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026 언저리의 기록
#1
여행지 조사가 드디어 끝났다. 앞으로도 틈틈이 보완해야 하겠지만 적어도 한 바퀴는 돌았으니 제법 축하할 일이다. 촬영지가 될지도 모르는 국가 후보지를 줄세우고는, 날씨와 언어와 문화와 특별한 액티비티, 축제, 숙소 같은 것들을 전방위적으로 조사한 시간들. 두 달 가까운 기간 동안 팀원들을 이렇게 가르고 저렇게 갈라 조를 만들어 움직이면서, 혹시라도 놓친 "재밌는 것"이 없는지를 치밀하게 살폈다. 마치 진짜 여행을 다녀온 듯한 착각에 이어 이 호수가 저 나라였는지 그 나라였는지 헷갈릴 지경이 되자 우리가 여행사인지 제작팀인지 모르겠다는 심심한 농담이 불쑥 튀어나왔지만, 그래도 지구 한 바퀴를 돌고 나니 어느 정도의 정보가 머리에 들어온 느낌이라 든든하기까지 하다. 수고하셨습니다, 라며 다 함께 친 박수엔 후련함과 뿌듯함이 섞여 있을 것이란 이야기다.
모르긴 몰라도, 모두의 머리엔 두 가지 의문이 내내 맴돌았을 것이다. 어차피 다 쓰지도 않을 정보를 왜 찾는가, 어차피 내가 가지도 않는데 왜 찾는가. 첫 번째 의문은 어찌 보면 너무나 자연스럽다. 출연자의 생각과 선택을 최대한 존중하여 따라가는 것이 우리의 기조이니까. 하지만 그건 시청자의 시선이고, 우린 더 큰 범주를 봐야 한다. 시청자의 눈에는 출연자가 전부지만, 그들의 자유도를 높이려면 우리가 더 많은 걸 알아둬야 한다는 말이다. 제작진이긴 하지만 우리 역시도 아직 겪어보지 않은 프로그램이라 간과하기 쉬운데, 출연자가 딜리버리 하는 건 프로그램의 컬러일 뿐, 본질은 출연자와 제작진이 "함께" 만들어야 한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출연자들이 더 재밌는 선택을 하기 위해 돕는 역할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은 천지차이라는 걸 우리는 믿어야 하는 것이다. 어느 프로그램이든 마찬가지겠지만 구성 ~ 촬영 단에서 제작진의 가장 큰 기능이자 목표는 출연자의 포텐이 최대치가 될 수 있게 만드는 것이니까. 이것을 가장 잘하는 제작진이 가장 능력 있는 팀인 거니까.
두 번째는 이 프로그램 들어와서 상당히 높은 빈도로 고민하는 부분이다. 어차피 내가 가지도 않는데 왜 찾는가. 어차피 내가 가지도 않는데. 세상엔 수많은 프로그램이 있지만, 이번 프로그램이 참 독특하다고 생각하는 지점이 바로 이 부분이다. 적어도 나의 경험 속엔 몇십 명이 함께하는 대형 촬영이 대부분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제작진 전체가 하나 되어 함께 고민하고 준비하는 것이 자연스러웠다고 해야 할까. 항상 자연스러웠던 그 부분이, 극소수의 스탭만 촬영에 투입되는 이번 구조 속에선 조금 어색하게 느껴진다.
물론 이렇게 도의적이지 못한 고민을 대놓고 하는 팀원은 없다. 오히려 서치에 푹 빠져서 세상 가장 재밌는 아이템을 발굴하느라 여념이 없었더랬다. 하지만 아주 잠시 스쳐오는 어떠한 상념처럼, 조사에 몰두하다 지칠 때쯤엔 한 번쯤 이런 생각이 찾아오지 않았을까... 생각해 보는 것이다. 구성과 촬영, 편집까지 모두 아우를 때 책임감과 주인의식이 최상으로 올라가긴 하니까. 누군가의 촬영을 위해 밥상을 차려주는 경험은 아마 다들 흔치 않았을 테니까. 결국 이것도 다 주인의식이 강하고 의욕이 높아서 생기는 고민이다.
#2
후배 한 명과 커피를 마시다가 이런 대화를 했다. 잘 되는 프로그램에서 적당한 롤을 하는 1인이 나을까, 안 되는 프로그램에서 슈퍼맨처럼 중요한 롤을 하는 1인이 나을까. 양자택일의 문제는 아니지만, 굳이 이 둘 중에 정해야 한다면 후배는 전자라고 했다. 저는 무조건 잘 되는 팀을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러면 후배들도 좋게 보이거든요. 그는 누구나 알만한 선배의 이름을 말하며, 그 선배에게 자신이 좋은 기억인 이유는 잘 된 프로그램을 할 때 자신이 그 팀에 함께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단지 그뿐이라며 겸손의 말을 했지만, 당연히 너는 잘했으니까 그랬겠지, 라고 응수하며 나는 스스로의 생각이 조금 변하는 걸 느꼈다. 그렇네. 너무 잘 된 팀에서 일을 했으니까 이 후배도 일을 잘하게 된 거네. 능력자가 팀을 성공시키느냐 성공한 팀에 능력자가 있느냐는 닭달걀 문제라고 생각했는데, 다시 고민해 보면 저 문장 안엔 엄연한 시차가 있다. 능력자가 몇몇 존재함으로써 팀이 성공하겠지만, 성공한 팀에서 나오는 사람들은 모두 능력자가 되는 것이다.
사실 전자보다는 후자가 낫다고 생각했었다. 프로그램이 대박 나지 않아도 좋으니 내가 배우는 게 많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것이 덜 이기적인 사고라고 여겼는데. 알고 보니 훨씬 이기적인 생각이었다. 프로그램이 잘 되면 결국 모두가 빛나므로, 제작진 모두를 위해서는 프로그램부터 성공시켜야 한다. 우리 팀원들은 "몇 명의 촬영을 위해" 국가 조사를 한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를 위해" 일하고 있었던 것이다.
소수가 참여하는 촬영은 곧, 그 소수가 모든 책임을 져야 한다는 의미다. 이 촬영이 프로그램의 성패에 영향을 미치고, 그것은 다시 모든 팀원의 미래에 영향을 줄 것이다. 어깨에 져야 할 짐이 훨씬 무겁다는 사실을 깨달았으니 그만큼 몸과 마음의 근력을 더 키울 필요가 있다.
#3
국가 조사를 마지막으로 정리하고 있을 무렵, 열흘이 넘는 첫 번째 촬영을 다녀온 팀원 두 명이 도착했다. 묵직한 배낭 두 개를 앞뒤로 둘러메고 회의실로 들어오는 그들에게, 우리는 개선장군을 맞이하는 듯한 큰 박수를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