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한솔, 다정과 믿음

단편소설집 "서정의 해상도" 미리보기

by 유인도

준호와 연인이 된 지 삼 년째 되던 날이었다.

기념일을 맞아 점심을 먹기로 하여, 나는 평소보다 이른 시각에 눈을 떴다. 한 시간 정도 거울 앞에서 여러 옷가지들을 몸에 대보고, 공들여 화장을 하고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준비에 공을 들이는 날에는 꼭 일찍 일어나는데도 아슬아슬하게 지각을 면하는 나였기에, 정성들여 편 머리가 망가질까 뛰지는 않았지만 보폭을 넓히며 빠르게 걸었다. 제때 승강장 앞에 도착한 나는 숨을 고르고 무의식적으로 왼쪽 손목을 올려 시간을 확인했다. 준호가 선물해준 아날로그 시계는 여섯 시 가량을 가리킨 채 멈춰 있었다. 시계 약이 언제부터 닳아 있었던 건지 알 수 없었지만, 다음 주에 시계방을 한 번 들러야겠다고 생각했다. 창밖 풍경의 모습이 마치 스톱모션 같았다. 태양은 이따금 승객들의 숙인 정수리를 노랗게 비췄다. 환승 에스컬레이터를 등산하듯 올라 탄 2호선 열차는 여느 때처럼 주말이라는 이유로 붐볐다. 사람들 틈에 끼어 준호가 예약했다는 양식 레스토랑을 검색했다. 후기 사진을 구경하며 무엇을 먹을지 고민하는 사이, 어느새 열차는 신촌역에 다다랐다.


사람들의 흐름에 떠밀리듯 내려 3번 출구 앞에 도착했는데 약속 시간에는 간신히 세이프였다. 출구의 사람들은 듬성듬성 서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나도 그 풍경의 일부라는 생각에 괜히 머쓱해졌다. 최근 통화 목록의 큰 지분을 차지하고 있는 그의 이름을 눌러 전화를 걸었는데, 통화 수신음이 몇 번 걸리다 이내 끊겨버렸다. 그와 나눈 마지막 연락은 내가 보낸 출발했다는 카톡이었는데, 말풍선 옆 숫자는 보이지 않았다. 뜨거운 여름 햇빛에 눌린 땀줄기가 어느새 관자놀이를 타고 내려오고 있었으므로, 근처 프랜차이즈 카페에 들어가 그에게 문자를 보냈다. 답장을 기다리며, 창가 쪽에 앉아 그를 기다렸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주문하고, 넘기다 만 짧은 동영상을 다시 보고, 이내 불안해졌지만 다른 고등학교 친구들과 연락을 주고받으며 시간을 떼우려고 했다. 그러는 사이 휴대폰 배터리가 꺼졌다. 아뿔싸. 전날 잘 때 충전선이 뽑혀버린 것이 화근이었다. 급한 대로 카운터에 양해를 구하고 충전을 부탁드렸다. 바라볼 수 있는 시야가 넓어진 나는 다시 자리에 앉아 창밖 풍경을 살폈다. 함께한 세월이 짧지 않아, 걸음걸이만 봐도 즉시 준호가 어디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준호는 보이지 않았다. 내 손목 위의 침 역시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주문한 음료의 얼음이 녹고, 잔 표면에 물방울이 맺히는 것으로 시간의 흐름을 느꼈다. 시간을 숫자로 감시하지 않으니 시간이 지나치게 느리게 가는지, 혹은 쏜살같이 가는지 알 수 없었다. 잔 표면에 매달려 있던 물 한 방울이 바닥과 수직으로 만나며 똑, 하며 떨어졌을 무렵, 카페 직원이 어느 정도 충전된 휴대폰을 들고 다가왔다. 측면 버튼을 누르는 동작에는 나도 알지 못했던 두려움이 묻어 있었다. 마침내 전원이 켜졌다. 본래 만나기로 한 것보다 한 시간 정도, 예약된 시간보다는 30분 가량이 흘러 있었다. 메신저에 접속하니, 새로운 메시지가 도착했음을 알리는 빨간 점이 하나 떠 있었다.


미안해.


준호에게서 약 20분 전 도착한 단 한 건의 메시지였다. 서둘러 보이스톡 버튼을 눌렀지만 응답이 없었다. 두 번, 세 번 눌러보아도 감정이 지나치게 경쾌한 기본 연결음 외에는 아무것도 들려오지 않았다. 연인끼리의 특별한 날, 예약된 식당, 아무런 설명 없이 세 글자를 보내두고 갱신되지 않는 메시지와 준호의 무응답은 뚜렷한 무언가를 내포하고 있었다.

그제서야 왼쪽 손목이 무거웠다. 더 이상 순환하지 않는 3개의 바늘이 차가운 금속 덩어리 위에 위태롭게 매달려 있었다. 문득, 준호를 처음 만났던 스물한 살의 여름이 떠올랐다.

*

대학교에 입학한 이후 적응 기간을 거치고, 부모님의 울타리 밖으로 빼꼼 고개를 내밀기 시작하던 시기였다. 당시 나는 대학 동기에게 준호를 소개받았다. 학창 시절 이성과는 접점이 없다시피 했던 나였기에, 흔쾌히 수락하고도 그를 만나기 하루 전까지 몹시 긴장했었다.

준호는 같은 학교 공과대학에 다니는 복학생으로, 나보다 나이가 많았다. 스무 살에 재수를 하며 1년간 혼자 지냈던 경험으로 여러모로 성장했다고 말했다. 그는 착실한 사람이었다. 코로나 시기로 인해 제대로 된 1학년을 보내지 못해 아직도 고등학생에 머물러 있는 것만 같은 나와 비교했을 때 그가 엄청난 어른과도 같이 느껴졌다.

그와 네 번째로 만났을 때, 그는 나와 사귀고 싶다고 말했다. 말을 끝마치기까지 오래 걸려, 고백을 듣는 내가 그를 도와줘야만 했다.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몹시 쑥쓰러움을 타는 그의 모습이 왠지 귀엽게만 보였다. 나는 승낙했고, 그러자마자 자연스레 나의 세계에는 준호가 들어찼다.

준호와 함께한 덕에, 사랑으로 가득한 이십 대 초반을 보낼 수 있었다. 생전 처음 나눠보는 낯간지러운 말과 표현도, 그와 주고받는 것은 어색하지 않았다. 준호의 말에 따르면 그는 본래 글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지만, 나의 강요에 못 이겨 기념일에는 편지를 보내주기도 하였다. 사춘기에 접어든 이후 약점이라고 생각해 감춰온 다정함과 유약함도 준호 앞에서는 마음껏 드러내었다. 나는 그에게 마르지 않는 사랑을 주었고 그를 행복하게 만들기 위해 온 마음을 쏟았다. 여타 연인들처럼 다툼이 있기도 하였다. 준호가 먼저 나에게 불만을 표하는 일보다는 내가 그에게 일방적으로 서운한 일이 많았다. 내 마음에 단 하나의 앙금도 남아있는 것이 싫어, 늘 내가 먼저 용기내어 이야기를 꺼냈고 준호는 묵묵히 들었다. 언젠가 그가 나에게 보내온 글에서, 준호는 자신을 단단한 바위에 비유하였다. 진심에서 우러나온, 멋진 표현이라는 생각에는 지금도 변함이 없다. 그 말을 지키는 것처럼, 준호는 삼 년간 내 곁에 머물러주었다.

그러나 바위의 속이란, 쪼개버리지 않고서야 도저히 들어가 살펴볼 수 없는 것이었다. 오히려 울퉁불퉁한 표면을 긁는 내 손에 생채기가 났다. 나는 다른 사람의 깊은 세계에 들어가본 것은 처음이라, 이곳저곳을 탐색하고 싶어했다. 어떤 곳은 활짝 열려 있어 나를 환영했지만, 어느 곳은 굳게 닫혀 안을 살펴볼 수 없었다. 게다가 천장이 다소 낮아, 몸을 웅크리거나 숙이지 않으면 종종 머리를 부딪히고 말았다.

삼주년을 맞기 한 달 전이었다. 자기 전 여느 때처럼 통화를 하다 나는 옛날 이야기가 떠올라 울었고, 준호는 이미 몇 번 들은 이야기에 별 반응이 없었다. 통화 중 울음을 흘리는 것이 그를 힘들게 만드는 것이냐고 물었고, 준호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그렇다고 했다. 다음 날 일찍 일어나야 하는 준호를 방해하고 싶지 않아 그렇게 그날의 대화가 끝났다.

그날로부터 한 달 동안, 그와 나 사이에서는 일상적이거나 재미있는 이야기가 오갔다. 나는 가끔 울기도 하였지만 준호 앞은 아니었다. 일주일에 한 번은 꼭 데이트를 하는 도중 느껴지는 공허한 기분을 애써 무시하고자 했으나 그 시간 동안 익숙하고도 새로운 준호의 모습, 내가 삼 년 동안 반복적으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했던 그의 행동이 크게 눈에 밟혔다. 또다시 이야기를 꺼내 말다툼을 시작할 힘은 없었다. 나는 그의 손을 잡고 있는 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준호와 나는 삼 년 동안 마주보며 함께 웃긴 했으나, 같은 곳을 향해 나란히 앉아있지는 못했다.

그가 나에 대해 이따금 틀린 정의를 내려도, 그가 그의 카메라에 나의 모습을 담았지만 정작 내 손을 잡지 않아도 괜찮았다. 준호의 가장 깊은 이야기까지 듣지 못해도 괜찮았다.

그러나 단 하나, 나는 삼년간 준호를 마음 속 가장 깊은 다정한 곳까지 초대했고, 그가 그곳까지 무사히 도달하길 바랐다. 그러나 그가 진실로 끝까지 가닿았는지는 이제 영영 알 수 없게 되었다.

*

미안하다는 문자를 끝으로 더 이상의 메시지는 없었다. 나는 배터리가 반쯤 찬 휴대폰을 쥐고 집으로 돌아왔고, 다음날까지도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휴대폰 메모장에는 답장을 위해 몇 번씩이고 고쳐둔 문장들이 있었으나, 끝내 전송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내가 했던 말들에 대한 요약문을 보낸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었다.

그렇게 준호와의 관계는 막을 내렸다.

그와 헤어진 지 일주일 째 되던 날, 집에 우편물이 하나 도착했다. 받는 사람 송도경, 보내는 사람 박준호라고 쓰여 있었다. 그의 이름을 보자마자, 나는 반사적으로 우편물을 집어서 뜯기 시작했다. 마치 손가락에도 심장이 있는 것만 같았다. 그 안에는 노란색의 35mm 컬러 필름 세 롤이 들어 있었다. 밖으로 필름 끄트머리가 빠져나오진 않았지만 무게감이 느껴지는 것을 보아하니, 필시 사용 후 현상하지 않은 필름이 틀림없었다. 이는 데이트할 때 가끔 필름카메라를 들고 나를 찍었던 준호에게 어깨너머로 배운 것들이었다.

필름 세 롤 위에, ‘미안해’라는 그의 마지막 세 글자가 둥둥 떠다녔다. 또는 사랑해, 또는 박준호같기도 했다. 눈시울이 뜨거웠다. 눈가에 고인 물로 인해 시야를 확보하기 어려웠다.

현상하지 않은 것을 보니, 준호의 기억 중 내가 담겨 있는 부분은 차마 감당하기 어려웠나 보다. 그러나 나조차 필름 안에 담긴 기억과 감정을 차마 꺼내볼 수 없었다. 둘 다에게 간직하기 어려운 기억은 어디로 가야 하는 걸까.

그해 여름 나는 그토록 많이 울었다. 삼 년 전 여름을 떠올리며 안에서는 생각이 많았고, 밖에서는 습도에 꺾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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