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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제 Oct 25. 2023

코로나 막차

231020 언저리의 기록


코로나 막차를 탔다. 지난주 목요일 오후, 몸이 안 좋고 답지 않게 목과 위가 아파서 이상하다 했는데. 먼저 퇴근한 후배들 넷이 모여 밥을 먹고 있다는 소식에, 평소 같았으면 신나게 달려갔을 것을 자꾸 주저하는 스스로의 모습이 이상하다 했는데. 다음날 혹시 몰라서 챙겨간 마스크가 없었다면 회의 내내 허공에 대고 재채기하는 대형 민폐인이 되었을 것이다. 기침을 이백 번쯤 했을 무렵, 주섬주섬 약국 약을 꺼내는 내게 선배는 약이 안 듣는 것 같다며 코로나 검사를 권유했다. 순간 아차 싶어서 서둘러 코를 찔렀는데 세상에. 아니나 다를까 선명하게 두 줄이 떠 있었고, 결국 조퇴 후 몇 가지 정리만 하고는 쓰러지듯 잠에 빠졌다.


솔직히 토요일엔 마음이 좋지 않았다. 멀리까지 답사를 다녀오기로 했던 날이었으니까. 마지막 주말일 것을 알면서도 출근하는 답사팀에서 빠져나와, 혼자 이렇게 쉬게 된 것이 영 찜찜했다. 약기운 때문에 쏟아지는 잠을 애써 물리치며 괜히 슬랙을 켜고 이것저것 끄적거린 날.


하루를 이렇게 보냈으니 아무리 다음날이라고 해도 차도가 있을 리 없었다. 고기며 김치를 싸들고 이 먼 곳까지 다녀간 엄마아빠와, 영양제며 죽이며 배민 쿠폰을 마구 보내주는 선후배들과, 좋아하는 연시를 큰 놈으로 한 판 사들고 퇴근한 안깥양반의 따뜻한 잔소리에 힘입어 보일러를 뜨끈하게 올리고 낮잠을 길게 잔 일요일. 생각해 보니 폭풍 전야 같은 이때에 건강을 잡아야 했다. 다들 바쁘게 기획회의 하고 자료조사 하느라 바쁜데 빠져서 어떡하지... 를 걱정할 때가 아니었어. 몰아 쉬어서 건강을 되찾아야 진짜 바쁜 시기에 활발히 일할 수 있는 건데. 그것이 더 큰 민폐를 방지하는 길인데. 이렇게 사람이 생각이 짧다.


결국 월요일 하루 연차를 쓰면서까지 (질병휴가를 내 본 건 처음이라 기분이 이상했다. 오직 건강 회복을 위한 연차라니 세상에... 라는 생각을 애써 물리치며 상신하니 코로나인 걸 아는 팀장님은 번개처럼 승인을 눌러 주셨다) 푹 쉬고야 말았다. 내일은 건강하게 출근해야겠다는 다짐을 하며 보일러 팡팡. 따뜻한 서재방에서 조용히 편안한 시간을 보내고, 배달 음식을 주문해 먹고는 (혼자서 배달음식 주문하는 것도 처음이었음... 코로나 덕에 처음 하는 경험을 참 많이도 한다. 땡스 투 코로나) 집 청소 후 깔끔하게 씻으니 마치 코로나가 사라질 준비를 하는 것만 같다.


엄마아빠밥. 저 모든 그릇이 엄마아빠 손을 거쳤다. 엄마가 한 밑반찬과 아빠가 기른 채소의 콜라보.
안깥양반 덕분에 좋아하는 과일을 잔뜩 먹는 아침. 아프니까 이런 게 좋...


막상 출근하려니 몸이 물에 젖은 듯 무겁긴 했다. 땀을 뻘뻘 흘리며 두 발에 모래주머니 찬 사람처럼 어기적 어기적 걸어 겨우 회사 도착. 하필이면 점심도 주문하고 저녁도 주문하며 내달린 하루여서 쉽진 않았지만, 기침 방지용 레몬 사탕과 따뜻한 차를 몸에 들이부으며 견뎌내고는, 퇴근하자마자 씻고 기절하듯 잠들었다.


코로나 때문에 모든 스태프들이 맞는 예방주사마저 미뤘으니 얼른 떨쳐내야지. 이제 보름 앞으로 다가온 촬영 준비 중 가장 중요한 건 여행 지식도, 카메라 적응도, 외국어 습득도, 출연자 공부도 아닌 건강임을 뼈저리게 느낀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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