그램을 열심히 만드는 동안 반년이 흘렀고, 정신 차려 보니 회사는 커다란 변화를 겪고 있었다. 방향성을 동쪽이라 예측하는 사람과 서쪽으로 예측하는 사람이 동시에 존재하는 혼돈. 딱히 동요할 필요는 없지만 마음이 붕 뜰 수밖에 없는 하루하루. 망망대해에 나룻배와 떨어지면 이런 기분일까. 아니구나. 바다엔 아무런 이정표가 없잖아. 지금은 수없이 많은 화살표들에 둘러싸인 상황이다. 도대체 어떤 나라가 옳은지 알 수 없는 춘추전국 시대쯤... 전쟁의 한가운데에 덩그러니 놓인 무사의 기분이랄까? 이건 밖이 아닌 안으로 들어가야 할 타이밍이란 뜻이다.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아야 결정을 하든 말든 할 거 아냐.



자막지 말고 여행지


너는 뭐 좋아해? 라는 근본적인 (동시에 근본 없는) 질문을 받았던 어느 선배와의 저녁 시간. 어떤 프로그램 만들고 싶냐고요? 라고 되물었더니 지금 면접 보냐며, 일 말고 네가 좋아하는 거나 찾으라고 했다. 인생 전체를 보고 너라는 사람을 파악해야 좋은 작품도 나오지. 편집실 벽에 자막지만 붙여두지 말고 가고 싶은 여행지로 도배해. 그게 멋있는 거야. 자기 특색도 없으면서 무슨 프로그램을 만든다고. 너무 맞는 말로 명치를 얻어맞으니 말문이 턱 막혔다. 내 안의 원점으로 돌아갈 타이밍이구나. 산티아고 순례길이나 제주도 올레길이라도 걸어야 하나? 그러면서 생각을 해야 하나?


결국 그냥 아무거나 하기로 했다. 아무거나 쓰기로 했다. 일만 할 줄 알았지, 그걸 제외하면 무미건조한 일상인 내가 대체 무슨 생각을 하며 사는지 다시 좀 짚어보기로 했다. 모든 경험과 모든 글쓰기를 계획하고 실행하는 극 제이 (J) 형 인간을 잠시 내려놓고, 그냥 하루에 한 개씩 아무거나 적어보기로. 잘 쓰려는 생각 따위 벗어던지고, 매일 일기장에 쓰는 그런 끄적거림을 한번 모아 보기로.



새로운 시시콜콜


기본적으로 내가 좋아하는 것에 대해 쓰겠지만, 단 하나의 규칙은 새로워야 한다는 거다. 아무리 똑같은 매일이라도 조금씩은 다를 거 아냐. 오늘도 운 좋게 새로움 하나를 발견해서 좋았다, 정도로 시시콜콜한 글을 마치고 싶다. 점심에 먹은 김밥이 오늘따라 고소했다는 식사 재발견이나, 알고 보니 집 앞 공원에 토끼풀이 있더라는 관찰 일기, 복날의 복 자가 엎드릴 복이라는 트위터 성 상식 기록, 폰을 끄고 네 시간쯤 있어봤더니 나름 괜찮았다는 실험 보고서, 대낮의 남산을 보고 와인가게에 들어갔다가 한밤의 남산을 보며 나왔다는 쓸데없는 성공기, 바다낚시 일일 체험을 시도했다가 조개구이만 먹고 돌아왔다는 실패기 같은 것들 말이다. 지난 휴가 때에는 두도막 컨텍스트를 쓰기 위해 하루 종일 글에 매달려 있었으니, 이번엔 반대로 해보는 거다. 거창한 영화 리뷰나 여행기에 대한 압박은 넣어두고, 한 시간 이내로 써서 미련 없이 올리는 그런 글쓰기를... 제발.


CAM00163.jpg 제대로 써서 올리자며 글감으로 모으기만 하다 사라져 버린 독일의 기록들에게 묵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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