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005 언저리의 기록
여행 프로그램을 하고 있다. 리얼리티 경험이 전무한 건 아니지만 음악 프로그램만큼 익숙하지는 않은데 여행이라니. 전혀 통제되지 않은 공간의 연속을 따라다니며 수십 수백 번의 돌발 상황을 예측하고 대처해야 하는 여행이라니. 사실 고백하자면, 하고 싶다고 손을 들었다. 그것도 아주 적극적으로. 못 해봤던 것들을 마음껏 경험하겠다는 결심으로 온 회사이긴 하지만, 막상 옮기고 보니 여기선 연차가 제법 있는 편이라 조급해진 까닭도 있다. "지금이 남은 날들 중 가장 젊은 날"이라는 말을 빌자면, 지금이야말로 가장 적은 책임으로 새로운 것에 도전해 볼 수 있는 때이니까.
하지만 상상하는 것과 막상 부딪치는 건 조금 다른 문제였다. 촬영에 보낼 생각이라는 말을 눈앞에서 들었을 때, 혹시 걱정되는 건 없니? 라는 나지막한 질문을 눈앞에 두었을 때, 문제 전혀 없고 할 수 있어요, 라고 대답하는 단단한 표정 뒤에서 얼마나 많은 생각을 했는지 모른다. 두 어깨에 프로그램 전체를 짊어지는 느낌이었다고 하면 좀 표현이 되려나. 이후로 메모리 잃어버리는 꿈, 찍다가 출연자를 놓치는 꿈, 무장단체에 납치당하는 꿈을 계속해서 꾸고 있는 걸 보면 중압감이 상당한 모양이다.
하지만 해야지 어쩔 거야. 모두가 가고 싶어 하는 촬영에 가게 됐으면 잘해야지. 잘할 수 있도록 즐겁게 준비해야지. 즐겁게 준비하면서 행복해하고, 모든 일이 끝나고 나면 또 기분 좋게 회고해야지.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PS.
그날 밤, 불 꺼진 회의실에서 음악을 듣다가 문득 깨달았다. 내가 이제야 지난 프로그램을 떠내 보내는구나. 이직 후 처음 만난 프로그램이라서, 잘할 수 있는 음악 장르여서, 등등의 여러 가지 이유로 참 많이 사랑했었는데. 말로는 떠나보냈다 하면서도 계속 마음 어딘가에 남아있음을 부정할 수 없었는데. 이젠 여행 소스로 가득 채워진 칠판이 익숙했고, 회의의 흔적을 담은 페이퍼가 드문드문 놓인 책상이 편안했다. 이런 아늑함을 느끼기까지 걸린 시간이 한 달 남짓인 걸 보면 역시 이 정도는 쉬어줘야 하는 건가. 마치 배우가 캐릭터를 떠나보내듯, 피디가 프로그램을 떠나보내는 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