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017 언저리의 기록
미래는 이미 와 있다. 다만 모두에게 균등하게 온 것은 아니다.
The future is already here - It's just not very evenly distributed.
강의 시작부터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았다. 회사에서 준비한 송길영 님 강의에서였다. 정말 다행스러운 건, 정확히 두 시간 동안 펼쳐진 강의가 최근 출간된 <시대예보 핵개인의 시대> 라는 책의 요약과도 같았다는 사실이다. 강의가 아닌 책으로 만났다면 줄을 치고 곱씹느라 몇 달 동안 쥐고 있었을 테니까.
받아들여 갈고 닦으세요.
공대를 나왔음에도 새로운 기술을 멀리하며 애쓰는 내게 디지털 카메라를 거부한 코닥 이야기는 충격적이었다. 코닥만의 고집을 아름답다 여겼고, 그런 이미지 덕분에 코닥 어패럴이 탄생했으니 나름의 성공 아닌가 생각했었는데. 돌이켜보니 코닥과 코닥 어패럴은 엄연히 다른 사업체고, 파산 신청한 코닥은 스마트폰마저도 실패했으니 적어도 카메라 업계에서는 끝난 것이 맞다. 코닥이 디지털을 거부한 건 방송사가 유튜브를 안 하는 것과 동일하다는 말을 들으니 더욱 확실하게 이해가 됐다. 망한 집 1등은 아무 소용없다는 말까지도. 대면 주문 창구를 전부 없앤 채 어르신들에게도 키오스크 이용을 강제하는 것엔 여전히 찬성하지 않지만, 급격히 빨라지는 변화를 직접 느낀 세대라면 그 변화의 흐름을 충분히 타는 것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방법인 듯하다.
회사 내 연공서열이 사라지면서 모두가 평등해지는 현상도 MZ 어쩌구로 볼 게 아니었다. 누구든 언제든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시대인데. 평생직장이 사라지면서 능력에 따른 즉시 보상에 더욱 무게가 실리는 추세를 인지했다면 오히려 연차가 차는 것을 두려워하며 나만의 것을 갈고 닦았어야 했다. 고백하자면, 제법 든든한 학력과 꽤 올라간 연차로 조금은 안심하고 있었던 것 같다. 두 발을 나만의 땅에 단단히 붙이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은 하면서, 학력과 연차로 쌓인 지푸라기 땅에 앉아 갈고 닦기를 미루고 있었던 거다. 송길영 님의 표현을 빌자면 학력은 목표를 위한 성취일 뿐인데. 졸업한 지 30년이 지나도록 학생 시절의 영광을 말하는 덜떨어진 인간이 되지 않으려면, 나 때는 이러저러했다는 옛날 토크만 계속해대는 젊은 노인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나만의 컬러가 담긴 땅을 단단히 일구어 나가야 한다.
문제는 그 컬러가 뭐냐는 것인데, 그것을 찾으려 하지 않았음을 또 이 강의에서 여러 번 느꼈다. 시대상이 녹아 있는 책 몇 권이 장표에 등장할 때마다 읽으신 분? 하고 물어보셨는데 단 한 번도 손을 들지 못했거든. 여러분 콘텐츠 만드는 사람들이잖아요. 뜨는 건 보세요. 여러 사람이 함께 공명하는 건 반드시 챙겨 보세요. 블로그엔 없는 보상이 책과 논문엔 있거든요. 그러면 양질의 내용은 어디에 있겠어요? 제발 블로그 읽지 말고 책과 논문을 보세요.
그러면서 덧붙인 건 오리너구리 이야기다. 오리너구리 과 오리너구리 속의 유일한 동물군인 오리너구리. 오리너구리가 되라는 말은 곧 유일해지라는 뜻이었고, 분류되지 않으면 경쟁할 필요가 없다는 의미도 내포하고 있었다. 수많은 피디 중 하나가 되지 말고, 피디로 정의하지 말고, 스스로의 직업을 따로 정의하기. 제2 말고 제100 말고 제1의 무언가가 되기.
오리너구리가 되세요
제작자 입장에서 오리너구리가 되려면 가장 중요한 건 뭘까. "가장 중요한 건 내러티브" 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온갖 인증과 기록이 넘쳐나는 시대. 그 기록이 포트폴리오가 되는 시대. 잘 만들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보다는, 이미 수십만 팔로워가 있는 크리에이터나 책을 낸 브런치 작가를 믿을 수밖에 없는 시대. 가장 중요한 건 여전히 캐릭터고, 그 캐릭터는 서사에서 나온다는 흐름이었다. 이 말에 너무나 큰 자극을 받은 나머지 메모장에 쓰던 일기를 별안간 브런치로 옮기게 된 나... 벌써 15년 가까이 일기를 써 오고 있는 기록쟁이지만, 어쩐지 이런 곳엔 정제된 글만 올려야 할 것 같아서 매거진 계획만 세우다 용두사미로 끝나곤 했다. 쌓여 있는 글감만 산더미인 것도 스트레스인 상황. 그러니 이젠 내러티브를 위해서라도 일기를 그때그때 옮겨보기로 한다. (또 촬영 들어가면 뜻대로 안 되겠지만 대충이라도...)
일단 Small Fandom 위주로 생각하라는 조언도 있었다. 트로트 스타가 되고 나서 발라드를 부르기 시작한 임영웅을 보라고. 통계적으로 31세부터는 새로운 음악을 듣지 않는 경향이 있는데 얼마나 많은 5, 60대 분들을 발라드 듣는 팬으로 만들었냐고. "트로트 가수 임영웅"이라는 브랜드는 깨졌지만 "임영웅"이라는 형태는 남은 채 여전히 수많은 사람들을 모이게 한다. 그러니 공간이든 커뮤니티든 그곳에 모이는 사람을 보고, 그들을 모이게 하는 브랜드의 원형 즉 오리너구리를 생각하자.
한 가지 더. 오리너구리가 되려면 잘될 것 같은 것 말고 깊은 것을 하라고 했다. 1400일짜리 샤인머스캣 키우기를 한 포스트에 올리는 것처럼 아주 높은 밀도로. 잘될 것 같은 걸 중상 정도로 해봐야 레퍼런스도 되지 않는다는 말에 다시 한번 순살이 되었다. 책을 네 권 쓰고 나니 작가라는 호칭으로 불리더라고요. 하다 보면 언젠가 되니까 비바람 불 때 결코 멈추면 안 됩니다.
궁극의 오리너구리 되기를 인생의 목표로 잡았다면, 먼저 지금 하고 있는 프로그램에서 색깔 내보기를 연습하는 게 어떨까? 촬영하면서 내가 보고 느낀 것들이 오롯이 프로그램의 서사가 되는 독특한 구조니까. 스스로 하나의 캐릭터가 되어 풍덩 빠져볼 필요가 있다. 어떤 오리너구리가 되어볼까나.
PS.
충분히 발전된 한국의 현재 모습이 세계의 미래일 수도 있다는 말씀도 기억에 남는다. 그러니 이것을 밖으로 던지기만 해도 좋은 결과가 있을 거예요. 글로벌이라는 말은 이미 옛날 말이지만, 그래도 아직 글로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