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Metanoia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Yuie Coree Jul 04. 2024

제갈 량과 앙드레 김과 베이비

아마도 나의 마지막 어쿠스틱 피아노

3아마도 나의 마지막 어쿠스틱 피아노

BGM: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https://www.youtube.com/watch?v=v2-LG9hcM8E

Played by Thérèse Dussaut



  물욕이 없(다기보다 소유하는 걸 귀찮아하)는 편이지만 피아노만은 꼬꼬마 때부터 내 것을 갖고 싶었다.


  "너 그랜드 피아노 사 줄 돈 모아야지."

  대학 시절, 그가 진지하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내가 뭔가 갖고 싶다고 말한 적이 그것 외에는 없어서 그랬겠지만, 기분이 좋으면서도 부담스러워서 떨떠름한 웃음이 나왔다.

  "내가 모아서 살 건데?"

일반적으로 선물 받을 종류의 물건이 아니니까, 괜히 떠보듯 조르는 것처럼 비칠 우려가 없어 털어놨던 포부인데. 그렇게 자기 포부로 바꿔치기 해서 훅 들어오다니. 앞으로 갖고 싶은 게 생겨도 말 못 하겠잖아.

 

  그의 말은 지금에서야 그에겐 먼 역사 속 이불킥감 이하겠으나, 나는 진심이 담긴 그 한마디만으로도 선물을 받은 셈이라 감동스럽긴 했다. 만 얼떨결에 계속 인생을 함께 했다면 그는 정말로 언젠가 짜잔~하며 그럴 사람이었으니까. 보상 심리가 당연히 기대되는 그런 족쇄 같은 선물은 부모님이 주신대도 체할 것 같지만, 어쨌든 그 마음만은 기뻤다.

  돌아보면 그의 구스 패딩 같은 사랑 덕에 삶의 피아니시모를 좀 더 잘 연주할 수 있게 된 것 같다. 이후 나와 사귀며 좋았던 사람이 혹 있다면, 그건 상당 부분 그의 덕인지도 모른다. 



  한편

부끄럽고 후회스럽게도, 미처 풀지 못한 원망이나 불가항력적 스트레스의 불똥을 엉뚱한 곳에 퉁명스럽게 튀긴 적도 많았다. 착하거나 힘이 없거나 나를 사랑해서 견뎌주는 것뿐인 상대에게 철없이 응석 부리듯 못난 화풀이를 않기 위해, 나는 혼자서 울분을 승화시키는 작업이 필요하다. (그 시간들을 자꾸만 방해받은 까닭에 불똥이 튈 수밖에 없는 경우도 있었다.) 유기체와의 상호 작용으로 치유받아야 할 때와 무기질적 환경에서 홀로 승화시켜야 할 때를 분별해야 한다. 후자를 위한 방법으로는 미뤄둔 일들을 정리하고 몸을 움직이며 사념을 삭이거나, 창작을 통해 정신 균형을 맞추거나, 영혼에 스미는 작품을 감상하며 카타르시스를 얻는 것과 더불어, 피아노와 깍지 끼고 춤추는 걸 좋아했다. 그 작업들은 염소처럼 독한 스트레스와 소듐처럼 쉬이 폭발할 듯한 마음도 자연스럽게 약간의 소금으로 바꿔 준다.






  약 7년 전. 가족들 물건을 맡아두느라 내 방이 더 갑갑해져 버려서 갖고 있던 영창 업라이트 피아노를 팔았다. 몇 달인가 심호흡을 좀 하다가, 염원하던 베이비 그랜드를 중고로 지르리라 결심했다. 잘 아는 가게 홀에 놓아두기로 하고.


 

  "외관은 멀쩡하기만 하면 상관없고요, 소리만 듣고 살게요. 꼭 고집하는 브랜드가 있는 건 아니지만 마음 같아선 야마하를 사고 싶은데 비싸서 무리겠고, 삼익 특유의 각진 소리보다는 80년대 중후반~90년대 초중반에 생산된 영창처럼 맑고 부드럽게 울리는 소리를 좋아합니다. 피아니시모를 쉽게 낼 수 있으면서도 조금 묵직한 타건감을 선호하고요. 적당한 게 있을까요?"


  "저걸로 하시죠. (어차피) 이 매장에 베이비 그랜드는 지금 저거 하나밖에 없어요. 다른 데 가도 구하기 힘들 겁니다."

  사장님은 아이보리색 그랜드를 가리키셨다.


  "네, 다른 곳도 대체로 사정이 비슷하긴 하더라고요. 근데 이거 삼익이잖애요효오.... (다른 데서도 영창 베이비 그랜드는 아직 못 봤지만요.) 음... 건반 무게감은 딱 괜찮은데... 그러니까 제 말은... 제 실력이 부족해서 더 그렇긴 하겠지만, 소리가 말이죠, 이렇게 퉁-퉁- 쳤을 때 이런 캉-캉-거리는 느낌이 부담스럽거든요. 게다가 희멀건 (꾀죄죄한) 바탕에 이 (낡은) 금장은 너무... 때 탄 앙드레 김 짝퉁 같아요. 아무 장식 없이 밋밋하면 허름해도 괜찮은데...외관은 신경 안 쓴다는 건 이렇게 촌스러운 피아노를 실제로 본 적이 없어서 나온 말이었어요.^_^;;"


  "싸게 드릴게요. 내부 상태는 괜찮은 편이고, 소리는 조율하기 나름이죠. 영창 소리로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음... 그게 가능한가요?"


  "가능합니다."

실력을 미리 보증받고 방문했기에 허세일 리는 없다고 생각했지만,

자신감이라는 수식조차 필요 없는 것 같은 덤덤한 표정과 말투. 너무나도 당연한 기술이라 굳이 내세울 것도 아니라는 듯한 고수의 여유가 느껴졌다.


  추천받은 그 피아노는 이전 주인(들)이 연습보다는 전시나 이벤트 목적으로 샀던 것인지(가령 예식장이나 라이브 카페라든가), 현과 건반 상태는 주변 영창 그랜드보다 훨씬 안정적이었다. 적어도 흔한 연습실에서 방황하는 손들을 마르고 닳도록 받아내느라 만신창이가 되어도 최소한의 조율만 수혈받으며 질곡의 무한 시간을 견딘 적은 없는 듯했다.


  현이 한두 개쯤 끊어져 버리는 거친 시간을 거친 녀석들의 경우, 새로 교체한 현은 조율 후 음이 풀리는 정도가 헌 것과 달라서 충분히 조화를 이루기까지 시일이 걸리기도 한다. 또 조정 상태에 따라서는 조율을 마친 양호한 현이라도 묘하게 거슬리는 잡음이 나는 경우가 있어서 웬만하면 건반을 쭈욱 다 눌러보며 직접 확인하는 게 좋다. 바로 옆에 놓여 있던, 말끔히 턱시도를 차려입은 듯한 풀 사이즈 영창 그랜드가 다 해당됐다. 전쟁에서 생환 후 치료는 일단락됐지만 골병이 들어버린 병사처럼.



  "... 가격은 얼마인가요?"


  그때까지 알아본 중에 그나마 가장 저렴한 값을 부르시긴 했으나, 덜컥 사기에 부담스러운 건 여전했다. 아기라도 거대한 아기니까.


  "어...(깎아 주신 것 같아 감사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1순위 조건은 '소리'니까)... 그럼 다시 조율하신 후에 들어보고 정할게요."



  며칠 뒤 연락을 받았다.


  "음... 부드러워지긴 했지만 아직 좀 쨍쨍거리는 느낌이 나는데요. 자유자재로 잘 치는 사람들은 또 맞춰서 칠지 몰라도, 제가 치면 그냥 시끄럽기만 요. 예를 들어 저는 이걸로 피아니시모를 치려고 해도 은은하지가 않고...(텅-텅-) ...이렇죠. 뭐랄까... 시선만 끌면 무조건 돋보이는 건 줄 아는 빈 깡통 관종이라도 된 기분이라 편하게 칠 수가 없어요."


  "조금 더 손보면 됩니다. 며칠 후에 다시 와서 들어보세요."




  악보 기호 중 'p'는 피아노piano라고 읽고, 여리게 연주하라는 뜻이다. 피아노라는 악기 이름에서부터 알 수 있듯, 대가들의 솜씨는 p~pp(피아니시모pianissimo;매우 여리게) 연주의 기량에서 특히 극명해진다. (ppp피아니시시모까지 있다). 포르테(forte;강하게)는 막 배운 어린아이도 나름대로 표현할 수 있지만 섬세하고 여리게 치면서도 건재한 소리를 내는 연주는 보기보다 깊은 내공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어릴 땐 연주자들의 화려한 기교에만 정신을 뺏겼던 탓인지- 나는 피아노를 좋아하는 것 치고는 피아노도 포르테만 잘 쳤던 게 아닌가 라는 반성을 처음 한 게 언제더라. 아무튼 그렇게 돌아볼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어쩌면 연주 실력의 향상보다도 그런 확장된 성장의 기회를 얻기 위해 피아노를 쳐왔던 게 아닐까.



  세 번째 방문에도 마음에 안 들면 무어라 하고 거절할 것인가 생각하면서 찾아갔는데, 솔직히 조금 놀랐다. 외관은 더 이상 안중에 없어지는 소리였다.

  "우와. 어떻게 하신 거예요? 멋진데요?"

  "힘 좀 썼지요."

  "... 세 번을 찾아와서 데려가니까 량이라고 애칭을 붙여야겠습니다."

  " ? "

  "삼고초려 제갈 량이요ㅋㅋ 쫌 경우가 다르지만..."

  "아...^_-; 헣헣ㅎ"

    그렇게 흥정하지도 않고 부르는 값 그대로 데려왔던, 앙드레 김 짝퉁을 입은 량. (외모 따지는 사람들에겐 청음의 기회조차 없었을 녀석이니, 사장님으로선 Now or Never의 심정으로 필살기를 쓰셨던 것 같기도 하다.)


  실제로 들여놓고 보니, 주황빛 조명을 받으면 꾀죄죄함도 자동 보정되고 예뻐 보였다. 콩깍지 효과도 있었는지 모르지만. 그랜드 피아노의 디자인은 대체 누가 창시한 걸까. 상은 받았겠지?






  그렇게 수년간 내 일상이라는 요리에 소금 같던 량. 하지만 계속 놔둘 곳이 마땅치 않고 관리도 점점 소홀해지는 것 같아서 작년에 결국 팔아버렸다. 혹시라도 골병이 들어 미안해지기 전에.


  벌써 일년이 지났지만... 이 글의 초고를 직후부터 써 놓고도 어딘지 먹먹하고 서운하여 여태 탈고하지 못하고 있었다. 책장을 처분하다가 나온 절판본 무소유램프 장수에게 팔아넘겨서 과자나 사 먹은 인간이 무슨 드라마틱한 미련이 있으랴마는, 역설적이게도 무소유의 의미는 소유의 이해 없이는 알 수 없는 법이다. 소유의 의미 또한 무소유에 대한 이해 없이는 알 수 없다. 내 것이라고 부를 때의 이 피아노를 떠올리지만, 내 것이 아니라고 부르는 상태가 됐을 뿐이다. ...어쩌면 최근에 금강경을 다시 읽은 덕에 이 글을 발행하는지도 모르겠다. 무소유는 소유하지 않음이 아니다. 소유는 가지는 것도, 무소유가 아닌 것도 아니다. 내게 공간과 능력이 충분했다면 쭉 소유라 부르는 상태로 있었을 테니 무소유에 대한 고상한 의지가 있다고 할 수도 없지만.

  거래했던 분의 표현을 그대로 인용하자면 '피아노 수요 급감으로 인해 (업자들의) 중고(매입)가가 바닥을 치고도 더 파고 내려가 또 바닥을 치기를 열 번쯤 한 역대 최저 시기(코로나 직후 최악의 주가를 예로 드셨다. 후회하지 않겠냐는 듯.)'라서 매입가의 3할도 못 받았지만, 완전히 새 단장 멋지게 하고 (흑색으로 새것처럼 도장해서) 비싼 값에 팔릴 모양이었다. 음향판 멀쩡하고 음색도 맑고 풍부한 녀석이었으니 날개를 달겠지. 네가 흰 옷을 입든 검은 옷을 입든 량이라고 불리든 삼익이라고 불리든 너는 너지만- 부디 좋은 주인을 만났기를. 외모만 보고 산 사람이라면 곧 네 소리의 진가를 알아주기를. 네 소리를 나보다 잘 끌어내고 성실히 보듬어 줄 수 있는 사람이기를. 내게 머물러 줘서 고맙고 행복했어, 량아.

매거진의 이전글 어린 왕자가 사랑하는 법을 모른 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